- 부동산 쇼크와 고용 한파가 낳은 '소비 빙하기'
한때 세계의 모든 명품 매장은 중국인 관광객(유커)들로 가득 찼다. 그들의 손에는 명품 쇼핑백이 들려 있었고, 그들의 씀씀이는 글로벌 기업들의 실적을 좌우했다. '14억 인구의 중산층이 지갑을 열기 시작하면 세계 경제는 새로운 성장 엔진을 얻을 것'이라는 장밋빛 전망이 지배했다. 중국 정부 역시 ‘수출·투자’ 중심의 성장 모델에서 ‘내수·소비’ 중심으로 전환하는 ‘쌍순환(雙循環)’ 전략을 국가의 최우선 과제로 내걸었다.
그러나 2025년 8월 현재, 그 거대한 소비 엔진은 차갑게 식어버렸다. 상하이의 화려한 쇼핑몰은 한산하고, 젊은이들은 값비싼 신상 대신 중고 거래 앱을 탐색한다. 은행 금리가 사상 최저 수준으로 떨어져도 사람들은 대출을 받아 집이나 차를 사는 대신, 기록적인 속도로 저축 예금을 늘리고 있다.
이른바 **‘소비 절벽(Consumption Cliff)’**의 도래다. 이는 단순한 경기 둔화를 넘어, 중국 사회의 구조적 문제와 미래에 대한 깊은 불안감이 응축된 결과물이다. 중국 소비자들이 왜 지갑을 닫게 되었는지, 그들의 소비 패턴이 어떻게 변하고 있는지, 그리고 이 거대한 침묵이 중국과 세계 경제에 보내는 경고음은 무엇인지 심층 취재했다.
제1부: 신화의 종언 - 무엇이 소비의 불을 껐나?
중국인들의 소비 심리가 급격하게 얼어붙은 데에는 복합적인 원인이 있지만, 전문가들은 크게 세 가지 ‘충격’을 핵심 요인으로 꼽는다.
1. 부동산 불패 신화의 붕괴: 자산 쇼크
지난 20년간 중국 중산층의 부(富)는 사실상 ‘부동산’과 동의어였다. ‘오늘 산 아파트 가격이 내일이면 오른다’는 믿음은 사람들을 과감하게 소비하게 만드는 강력한 ‘자산 효과(Wealth Effect)’를 낳았다. 내 자산이 불어나고 있다는 착각은 미래에 대한 낙관론으로 이어졌고, 이는 자동차, 가전, 사치품 소비를 견인했다.
그러나 2021년 헝다 사태로 시작된 부동산 시장의 장기 침체는 이 모든 것을 바꿔놓았다. 수십 년 만에 처음으로 ‘자산 가치 하락’을 경험한 중국인들은 패닉에 빠졌다. 자산이 줄어들고 있다는 공포는 미래를 대비해야 한다는 강박으로 이어져, 소비를 극단적으로 줄이고 현금을 확보하려는 움직임으로 나타났다. 즉, 부동산 쇼크가 소비 심리의 근간을 무너뜨린 첫 번째 도미노였다.
2. 고용 한파와 소득 불안: 미래 쇼크
지갑을 여는 가장 중요한 조건은 ‘미래 소득에 대한 안정적인 기대’다. 그러나 2025년 현재 중국, 특히 젊은 세대에게 이는 사치가 되었다.
1)사상 최악의 청년 실업
: 빅테크와 부동산, 사교육 등 과거 양질의 일자리를 제공하던 산업들이 정부의 규제 철퇴를 맞고 구조조정에 들어가면서 청년 실업률은 감당하기 어려운 수준으로 치솟았다.
2)기존 직장인의 임금 삭감
: 경기 둔화는 기업과 지방 정부의 재정 악화로 이어져, 민간 기업은 물론 공무원 사회에서조차 임금 삭감과 보너스 취소 바람이 불고 있다.
‘오늘의 직장이 내일도 보장된다’는 믿음이 깨지면서, 사람들은 불확실한 미래에 대비하기 위해 허리띠를 졸라매기 시작했다. 특히 결혼, 출산, 내 집 마련 등 막대한 돈이 들어가는 생애주기적 소비를 포기하거나 무기한 연기하는 젊은 층이 늘어나면서 내수 시장의 근간이 흔들리고 있다.
3. '제로 코로나'가 남긴 심리적 상처: 신뢰 쇼크
3년간 이어진 고강도의 ‘제로 코로나’ 정책은 중국인들의 마음에 깊은 상처를 남겼다. 도시 전체가 예고 없이 봉쇄되고, 하루아침에 직장과 수입을 잃을 수 있다는 공포를 집단적으로 체험했다.
이 경험은 중국인들에게 두 가지 교훈을 남겼다. 첫째, 국가가 개인의 삶을 언제든 통제할 수 있다는 불신. 둘째, 예상치 못한 위기에 대비하기 위해서는 막대한 ‘예방적 저축(Precautionary Savings)’이 필수적이라는 깨달음이다. 제로 코로나 해제 이후 ‘보복 소비’가 터질 것이라는 기대와 달리, 오히려 가계 저축률이 폭증한 것은 이러한 심리적 트라우마가 얼마나 깊은지를 방증한다.
제2부: '소비 강급(消费降级)' 시대의 풍경
지갑을 닫은 중국인들은 단순히 소비를 줄이는 것을 넘어, 소비의 방식 자체를 바꾸고 있다. 이른바 **‘소비 강급’**이라 불리는 새로운 트렌드가 사회 전반을 지배하고 있다.
1)"가성비를 숭배하라"
: 과거 브랜드와 과시를 중시하던 소비 문화는 이제 ‘가성비(性价比)’를 최우선으로 따지는 문화로 바뀌었다. 알리바바의 타오바오 대신 저가 공동구매 플랫폼인 ‘핀둬둬(拼多多)’가 폭발적으로 성장하고, 화려한 플래그십 스토어 대신 창고형 할인 매장이 인기를 끈다. 스타벅스 대신 1/3 가격의 ‘루이싱 커피(瑞幸咖啡)’를 마시는 것이 합리적인 소비로 여겨진다.
2)"체험은 하되, 사치는 금물"
: 소비 욕구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다만 그 방향이 ‘소유’에서 ‘경험’으로, ‘고가’에서 ‘저가’로 바뀌었을 뿐이다. 대표적인 현상이 **‘특종병사식 여행(特种兵式旅游)’**이다. 이는 주말 등을 이용해 최소한의 경비로 잠을 줄여가며 최대한 많은 관광지를 둘러보는 초저가 여행 방식을 뜻한다. 비싼 해외여행 대신 저렴한 국내 소도시 여행이 각광받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3)"중고 거래와 알뜰 소비의 일상화"
: 명품을 새로 사는 대신 중고 명품을 찾고, 최신 스마트폰 대신 중고폰을 구매하는 것이 더 이상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어떻게 하면 더 적은 돈으로 만족을 얻을 수 있는가’가 모든 소비의 기준이 되고 있다.
제3부: 정부의 고민 - 왜 부양책은 효과가 없는가?
내수 부진이 장기화되자 중국 정부도 칼을 빼 들었다. 기준금리를 인하하고, 자동차와 가전제품에 대한 보조금을 지급하며, 일부 도시에서는 소비 쿠폰을 발행하는 등 안간힘을 쓰고 있다. 하지만 시장의 반응은 냉담하다. 왜일까?
근본적인 원인은 ‘신뢰’의 부재에 있다. 정부가 아무리 돈을 풀고 대출을 장려해도, 가계가 미래에 대한 확신을 갖지 못하면 그 돈은 소비로 흐르지 않고 은행 계좌에 쌓일 뿐이다. 경제학에서 말하는 **‘유동성 함정(Liquidity Trap)’**과 유사한 상황이다.
또한, 중국 정부는 서구 국가들처럼 국민에게 직접 현금을 지원하는 대규모 재정 부양책을 꺼리는 경향이 있다. 이는 ‘복지주의는 나태를 낳는다’는 공산당의 전통적인 통치 철학과, 부채가 심각한 지방 정부에 더 큰 재정 부담을 지울 수 없다는 현실적 고민이 맞물려 있기 때문이다. 결국, 소비 부진의 원인은 ‘수요’ 측면의 심리 위축에 있는데, 정부의 정책은 여전히 ‘공급’ 측면의 인프라 투자에 머무는 미스매치가 발생하고 있는 것이다.
제4부: 결론 및 제언
중국의 소비 절벽은 ‘성장에 대한 믿음’이 사라진 시대의 필연적 귀결이다. 이는 중국 경제가 투자와 수출이라는 두 바퀴만으로는 더 이상 달릴 수 없는 임계점에 도달했음을 의미한다. 닫힌 소비자의 지갑을 다시 열기 위해서는 금리를 낮추고 보조금을 주는 단기 처방을 넘어, 사회안전망을 확충하고, 공정한 분배 시스템을 만들며, 예측 가능한 정책으로 시장의 신뢰를 회복하는 근본적인 수술이 필요하다.
중국 소비자의 침묵은 단순히 중국만의 문제가 아니다. ‘세계의 시장’ 중국이 수요를 창출하지 못하면, 독일의 자동차 공장도, 프랑스의 와이너리도, 한국의 반도체 기업도 함께 위기에 처할 수밖에 없다. 시진핑 지도부가 이 거대한 ‘수요의 실종’ 사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는 21세기 세계 경제의 향방을 결정할 가장 중요한 변수가 될 것이다. 14억 인구의 기나긴 침묵은 이미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