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5-10-16(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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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블랙핑크, 해외 투어 성황리 개최
    〔오늘일보=김준연 기자〕 블랙핑크(BLACKPINK)가 본격적인 월드투어를 시작해 그 출발점인 북미 첫 공연을 성공적으로 마쳤다. 걸그룹 블랙핑크가 이달 25∼26(현지시간)일 미국 댈러스 아메리칸 에어라인 아레나에서 월드투어 북미 첫 공연을 성황리에 열었다고 소속사 YG엔터테인먼트가 29일 밝혔다. 블랙핑크는 '하우 유 라이크 댓'(How You Like That), '프리티 새비지'(Pretty Savage), '휘파람', '핑크 베놈'(Pink Venom) 등 히트곡을 불렀다. 10월은 댈러스에 이어 29~30일 휴스턴, 11월부터는 2일~3일 애틀랜타, 6~7일 해밀턴, 10일~11일 시카고, 14일~15일 뉴어크, 19일~20일 LA 등으로 발걸음을 옮겨 북미에서만 7개 도시 14회 공연을 펼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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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10-29

실시간 엔터테인 기사

  • 빅브라더는 죽지 않았다, 조지 오웰의 '1984'가 던지는 섬뜩한 경고
    1949년, 제2차 세계대전의 포화가 채 가시지 않은 시대에 출간된 한 편의 소설이 미래 사회에 대한 가장 어둡고 통찰력 있는 예언서로 자리매김했다. 조지 오웰의 '1984'는 단순한 디스토피아 소설을 넘어, 전체주의의 작동 원리와 인간 정신의 말살 과정을 집요하게 파고든 위대한 문학적 성취다. 그가 그려낸 1984년은 이미 과거가 되었지만, '빅브라더', '사상경찰', '이중사고'와 같은 소설 속 개념들은 21세기 디지털 감시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여전히, 아니 오히려 더욱 섬뜩한 현실성을 띤다. 1. 진실을 꿈꾼 한 남자의 처절한 몰락 '1984'의 무대는 전 세계가 오세아니아, 유라시아, 이스트아시아라는 3개의 초거대 국가로 재편된 1984년의 런던이다. 주인공 윈스턴 스미스는 오세아니아를 지배하는 '당(The Party)'의 하급 당원으로, 진리부(Ministry of Truth) 기록국에서 과거의 신문 기사나 문서를 현재 당의 방침에 맞게 수정·조작하는 일을 한다. 1) 통제된 세계와 내면의 반란 오세아니아는 당의 최고 지도자인 '빅브라더(Big Brother)'가 모든 것을 지켜보는 절대적인 감시 사회다. 거리와 가정에는 양방향 통신이 가능한 '텔레스크린(Telescreen)'이 설치되어 시민들의 모든 말과 행동을 24시간 감시하며, 사상범죄를 색출하는 '사상경찰(Thought Police)'이 암약한다. 당은 과거를 지배하는 자가 미래를 지배하고, 현재를 지배하는 자가 과거를 지배한다는 슬로건 아래 역사를 끊임없이 날조한다. 언어 또한 '신어(Newspeak)'라는 새로운 언어로 대체하여, 반역적인 사상을 표현할 단어 자체를 소멸시키려 한다. 이 질식할 듯한 통제 속에서 윈스턴은 희미하게 남은 과거의 기억과 현실의 모순에 회의를 품는다. 그는 금지된 행위인 '일기 쓰기'를 통해 자신의 생각과 의심을 기록하며 위태로운 내면의 반란을 시작한다. 그는 당의 고위 간부로 보이는 '오브라이언(O'Brien)'에게서 자신과 같은 의심을 품고 있을지 모른다는 막연한 동질감을 느끼고, 당돌한 젊은 여성 '줄리아(Julia)'와 마주치면서 그의 삶은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간다. 2) 금지된 사랑과 짧은 해방 어느 날, 줄리아는 윈스턴에게 몰래 "당신을 사랑해요"라고 적힌 쪽지를 건넨다. 당은 성욕을 오직 출산을 위한 의무로만 규정하고 개인적인 쾌락과 사랑을 철저히 통제하기에, 이들의 만남은 그 자체로 체제에 대한 반역 행위다. 윈스턴과 줄리아는 사상경찰의 눈을 피해 런던 외곽의 숲이나 무산계급(Proles)이 사는 지역의 한 낡은 방에서 비밀스러운 만남을 이어간다. 그들에게 사랑은 단순한 육체적 쾌락을 넘어, 당이 통제할 수 없는 유일한 인간성의 영역이자 정치적 저항 행위였다. 특히 줄리아는 당의 이념에는 무관심하지만, 규칙을 어기고 개인적인 자유를 누리는 것을 즐기는 인물로, 이념적 반역을 꿈꾸는 윈스턴과는 다른 방식으로 체제에 저항한다. 이 짧고 위험한 밀애의 시간 동안 윈스턴은 잠시나마 해방감과 인간적인 유대를 맛본다. 3) 거짓 희망과 잔혹한 함정 저항에 대한 갈망이 커진 윈스턴은 마침내 오브라이언에게 접근한다. 오브라이언은 자신이 당에 저항하는 비밀 조직 '형제단(The Brotherhood)'의 일원이라며 그들을 안심시킨 뒤, 조직의 강령이 담긴 '그 책(The Book)'을 건네준다. 윈스턴은 책을 읽으며 당의 지배 구조와 이데올로기(영사주의, 영원한 전쟁의 본질, 이중사고 등)의 실체를 파악하고 자신의 생각이 틀리지 않았음을 확인한다. 하지만 이것은 모두 정교하게 설계된 함정이었다. 윈스턴과 줄리아가 유일한 안식처로 여겼던 낡은 방의 그림 뒤에는 텔레스크린이 숨겨져 있었다. 그들은 현장에서 체포되고, 윈스턴은 그토록 동경했던 오브라이언이 사실은 사상경찰의 핵심 간부이자 자신을 오랫동안 감시하고 유인해 온 장본인임을 깨닫게 된다. 4) 파괴되는 인간성, 그리고 '101호실' 체포된 윈스턴은 애정부(Ministry of Love)로 끌려가 혹독한 고문을 당한다. 고문의 총책임자는 다름 아닌 오브라이언이다. 고문의 목적은 자백이나 처벌이 아니다. 그것은 윈스턴의 저항 의지를 꺾고, 그의 생각을 완전히 개조하여 당이 원하는 방식으로 생각하게 만드는 데 있다. 오브라이언은 윈스턴에게 "2+2=5가 될 수도 있다"고 말하며, 당이 진리라고 말하는 것이 곧 진리이며, 객관적인 현실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강요한다. 육체적 고통과 심리적 압박 속에서 윈스턴의 저항은 서서히 무너진다. 하지만 그의 마음 깊은 곳에는 줄리아에 대한 사랑이 마지막 보루로 남아 있었다. 당은 그의 마지막 인간성마저 파괴하기 위해 그를 '101호실'로 보낸다. 101호실은 개인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을 이용해 공포의 한계점을 시험하는 곳이다. 쥐를 병적으로 무서워하는 윈스턴의 얼굴에 굶주린 쥐들이 든 철창이 씌워지자, 그는 이성을 잃고 절규한다. "나한테 하지 마! 줄리아한테 해!" 이 한마디는 그의 내면에 남은 마지막 인간성의 완전한 소멸을 의미했다. 그는 자신의 고통을 피하기 위해 사랑하는 연인을 제물로 바친 것이다. 석방된 윈스턴은 과거의 모든 기억과 감정이 거세된 채, 오직 빅브라더에 대한 사랑과 순응만이 남은 텅 빈 껍데기가 된다. 어느 날 카페에서 우연히 마주친 줄리아 역시 그와 마찬가지로 모든 것을 잃고 서로를 배신했음을 무감각하게 확인한다. 소설은 텔레스크린에서 흘러나오는 전쟁 승리 소식을 들으며 윈스턴이 "그는 빅브라더를 사랑했다"는 문장으로 끝을 맺는다. 그의 투쟁은 완벽한 패배로 끝났고, 체제는 한 개인의 정신을 완전히 정복했다. 2. '1984'는 무엇을 말하는가? 1) 전체주의와 절대 권력의 속성 '1984'는 전체주의 체제가 어떻게 개인의 삶을 완벽하게 통제하고 파괴하는지를 해부한다. 당은 물리적인 통제를 넘어 역사, 언어, 생각, 심지어 사랑이라는 가장 내밀한 감정까지 지배하려 한다. 오웰은 권력의 본질이 목적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권력 그 자체가 목적임을 오브라이언의 입을 통해 명확히 밝힌다. 당은 인류를 고문하고 굴복시키면서 영원히 권력을 유지하는 그림을 그리고 있으며, 이는 권력의 비인간적이고 자기 증식적인 속성을 통렬하게 고발한다. 2) 감시 사회와 프라이버시의 종말 '빅브라더가 당신을 지켜보고 있다(Big Brother is watching you)'는 소설 속 문구는 현대 사회의 감시 문제를 상징하는 아이콘이 되었다. 소설 속 텔레스크린은 오늘날의 CCTV, 인터넷 검열, 개인정보 수집, 안면 인식 기술 등을 놀랍도록 정확하게 예견한다. 오웰은 외부의 감시가 내면화될 때, 즉 개인이 스스로를 끊임없이 검열하게 될 때 진정한 자유는 소멸한다고 경고한다. 프라이버시의 상실은 단순히 사생활이 노출되는 문제를 넘어, 자유로운 사고와 개성의 형성을 원천적으로 봉쇄하는 기제로 작동한다. 3) 언어와 사고의 통제 신어(Newspeak)와 이중사고(Doublethink) 오웰이 창조한 가장 독창적인 개념 중 하나는 '신어'와 '이중사고'다. 신어는 어휘를 극단적으로 축소하여 사상의 폭을 좁히고, 최종적으로는 '사상범죄' 자체를 불가능하게 만드는 것을 목표로 하는 언어다. '자유'라는 단어는 남아있지만, '정치적 자유'나 '개인의 자유'의 의미는 사라지고 '이 개는 벼룩으로부터 자유롭다'는 식의 한정된 의미로만 사용된다. 이중사고는 한 사람의 마음속에 서로 모순되는 두 가지 신념을 동시에 받아들이고 둘 다 사실이라고 믿는 정신 상태를 의미한다. "전쟁은 평화, 자유는 예속, 무지는 힘"이라는 당의 슬로건이 대표적이다. 이는 진실과 거짓의 경계를 허물고, 체제의 모순을 비판적으로 사고할 능력을 마비시키는 강력한 심리 통제 수단이다. 오늘날 '가짜뉴스'와 '탈진실' 현상이 만연한 시대에, 이중사고의 개념은 더욱 섬뜩한 현실성을 갖는다. 3. 왜 지금 다시 오웰인가? 조지 오웰의 '1984'가 출간된 지 70년이 훌쩍 넘었지만, 그 영향력은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다. 오히려 인공지능, 빅데이터, 소셜미디어가 지배하는 21세기에 그의 경고는 더욱 절실하게 다가온다. 오늘날 각국 정부와 거대 테크 기업들은 막대한 양의 개인 데이터를 수집하고 분석하며, 이는 보이지 않는 새로운 '빅브라더'의 출현을 예고한다. 소셜미디어의 알고리즘은 사용자가 보고 듣는 정보를 필터링하여 '확증 편향'을 강화하고, 정치적 양극화를 심화시킨다. '가짜뉴스'는 여론을 조작하고 객관적 진실의 가치를 위협하며, 사회적 불신을 팽배하게 만든다. '1984'는 우리에게 끊임없이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편리함과 안전을 위해 얼마만큼의 자유와 프라이버시를 내어줄 수 있는가? 진실이 권력에 의해 왜곡될 때, 우리는 어떻게 저항할 것인가?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기 위한 마지막 보루는 무엇인가? 소설의 결말은 지독히도 비극적이지만, 오웰이 이 작품을 쓴 목적은 절망적인 예언을 하기 위함이 아니었다. 그는 이러한 끔찍한 미래가 현실이 되지 않도록 '경고'하기 위해 펜을 들었다. '1984'를 읽는다는 것은, 단순히 과거의 명작을 감상하는 것을 넘어, 비판적 사고의 중요성을 되새기고, 우리가 발 딛고 있는 현실을 냉철하게 성찰하며, 자유와 진실의 가치를 지키기 위해 깨어있는 시민으로 살아가야 할 책무를 확인하는 행위다. 빅브라더는 여전히 우리를 지켜보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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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0-06
  • 퐁네프의 연인들, 꺼져가는 시선 속에서 영원을 꿈꾼 사랑
    프랑스 영화사를 넘어 세계 영화사에 길이 남을 문제작이자 걸작. 레오스 카락스 감독의 '퐁네프의 연인들'은 한 편의 영화가 완성되기까지 겪을 수 있는 모든 고난과 영광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신화와도 같은 작품이다. 1989년 프랑스 혁명 200주년의 불꽃이 파리의 밤하늘을 수놓던 여름, 보수 공사로 폐쇄된 퐁네프 다리 위에서 모든 것을 잃은 두 남녀가 만난다. 시력을 잃어가는 화가 미셸(줄리엣 비노쉬)과 거리의 곡예사 알렉스(드니 라방). 세상의 가장 밑바닥, 버려진 공간에서 시작된 그들의 사랑은 때로는 격렬한 춤처럼, 때로는 서로를 파괴하는 불꽃처럼 타오른다. 단순한 멜로드라마의 범주를 아득히 뛰어넘어, 사랑이라는 감정이 인간을 어디까지 이끌고 갈 수 있는지에 대한 지독하고도 황홀한 영상 시(詩)를 심층적으로 분석한다. 1. 영화사를 뒤흔든 '문제작', 그 신화의 시작 '퐁네프의 연인들'을 이야기하기에 앞서, 이 영화의 전설적인 제작 과정을 먼저 언급해야 한다. 당초 3주간의 실제 퐁네프 다리 촬영 허가를 받았던 제작팀은 배우 드니 라방의 부상으로 촬영이 중단되는 악재를 맞는다. 이후 파리 시의 허가가 더 이상 나지 않자, 레오스 카락스 감독은 파리 외곽에 센 강과 퐁네프 다리, 그리고 주변 건물까지 완벽하게 재현한 거대한 세트장을 짓는 무모한 결정을 내린다. 이로 인해 제작비는 눈덩이처럼 불어났고, 수많은 제작자가 파산하고 교체되는 등 영화는 완성 자체가 불투명한 상황에 놓였다. 3년이 넘는 촬영 기간, 천문학적인 제작비. '퐁네프의 연인들'은 프랑스 영화계의 가장 뜨거운 감자이자 애물단지로 전락했다. 그러나 온갖 역경 끝에 완성된 영화는 그 광적인 제작 과정이 고스란히 스크린에 투영된 듯, 전에 없던 폭발적인 에너지와 처절한 아름다움을 선보이며 전 세계를 놀라게 했다. 영화의 내용은 물론, 그 탄생 과정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서사인 셈이다. 2. 가장 어두운 곳에서 만난 두 영혼, 알렉스와 미셸 영화의 주된 무대인 '퐁네프(Pont-Neuf)'는 '새로운 다리'라는 이름과 달리 파리에서 가장 오래된 다리다. 영화 속 퐁네프는 보수 공사로 인해 일반인의 출입이 통제된, 도시 속의 고립된 섬과 같은 공간이다. 이곳은 화려한 파리의 이면에 가려진, 사회로부터 밀려난 부랑자들의 안식처이자 그들만의 왕국이다. 이곳의 물리적 어둠과 고립은 주인공들이 처한 내면의 절망과 완벽한 공명을 이룬다. 한쪽 눈을 안대로 가린 채 거리를 떠도는 미셸은 유부남 화가와의 사랑에 실패하고, 원인 모를 병으로 점차 세상을 볼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해가는 화가다. 그림을 그리는 이에게 시력의 상실은 곧 사형선고나 다름없다. 모든 희망을 잃은 그녀는 스스로 가장 낮은 곳으로 걸어 들어가 퐁네프에 잠든다. 그곳에서 그녀는 다리의 '주인' 행세를 하는 알렉스를 만난다. 알렉스는 서커스단에서 불을 뿜는 재주를 부리다 사고로 연인을 잃고, 마취제 없이는 잠들지 못하는 불안정한 영혼의 소유자다. 그는 세상과 소통하는 법을 잊은 채 오직 거리에서의 생존 기술만으로 살아가는 인물이다. 가진 것 없고 기댈 곳 없는 두 사람은 서로의 상처를 본능적으로 알아보고, 위태로운 동거를 시작한다. 그들의 관계는 달콤한 속삭임이 아닌, 투박한 몸짓과 거친 욕설, 그리고 서로의 상처를 핥아주는 동물적인 교감으로 이루어진다. 3. 감독 레오스 카락스, 광기를 스크린에 새기다 '퐁네프의 연인들'은 감독 레오스 카락스의 영화 세계를 이해하지 않고서는 온전히 받아들이기 어렵다. '나쁜 피', '소년, 소녀를 만나다' 등으로 이어지는 그의 초기작들에서부터 그는 언제나 소외된 청춘의 격정적인 사랑과 고독을 탐구해왔다. 특히 그의 영화적 분신(Alter ego)이라 할 수 있는 배우 드니 라방의 동물적인 몸짓과 에너지는 카락스 영화의 핵심적인 상징이다. 카락스는 현실에 발을 딛고 있으면서도 끊임없이 현실을 뛰어넘는 초현실적인 이미지를 창조해낸다. 그는 인물의 내면을 대사가 아닌 이미지와 음악, 그리고 몸짓으로 폭발시킨다. '퐁네프의 연인들'에서 이러한 그의 연출 스타일은 정점에 달한다. 사랑의 환희와 광기를 표현하기 위해 그는 실제 파리의 밤하늘을 불꽃으로 뒤덮고, 센 강 위에서 배우들이 수상스키를 타게 하는 장관을 연출한다. 이는 단순한 볼거리를 넘어, 인물의 감정이 현실의 물리적 한계를 초월하는 순간을 포착하려는 감독의 집념이 빚어낸 결과물이다. 4. 사랑이라는 이름의 광기, 그 눈부신 이미지의 향연 이 영화를 불멸의 작품으로 만든 것은 단연코 스크린을 가득 채우는 압도적인 이미지들이다. 알렉스의 사랑은 순수하지만 이기적이고, 열정적이지만 파괴적이다. 그는 미셸의 눈을 멀게 하는 병을 고쳐주고 싶은 마음에 한밤중 파리 시내를 불태우려 하고, 그녀를 찾는 가족의 포스터를 발견하자 미셸이 자신을 떠날까 두려워 포스터를 붙이는 인부를 살해하기까지 한다. 이 맹목적인 사랑의 광기는 영화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장면 중 하나로 꼽히는 '센 강 불꽃놀이' 시퀀스에서 절정을 맞는다. 프랑스 혁명 200주년을 기념하는 불꽃이 밤하늘을 가득 채우자, 훔친 경찰 보트를 탄 알렉스는 미셸을 이끌고 센 강 위에서 광란의 수상스키를 즐긴다. 스트라빈스키의 음악과 함께 펼쳐지는 이 장면은 절망적인 현실을 잠시 잊고 순간의 환희에 몸을 내던진 두 연인의 감정을 스크린 밖으로까지 터뜨려 놓는다. 불과 물, 빛과 어둠, 환희와 죽음의 이미지가 충돌하며 만들어내는 이 황홀경은, 사랑이 주는 해방과 구원의 순간을 완벽하게 포착한 영화적 기적이라 할 수 있다. 또한,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에 맞춰 다리 위에서 격렬하게 춤을 추는 장면은, 그 어떤 화려한 무대보다도 순수하고 절실한 생의 에너지를 느끼게 한다. 5. '본다'는 것의 실존적 의미와 예술가의 운명 영화는 '본다'는 행위에 대해 끊임없이 철학적인 질문을 던진다. 미셸은 화가로서의 생명과도 같은 시력을 잃어가지만, 역설적으로 알렉스를 통해 세상의 이면과 사랑의 본질을 '보게' 된다. 문명화된 세상의 질서와 아름다움이 아닌, 거리의 소음, 추위, 배고픔, 그리고 그 속에서 피어나는 날것 그대로의 생명력을 온몸으로 체험하며 새로운 '시각'을 얻는 것이다. 반면, 모든 것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볼 수 있는 알렉스는 오직 미셸만을 바라보는 맹목적인 사랑에 빠져 세상을 외면한다. 그에게 미셸은 자신의 공허한 존재를 확인시켜주는 유일한 거울이자 세상 그 자체다. 그렇기에 그는 미셸이 세상을 다시 '보게' 되는 것을, 즉 자신을 떠나 원래의 세계로 돌아가는 것을 죽음처럼 두려워한다. '본다'는 것은 이 영화에서 단순한 감각을 넘어, 관계의 지속과 소멸, 그리고 존재의 의미와 직결되는 실존적 행위가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은 계속된다 결국 수술로 시력을 되찾은 미셸은 알렉스를 떠나 화가로서의 삶으로 돌아가지만, 3년 뒤 크리스마스이브에 운명처럼 퐁네프에서 재회한다. 모든 오해와 상처를 뒤로하고 서로의 사랑을 확인한 두 사람은 차가운 센 강으로 함께 몸을 던진다. 동반자살처럼 보였던 이 행위는 그러나, 과거의 자신들을 모두 강물에 장사 지내고 새롭게 태어나려는 정화의 의식에 가깝다. 마침내 모래를 싣고 바다로 향하는 작은 바지선에 의해 구조된 그들. "네가 나를 사랑한다면, '하늘이 하얗다'고 말해줘"라는 미셸의 말에 알렉스가 "하늘은 하얗다"고 답하며 영화는 끝을 맺는다. 현실의 하늘색이 무엇이든, '우리의 사랑'이라는 진실 앞에서는 세상의 모든 명제가 새롭게 정의될 수 있음을 선언하는 것이다. '퐁네프의 연인들'은 결코 편안한 로맨스 영화가 아니다. 거칠고 불편하며, 때로는 주인공들의 기행에 고개를 젓게 만든다. 하지만 영화는 상식과 이성의 틀을 벗어던진 사랑의 순수한 에너지가 얼마나 눈부시고 파괴적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얼마나 절실한 구원이 될 수 있는지를 온몸으로 증명한다. 세월이 흘러 다시 만난 이 영화는 여전히 우리에게 묻는다. 당신은 이들처럼 모든 것을 내던지고 사랑해 본 적이 있는가. 당신의 삶에 이들처럼 찬란한 불꽃놀이의 순간이 있었는가. 그 묵직한 질문 앞에 우리는 잠시 말을 잃고, 파리의 낡은 다리 위에서 영원을 꿈꿨던 두 연인의 모습을 오래도록 기억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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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9-29
  • '병신과 머저리', 상처의 시대에 던져진 지식인의 자기 구원
    병신은 전쟁의 상처를 안고 죄책감으로 인해 일상적 삶을 포기하려는 정신적 상처를 가진 형을, 머저리는 자신의 아픔이나 환부의 원인조차 알지 못하는 동생을 의미 혁명의 이상을 실현하지 못하고 관념의 세계에만 머무는 지식인(병신), 그리고 그 무력감을 냉소와 현실 안주로 덮어버리려는 지식인(머저리) 이청준의 소설 '병신과 머저리'를 읽는 것은, 아물지 않은 상처를 스스로 헤집어 그 고름을 짜내는 고통스러운 과정을 목격하는 것과 같다. 1966년 발표된 이 소설은 4.19 혁명이라는 역사적 격동 이후, 이상은 좌절되고 현실은 방향을 잃었던 시대의 지식인들이 겪었던 깊은 정신적 트라우마와 무력감을 형과 동생이라는 두 인물의 대립을 통해 치밀하게 파고든다. 형은 전쟁의 상처를 예술(소설)로 승화시켜 극복하려는 '창작하는 지식인'을, 동생은 그 상처를 외면하고 냉소와 폭력으로 현실을 돌파하려는 '행동하는 지식인'을 상징한다. 두 형제의 갈등은 단순한 가족의 불화를 넘어, 60년대 한국 사회가 겪었던 가치관의 혼란과 지식인의 고뇌를 담은 거대한 알레고리다. '병신과 머저리'는 상처를 마주하는 두 가지 방식을 통해 인간 구원의 가능성은 어디에 있는지를 묻는, 한국 문학사의 기념비적인 작품이다. 한 지붕 아래 두 개의 상처, 형과 동생 1부: 소설가 형, 끝나지 않은 전쟁의 고통 소설의 서술자인 '나'는 화가이자 소설가다. 그는 자신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한국 전쟁 당시 낙오병이었던 한 소녀와의 비극적 만남을 소재로 소설을 쓰고 있다. 소설 속에서 '나'는 부상당한 소녀를 간호하지만, 결국 그녀를 죽음의 공포 속에 버려두고 혼자 탈출한다. 이 죄책감과 무력감의 기억은 수십 년이 지난 후에도 그를 괴롭히는 거대한 트라우마다. 그는 이 고통을 소설이라는 예술 행위를 통해 객관화하고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과거의 자신으로부터 벗어나려 발버둥 친다. 2부: 외과의사 동생, 상처를 부정하는 자 그의 동생은 촉망받는 젊은 외과의사다. 그는 형의 소설을 "궤변과 자기변명"이라며 경멸하고, "인간의 아픔 같은 건 수술로 도려내면 그만"이라고 말하는 극단적인 현실주의자다. 그는 겉으로는 냉철하고 성공한 지식인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그의 내면 역시 깊은 상처로 뒤틀려 있다. 그는 얼마 전 자신의 실수로 어린 소녀 환자를 수술대 위에서 죽게 한 충격적인 경험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는 형처럼 자신의 상처를 성찰하려 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상처를 부정하고, 세상에 대한 냉소와 폭력적인 행동으로 고통을 잊으려 한다. 그는 술에 취해 난동을 부리고, 간호사 순이를 학대하며, 형의 소설 쓰기를 "병신 같은 짓"이라며 조롱한다. 3부: 갈등의 폭발, 두 개의 총성 형제의 갈등은 형이 쓰는 소설의 결말을 두고 폭발한다. 형은 소설 속 주인공이 결국 소녀를 구원하지 못하고 고통 속에 남겨지는 결말을 구상한다. 이는 자신의 죄의식을 정직하게 마주하려는 시도다. 하지만 동생은 이 결말을 참지 못한다. 그는 형의 소설이 자신의 실패(수술 실패)를 암시한다고 느끼며 격분한다. 그는 형에게서 총을 빼앗아 들고 소설 속 주인공이 그래야 했던 것처럼, "나약한 관념론자"인 형을 단죄하려 한다. 그는 형의 다리에 총을 쏘아 상처를 입힌다. "형은 병신이야. 우린 이제 둘 다 똑같은 병신이란 말이다!" 동생의 총성은, 자신의 상처를 인정하지 않으려 했던 그가 결국 파국을 통해 형과 같은 '상처 입은 존재'임을 스스로 고백하는 역설적인 행위다. 4부: 상처의 봉합, 그리고 새로운 시작 총을 맞고 쓰러진 형은 오히려 어떤 해방감을 느낀다. 동생이 쏜 총은 현실의 상처였지만, 그로 인해 그는 비로소 과거의 관념적인 상처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계기를 맞는다. 그는 생각한다. 이제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소설을 다시 시작할 수 있겠다고. 그는 동생이 낸 상처를 딛고 일어나, 무력하게 소녀를 죽게 내버려 뒀던 소설의 결말을, 주인공이 소녀의 죽음을 끌어안고 함께 죽는 결말로 고쳐 쓴다. 이는 더 이상 과거의 방관자가 아니라, 고통과 함께하겠다는 적극적인 의지의 표현이다. 동생이 남긴 상처를 통해 형은 비로소 자기 구원의 길을 찾은 것이다. 예술, 상처, 그리고 구원 형의 '소설 쓰기' vs 동생의 '수술하기' 이 소설의 핵심적인 대립 구도는 형의 '소설'과 동생의 '수술'이다. 소설: 눈에 보이지 않는 내면의 상처를 언어로 표현하고 성찰함으로써 그 의미를 찾으려는 '정신적' 행위다. 고통스럽고 더디지만, 상처의 근원을 파고들어 진정한 치유에 이르려는 시도다. 수술: 눈에 보이는 육체의 상처를 칼로 도려내어 제거하는 '물리적' 행위다. 빠르고 효율적이지만, 상처의 근본적인 원인이나 그로 인한 정신적 고통은 외면한다. 작가는 동생의 방식이 보여주는 한계를 통해, 진정한 인간 구원은 상처를 단순히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끌어안고 의미를 부여하는 고통스러운 과정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메시지를 던진다. '병신'과 '머저리'는 누구인가 제목의 '병신'과 '머저리'는 일차적으로는 형과 동생을 가리키지만, 더 넓게는 4.19 혁명의 좌절 이후 무력감에 빠진 당대 지식인 사회 전체를 향한 자기 비판적 명명이다. 혁명의 이상을 실현하지 못하고 관념의 세계에만 머무는 지식인(병신), 그리고 그 무력감을 냉소와 현실 안주로 덮어버리려는 지식인(머저리). 이청준은 이 두 인물을 통해 시대의 아픔을 외면하지 않고 문학을 통해 증언하고 치유하려는 작가로서의 고뇌와 사명감을 드러낸다. 1960년대의 고뇌, 2025년의 우리에게 말을 걸다 '병신과 머저리'는 4.19라는 구체적인 역사적 맥락 속에서 탄생한 소설이다. 그러나 이 작품이 던지는 질문은 시대를 넘어 보편적인 울림을 갖는다. 우리는 모두 살아가면서 크고 작은 상처를 입는다. 어떤 이는 그 상처를 곱씹고 성찰하며 성장의 발판으로 삼지만, 어떤 이는 상처를 외면하고 부정하며 자기 파괴의 길로 들어선다. 이 소설은 우리에게 묻는다. 당신은 당신의 상처를 어떻게 마주하고 있는가. 당신은 형처럼 고통스럽더라도 글을 쓰는 사람인가, 아니면 동생처럼 총을 쏘는 사람인가. 개인의 트라우마 극복 문제부터, 세월호 참사나 이태원 참사와 같은 사회적 비극을 기억하고 애도하는 방식에 이르기까지, '병신과 머저리'가 보여주는 상처에 대한 성찰은 여전히 우리에게 깊은 생각할 거리를 던져준다. 인간 내면의 심리를 파고드는 지적인 소설, 그리고 시대의 아픔을 끌어안은 문학의 역할을 고민해보고 싶은 독자에게 이 묵직한 고전을 강력히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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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9-06
  •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교실 속 독재자를 통해 본 권력의 민낯
    정의로운 저항은 왜 굴복하는가, 그리고 괴물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이문열의 소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을 읽는 것은, 돋보기로 우리 사회의 가장 불편한 지점을 들여다보는 것과 같다. 1987년 발표된 이 중편소설은 초등학교 5학년 교실이라는 지극히 작은 공간을 배경으로 하지만, 그 안에는 한 시대의 폭압적인 권력 구조와 그에 기생하고 굴종하는 대중의 심리가 놀랍도록 정교하게 압축되어 있다. 서울에서 온 자유주의자 한병태와, 그 교실을 완벽하게 장악한 독재자 엄석대. 두 소년의 대립과 갈등, 그리고 파국을 통해, 작가는 정의는 왜 패배하고 불의는 어떻게 유지되는지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을 던진다. 발표된 지 40년 가까이 되었지만, 학교 폭력 문제부터 직장 내 권력관계, 나아가 우리 사회의 정치적 현실에 이르기까지 그 어떤 텍스트보다 현실적인 알레고리(allegory, 우의)로 읽히는 작품.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은 시대를 넘어 인간과 권력의 본질을 성찰하게 하는 우리 시대의 필독 고전이다. 한 소년의 전학, 그리고 시작된 싸움 1부: 이방인, 질서에 도전하다 이야기는 자유분방한 서울의 초등학교에서 잘나가던 학생 한병태가, 아버지의 좌천으로 시골의 작은 학교로 전학을 오면서 시작된다. 그가 마주한 5학년 2반은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곳이었다. 급장인 엄석대가 담임선생님마저 묵인하는 절대 권력을 휘두르며 반 전체를 지배하고 있었다. 시험을 볼 때는 석대의 지시 아래 전교 1등부터 꼴찌까지 성적이 조작되고, 아이들은 자발적으로 석대에게 도시락 반찬을 상납하며, 그의 폭력과 감시 아래 누구 하나 저항하지 못하는 '석대의 왕국'이었다. 서울의 합리적인 질서에 익숙했던 한병태는 이 부조리한 시스템에 정면으로 맞서기로 결심한다. 그는 석대의 권위에 도전하고, 아이들에게 저항을 호소하며, 담임선생님에게 부정을 고발하는 등 홀로 외로운 싸움을 시작한다. 2부: 고독한 저항, 그리고 패배 그러나 한병태의 저항은 무력했다. 반 아이들은 그를 돕기는커녕, 기존 질서를 위협하는 '이단아'로 취급하며 따돌리고 괴롭힌다. 그들은 석대가 주는 '질서'와 '안정'에 이미 길들여져 있었기 때문이다. 담임선생님 역시 "뛰어난 한 명만 잘 관리하면 반 전체가 편하다"는 논리로 석대의 독재를 방관할 뿐이다. 결국 한병태는 고립과 폭력을 견디지 못하고 무너진다. 그는 석대에게 굴복하고, 그의 시스템에 편입되는 길을 택한다. 석대가 주는 보호와 특권 속에서 그는 점차 저항의 의지를 잃고, 불의한 권력에 순응하는 편안함에 안주하게 된다. 그는 더 이상 이방인이 아닌, '석대의 왕국'의 충실한 일원이 되어간다. 3부: 새로운 질서, 영웅의 몰락 그렇게 1년이 흐르고 6학년이 되었을 때, 새로운 담임선생님이 부임하면서 석대의 왕국은 예기치 못한 균열을 맞는다. 젊고 이상주의적인 새 담임은 석대의 부정행위를 용납하지 않고, 아이들을 개별적인 인격체로 대하며 민주적인 질서를 가르친다. 절대 권력의 비호가 사라지자, 어제까지 석대에게 충성을 바치던 아이들은 하루아침에 돌변한다. 그들은 석대의 모든 비리를 앞다투어 폭로하고, 그를 조롱하며 집단으로 린치를 가한다. 그렇게 견고했던 '우리들의 영웅' 엄석대는 한순간에 '일그러진 영웅'으로 전락하여 교실에서 도망치듯 사라진다. 4부: 어른이 된 후, 남겨진 부끄러움 세월이 흘러 어른이 된 한병태는 우연히 수갑을 찬 채 경찰에 연행되는 초라한 엄석대의 모습을 목격한다. 그 순간, 그는 승리감이나 안도감 대신 깊은 부끄러움과 죄책감에 휩싸인다. 그는 깨닫는다. 진정한 악은 엄석대라는 한 명의 독재자가 아니라, 그의 독재를 가능하게 하고 그에 기생하며 안주했던 자기 자신을 포함한 다수의 '방관자들'이었음을. 그리고 그는 자문한다. 과연 우리 사회는 엄석대의 시대로부터 얼마나 자유로워졌는가. 교실, 독재자, 그리고 방관자들 작은 공화국, '교실'이라는 알레고리 이 소설의 가장 큰 문학적 성취는 '교실'이라는 공간을 통해 1970~80년대 한국의 권위주의적 독재 시대를 완벽하게 은유했다는 점이다. ①절대 권력자(엄석대), ②그 권력을 묵인하고 이용하는 기득권(담임선생님), ③권력에 저항하다 좌절하는 지식인(한병태), ④그리고 권력에 순응하며 기생하는 다수의 민중(반 아이들)의 구도는 당시 우리 사회의 축소판이었다. '영웅'인가, '괴물'인가 - 엄석대 엄석대는 단순히 힘센 골목대장이 아니다. 그는 폭력과 공포뿐만 아니라, '성적 관리'와 '질서 유지'라는 당근을 통해 아이들의 자발적인 복종을 이끌어내는 교활한 통치자다. 그는 반 아이들에게 예측 가능한 질서를 제공하고, 그 대가로 절대적인 권력을 누린다. 작가는 엄석대를 통해 절대 권력이 어떻게 개인을 타락시키고 시스템을 왜곡하는지를 보여준다. 저항과 굴종 사이 - 한병태 한병태는 이 소설을 읽는 독자들이 가장 깊이 감정을 이입하게 되는 인물이다. 그는 처음에는 정의감에 불타는 저항자였지만, 결국 현실의 벽 앞에서 좌절하고 권력의 달콤함에 길들여지는 나약한 지식인의 모습을 대변한다. 그의 변절 과정은 독자들에게 "나라면 과연 달랐을까?"라는 불편한 질문을 던지며, 정의를 외치는 것보다 불의에 침묵하는 것이 얼마나 쉬운지를 통찰하게 한다. 일그러진 영웅은 지금도 우리 곁에 있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은 박정희, 전두환으로 이어지는 군부독재 시절에 대한 명백한 정치적 알레고리다. 엄석대의 갑작스러운 몰락은 4·19 혁명이나 1987년 6월 항쟁과 같은, 외부의 충격이나 시대의 변화로 독재 정권이 무너지는 역사를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이 소설의 생명력은 과거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오늘날 우리가 마주하는 수많은 사회 현상 속에서 우리는 여전히 엄석대와 한병태, 그리고 다수의 방관자들을 발견한다. 학교: 교실 내의 집단 따돌림과 학교 폭력 문제에서 힘의 논리와 방관의 심리는 그대로 재현된다. 직장: 부당한 상사의 지시에 침묵하고 순응하며 자신의 안위를 지키려는 모습은 오늘날 직장인들의 생존 방식과 닮아있다. 사회: 비합리적인 여론 몰이나 '좌표 찍기'와 같은 온라인상의 집단 광기 속에서, 개인의 소신을 지키기보다 다수의 의견에 휩쓸리는 모습은 또 다른 형태의 집단적 굴종이다. 결국 이문열이 던지는 메시지는 명확하다. 진정한 영웅은 한 명의 카리스마 있는 지도자가 아니라, 부당한 권력에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진 평범한 개인들의 연대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저항과 연대에 실패했을 때 남는 것은, 평생을 따라다니는 '부끄러움'뿐이다. 당신은 저항자인가, 방관자인가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은 책을 덮은 후에도 독자에게 무거운 질문을 남기는 소설이다. 나는 내 삶의 공간에서 엄석대의 폭력을 방관하고 있지는 않은가? 혹은 한병태처럼 저항을 포기하고 안락함에 길들여져 있지는 않은가? 우리 사회의 보이지 않는 권력 구조와 그 속에서 살아가는 개인의 내면을 깊이 있게 성찰하고 싶은 독자라면, 반드시 이 소설을 읽어보길 권한다. 그것은 한 편의 잘 짜인 문학 작품을 넘어, 우리 자신을 비추는 날카로운 거울이 되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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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9-06
  •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절망의 땅에서 희망을 쏘다
    한국 현대문학사를 이야기할 때, 조세희의 연작소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이하 '난쏘공')을 빼놓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것은 단순히 한 시대의 베스트셀러가 아니라, 1970년대 압축 성장의 그늘 아래 신음하던 도시 빈민과 노동자들의 목소리를 담은 시대의 양심이자 문학적 증언이기 때문이다. '난장이'로 상징되는 사회적 약자의 시선으로 그려낸 이 세계는, 동화처럼 아름답고 서정적인 문장과 현실의 지독한 비루함이 충돌하며 독자의 가슴을 서늘하게 파고든다. 철거 계고장 한 장에 무너져 내리는 삶의 터전, 굴뚝과 기계에 종속된 노동의 현실, 그리고 그 절망의 끝에서 아버지가 쏘아 올린 '작은 공' 하나. '난쏘공'은 산업화라는 거대한 톱니바퀴에 갈려 나간 한 가족의 비극을 통해, 인간의 존엄성이란 무엇이며, 우리가 발 딛고 선 이 땅이 과연 모두에게 공평한지에 대한 날카로운 질문을 던지는 영원한 고전이다. 낙원구 행복동, 그곳엔 낙원도 행복도 없었다 1부: 철거 계고장, 날아든 사형선고 소설은 '낙원구 행복동'이라는 지독히 반어적인 이름의 무허가 판자촌을 배경으로 시작된다. 그곳에는 신체적 장애(난장이)로 인해 평생을 사회적 약자로 살아온 아버지와, 그런 남편을 대신해 굳세게 가정을 이끌어 온 어머니, 그리고 장남 영수, 차남 영호, 막내딸 영희, 다섯 식구가 살고 있다. 어느 날, 그들의 집에 붉은 글씨의 '철거 계고장'이 날아든다. 한 달 안에 집을 비우지 않으면 강제 철거하겠다는, 사형선고와도 같은 통보다. 정부의 '도시 정화 사업'이라는 미명 아래, 그들의 삶의 뿌리는 송두리째 뽑힐 위기에 처한다. 보상으로 아파트 입주권이 나오지만, 판잣집 주민들에게는 입주할 돈도, 프리미엄을 노리는 투기꾼들로부터 입주권을 지켜낼 힘도 없다. 결국 그들은 평생의 보금자리를 헐값에 넘기고 거리로 나앉아야 할 운명에 처한다. 2부: 흩어지는 가족, 짓밟히는 꿈 아버지와 어머니는 절망하지만, 장남 영수는 공장에 다니며 노동조합 운동에 희망을 걸어보려 한다. 차남 영호는 세상에 대한 분노로 엇나가고, 막내딸 영희는 가족을 위해 어떻게든 입주권을 되찾으려 발버둥 친다. 아버지는 달을 향해 '작은 공'을 쏘아 올리며 무너져 내리는 현실 속에서도 작은 희망을 놓지 않으려 한다. 그러나 그가 사는 땅은 그의 꿈을 비웃듯 더욱 가혹해지기만 한다. 영수는 부당한 노동 현실에 맞서 싸우다 결국 공장에서 쫓겨나고, 그의 동료는 사측의 음모에 휘말려 살인자가 된다. 세상은 그들의 편이 아니었다. 3부: 영희의 희생, 되찾은 종이 한 장 가족의 비극이 절정에 달하는 것은 막내딸 영희의 희생을 통해서다. 그녀는 가족의 입주권을 헐값에 사들인 부동산 투기꾼을 따라 그의 집으로 들어간다. 순결을 잃고 그의 곁에 머물며 기회를 엿보던 영희는, 마침내 금고에서 입주권을 훔쳐 나오는 데 성공한다. 모든 것을 잃어버린 그녀의 손에 남은 것은, 가족의 꿈이 담긴 차가운 종이 한 장뿐이었다. 4부: 굴뚝 위에서 사라진 아버지 그러나 영희가 지옥 같은 시간을 보내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 가족은 이미 뿔뿔이 흩어진 뒤였다. 그리고 그녀는 동네 사람들을 통해 아버지의 비극적인 최후를 전해 듣는다. 아버지가 인근 공장의 높은 벽돌 굴뚝 꼭대기에서 종이비행기를 날리다, 결국 그 안에서 숨진 채 발견되었다는 것이다. 그는 '작은공' 대신 자기 자신을 쏘아 올렸지만, 그가 도달한 곳은 하늘이 아닌 차가운 굴뚝 바닥이었다. 아버지가 쏘아 올린 작은 공은, 땅에 발붙이고 살 수 없었던 시대의 약자들이 꾸었던 덧없는 꿈의 상징으로 남는다. 난장이, 공, 그리고 굴뚝 '난장이'와 '거인'의 세계 소설에서 '난장이'는 단순히 키가 작은 사람이 아니다. 그는 자본과 권력이라는 '거인'들로 가득 찬 세상에서 제대로 된 몫을 보장받지 못하는 모든 사회적 약자를 상징한다. 그의 가족은 열심히 일해도 가난에서 벗어날 수 없고, 법과 제도는 언제나 가진 자들의 편이다. 작가는 이 '난장이'와 '거인'의 비대칭적인 구도를 통해 1970년대 한국 사회의 계급 모순을 극명하게 고발한다. 희망과 절망의 상징, '작은 공' 아버지가 쏘아 올리는 '작은 공'은 이 소설의 핵심적인 상징이다. 그것은 ①빼앗긴 인간의 존엄성을 되찾고 싶은 소망, ②이 부조리한 땅을 벗어나 달나라와 같은 이상향에 도달하고 싶은 꿈, ③그리고 결코 현실에 가닿을 수 없는 약자의 처절한 희망 그 자체다. 공은 하늘로 솟구치지만 이내 땅으로 떨어지듯, 그들의 꿈 역시 번번이 좌절된다. 산업화의 무덤, '벽돌 굴뚝' 아버지가 마지막으로 오른 '벽돌 굴뚝'은 근대화와 산업화의 상징물이다. 그러나 난장이에게 그곳은 하늘로 가는 통로가 아닌, 자신의 목숨을 앗아간 거대한 무덤이었다. 이는 산업 발전의 성과가 노동자들에게 돌아가지 않고, 오히려 그들을 희생시키는 비정한 현실을 은유한다. 아름다운 문장, 잔혹한 현실 '난쏘공'이 시대를 넘어 위대한 작품으로 평가받는 이유는, 이토록 참혹한 현실을 지극히 아름답고 시적인 문장으로 그려냈기 때문이다. 작가는 직접적인 분노나 비판의 목소리를 높이는 대신, 마치 동화를 쓰듯 간결하고 절제된 언어로 인물들의 슬픔을 담아낸다. 이러한 서술 방식은 독자들이 감정적인 동요를 넘어, 비극의 본질을 더욱 냉정하고 깊이 있게 성찰하도록 이끈다. 또한, 소설은 난장이 가족 구성원 각자의 시선으로 서술되는 12편의 단편이 묶인 연작(連作) 형식이다. 이 파편화된 이야기들은 퍼즐 조각처럼 맞춰지며 하나의 거대한 비극을 완성한다. 이러한 독특한 구조는 획일적인 시선으로는 담아낼 수 없는 당대 사회의 복잡한 모순과 각 인물의 내면을 입체적으로 보여주는 탁월한 문학적 장치다. 2025년, 우리는 다시 '난쏘공'을 읽는다 '난쏘공'이 출간된 지 5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다. 판자촌은 화려한 아파트 단지로 변했고, 대한민국은 세계 10위권의 경제 대국이 되었다. 그러나 과연 우리는 난장이의 세계로부터 완전히 벗어났다고 말할 수 있을까? 천정부지로 치솟은 집값 앞에 내 집 마련을 포기하는 청년들, 재개발이라는 이름 아래 삶의 터전에서 밀려나는 사람들(젠트리피케이션), 여전히 열악한 환경에서 싸우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모습 속에서 우리는 21세기의 '난장이'들을 발견한다. 그들 역시 저마다의 '작은 공'을 하늘에 쏘아 올리며 더 나은 삶을 꿈꾸고 있다. '난쏘공'은 단순한 과거의 기록이 아니다. 그것은 자본의 논리가 인간의 존엄성을 위협하는 모든 시대, 모든 사회에 유효한 현재 진행형의 이야기다. 이 책을 읽는 것은, 우리 사회의 가장 낮은 곳에 있는 이웃의 고통에 눈감지 않겠다는 다짐이자, '모두가 함께 잘사는 세상'이라는 작은 공을 다시 한번 쏘아 올리는 행위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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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9-06
  • '무진기행', 안개와 허무 속에서 발견한 현대인의 자화상
    김승옥이 그려낸 1960년대 '감수성의 혁명'... 일상으로부터의 도피, 그 끝에서 마주한 것은 구원이 아닌 부끄러움이었다. 1960년대 한국 문학은 김승옥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의 소설 '무진기행'을 읽는 것은, 짙은 안갯속을 홀로 걸어 들어가는 듯한 경험이다. 그의 문장은 이전 세대의 작가들이 짊어졌던 전쟁의 상흔이나 이념의 무게 대신, 전후(戰後) 근대화의 과정에서 개인이 느끼는 미묘한 허무와 소외, 속물적 욕망과 자기혐오를 감각적인 언어로 포착해냈다. '무진(霧津)', 즉 안개 나루. 이곳은 지도에 없는 허구의 공간이자, 답답한 현실로부터 벗어나고 싶은 모든 현대인이 마음속에 품고 있는 심리적 도피처다. 주인공 윤희중의 짧은 귀향길을 따라가는 '무진기행'은, 일상이라는 감옥으로부터의 탈출이 얼마나 허망하며, 그 끝에 남는 것이 결국 '부끄러움'뿐임을 통찰한 우리 시대의 영원한 문제작이다. 안개 속으로의 며칠, 한 남자의 여정 1부: 성공이라는 감옥, 서울을 떠나다 소설은 제약회사 전무인 주인공 '나'(윤희중)가 아내의 권유로 잠시 휴식을 취하기 위해 고향인 '무진'으로 떠나는 장면에서 시작된다. 그는 장인의 재력과 아내의 적극적인 처세 덕에 젊은 나이에 상류층으로 편입된 인물이다. 그러나 그의 내면은 성공의 안락함 대신, 모든 것이 자신의 의지가 아닌 타의에 의해 결정되었다는 무력감과 공허함으로 가득 차 있다. 그에게 서울은 '성공'이라는 이름의 감옥이며, 무진으로의 여정은 그 감옥으로부터의 일시적인 탈출, 즉 '도피'다. 2부: 안개의 도시, 무진에서의 만남 그가 도착한 무진은 명물인 '안개'에 휩싸여 있다. 앞이 보이지 않는 짙은 안개는 모든 것을 모호하게 만들고 현실 감각을 마비시킨다. 그 속에서 그는 과거의 인물들을 만난다. 세무서장이 되어 속물로 변해버린 동창, 그리고 한때 연모했던 후배의 자살 소식은 그에게 무진 역시 더 이상 순수의 공간이 아님을 깨닫게 한다. 그러던 중 그는 모교에서 음악 교사로 일하는 '하인숙'을 만난다. 그녀는 술자리에서 꽤 유명한 노래인 '목포의 눈물'을 부르며 서울로 떠나고 싶다는 욕망을 숨기지 않는다. '나'는 그녀의 속물적인 모습과 동시에 어딘가 자신과 닮은 공허함을 발견하고 하룻밤의 사랑을 나눈다. 무진의 안개 속에서, 두 사람은 서로에게서 현실 도피의 동반자를 발견한 것이다. '나'는 충동적으로 그녀에게 함께 서울로 가자고 제안한다. 3부: 도피의 끝, 아내의 편지 하인숙과 함께 무진을 떠나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을 것이라는 짧은 환상은, 서울의 아내로부터 온 한 통의 전보로 산산조각 난다. "早歸. 急報(조귀. 급보)", 즉 "빨리 돌아오라. 급한 소식이다"라는 단 네 글자. 이 전보는 그에게 무진에서의 일탈이 끝났음을 알리는 '명령'이자, 그가 속한 현실 세계로의 '소환장'이다. 그는 한순간의 망설임 끝에 하인숙을 무진에 남겨두고 서울행 버스에 오르기로 결심한다. 그의 도피는 그렇게 허무하게 끝난다. 4부: 무진을 떠나며, 그리고 남겨진 것 서울로 돌아가는 버스 안에서, 그는 하인숙에게 남기고 온 편지를 떠올린다.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당신을 떠난다는, 지독히 위선적이고 변명에 가득 찬 문장이다. 그는 그 편지가 결국 하인숙이 아닌,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었음을 깨닫는다. 그리고 소설의 마지막, 그는 이렇게 독백한다. "나는 심한 부끄러움을 느꼈다." 그의 짧은 여정 끝에 남은 것은 사랑의 성취나 자유의 획득이 아닌, 자신의 비겁함과 속물근성을 확인한 '부끄러움'뿐이었다. 안개, 편지, 그리고 부끄러움 '안개'의 다층적 상징 '무진기행'에서 '안개'는 단순한 기상 현상이 아니다. 그것은 ①주인공의 혼란스러운 내면, ②현실과 비현실의 모호한 경계, ③일상의 책임과 의무로부터 잠시 숨을 수 있게 해주는 익명성의 공간, ④그리고 모든 것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허무 그 자체를 상징한다. 사람들은 무진의 안개 속에서 잠시 위안을 얻지만, 안개가 걷히면 결국 냉정한 현실과 마주해야 한다. 일상으로의 복귀 명령, '편지(전보)' 아내의 전보는 소설의 흐름을 가르는 결정적 장치다. 그것은 주인공을 지배하는 현실 세계의 권력(아내와 장인으로 대표되는)을 상징하며, 개인의 낭만적 일탈이 얼마나 쉽게 현실의 질서 앞에 좌절되는지를 보여준다. 이 짧은 전보 앞에서 그의 모든 결심과 환상은 힘없이 무너진다. 현대인의 실존적 감각, '부끄러움' 소설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부끄러움'이라는 감정은 '무진기행'의 핵심 주제다. 이 부끄러움은 하인숙을 버린 것에 대한 단순한 미안함이 아니다. 그것은 ①현실의 안락함을 포기하지 못하는 자신의 속물근성에 대한 부끄러움, ②진정한 사랑이나 순수한 열정 대신 위선적인 변명으로 자신을 포장한 비겁함에 대한 부끄러움, ③그리고 결국 일상이라는 감옥으로 제 발로 걸어 들어가는 무기력한 자신에 대한 실존적 자기혐오다. 1960년대의 이방인, 윤희중과 우리 '무진기행'의 주인공 윤희중은 영웅도, 악인도 아니다. 그는 전쟁의 폐허 위에서 근대화의 길목에 서 있던 1960년대 한국 사회의 지식인들이 겪었던 정신적 방황을 대변한다. 그는 가난했던 과거와 단절하고 싶어 하지만, 속물적인 성공 속에서 끊임없이 공허함을 느끼는 이방인이다. 그러나 그의 모습은 단지 1960년대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답답한 현실에서 벗어나 '어딘가 다른 곳'을 꿈꾸지만, 결국 책임과 안정이라는 현실의 굴레를 벗어던지지 못하는 그의 고뇌는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모습과 겹쳐진다. 우리는 누구나 마음속에 자신만의 '무진'을 품고 산다. 그곳으로의 짧은 도피를 꿈꾸지만, 결국 현실로 돌아와 어제의 삶을 반복한다. 김승옥은 바로 그 지점, 이상을 꿈꾸지만 현실에 안주하고 마는 현대인의 보편적인 비겁함과 그로 인한 '부끄러움'의 감정을 놀랍도록 세련되고 감각적인 문체로 포착해냈다. 당신은 당신의 '무진'을 떠났는가 '무진기행'은 발표된 지 6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우리에게 서늘한 질문을 던진다. 일상에 안주하는 대가로 우리는 무엇을 잃어버렸는가. 당신의 '무진'은 어디이며, 그곳으로부터의 도피는 당신에게 무엇을 남겼는가. 자신의 삶이 공허하게 느껴질 때, 일상이라는 궤도를 벗어나고 싶은 충동을 느껴본 적 있는 독자라면, 이 안개 자욱한 도시로의 짧은 여행을 떠나보길 권한다. 그 끝에서 당신은 아마도, 지독한 부끄러움과 함께 자신의 맨 얼굴을 마주하게 될 것이다. 그것이 바로 이 위대한 소설이 우리에게 주는 불편하고도 귀한 선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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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9-06
  • '아Q정전', 죽지 않고 우리 곁을 떠도는 망령의 이름
    한 번도 이겨본 적 없는 자의 '승리' 기록 현실의 문제를 직시하지 않고, 자기합리화를 통해 실패를 정신적으로 포장하려는 태도를 비판 의학을 공부하다 "병든 육체를 고치는 것보다, 병든 정신을 고치는 것이 더 시급하다"며 붓을 든 작가. 중국 현대문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루쉰(魯迅). 그의 대표작 '아Q정전(阿Q正傳)'은 1921년 발표된 이래, 지난 100년간 중국인의 자화상이자, 때로는 동아시아인 모두의 부끄러운 내면을 비추는 거울로 기능해왔다. 주인공 '아Q'는 성(姓)도, 이름도, 심지어 고향조차 불분명한 최하층 날품팔이꾼이다. 하지만 그는 중국 역사상 그 어떤 황제나 영웅보다도 유명한 인물이 되었다. 그가 창시한 '정신승리법(精神勝利法)'이라는 기이한 자기 위안 방식 때문이다. 이 소설은 아Q라는 한 인물의 우스꽝스럽고도 비참한 일생을 통해, 봉건 왕조가 무너지고 혁명의 열기가 들끓던 시대의 한복판에서조차 변하지 않았던 중국 민중의 노예근성과 자기기만을 통렬하게 고발한다. 1부: 웨이주앙의 천덕꾸러기, 아Q 아Q는 웨이주앙(未庄)이라는 가상의 농촌 마을에 사는 막노동꾼이다. 그는 집도 절도 없이 사당에 얹혀살며, 마을의 온갖 궂은일을 도맡아 하지만 누구에게도 존중받지 못한다. 동네 건달들에게 얻어맞는 것은 그의 일상이다. 하지만 아Q에게는 자신만의 비범한 대처법이 있다. 바로 '정신승리법'이다. 건달에게 실컷 두들겨 맞고 난 뒤, 그는 침을 뱉으며 속으로 생각한다. '나는 아들놈에게 맞은 셈이다. 요즘 세상은 정말 막돼먹었어...' 이렇게 생각하면, 맞은 것은 그이지만 정신적으로는 그가 승리자가 된다. 도박판에서 돈을 잃으면 자신의 뺨을 때리며, '때린 놈'이 된 자신을 '맞은 놈'보다 우월하다고 여긴다. 그는 현실의 모든 패배와 굴욕을 이 기상천외한 정신승리법을 통해 심리적 승리로 둔갑시키며 살아간다. 2부: 추락하는 자의 헛된 욕망 자신보다 약한 자에게는 한없이 강하고, 강한 자에게는 비굴한 아Q의 삶은 연이은 굴욕으로 점철된다. 그는 마을의 젊은 비구니를 희롱하며 자신의 힘을 과시하려다 오히려 웃음거리가 되고, 마을의 지주인 자오 나리의 집 하녀에게 수작을 걸다가 '불륜을 저지르려 했다'는 누명을 쓰고 마을에서 쫓겨나다시피 한다. 갈 곳이 없어진 그는 성안으로 들어가 도둑질을 배워서 돌아온다. 갑자기 돈과 옷이 생긴 그를 보고, 마을 사람들은 그를 두려워하며 잠시나마 대우해준다. 생애 처음으로 받아보는 존중에 아Q는 의기양양해지지만, 그의 허세는 오래가지 못한다. 3부: 혁명, 그리고 너무나 허무한 죽음 1911년, 청나라를 무너뜨린 신해혁명의 바람이 웨이주앙 마을까지 불어온다. 아Q에게 '혁명'은 어려운 사상이 아니었다. 그저 '내 맘에 드는 것은 다 내 것'이 되는, 모든 것을 뒤엎을 수 있는 신나는 기회일 뿐이었다. 그는 자신이 혁명당원이 된 것처럼 행세하며, 평소 자신을 무시했던 자오 나리의 집을 약탈할 꿈에 부푼다. 하지만 혁명은 아Q의 편이 아니었다. 마을의 지주와 유학자들은 하루아침에 감투를 바꿔 쓰고 '혁명 정부'를 자처하며, 기존의 기득권을 그대로 유지한다. 그들은 아Q 같은 부랑자는 혁명에 참여할 자격이 없다며 그를 철저히 배제한다. 혁명의 주인이 되고 싶었던 아Q는, 혁명 이후에도 여전히 이방인이자 구경꾼일 뿐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자오 나리의 집이 진짜 도적떼에게 습격당한다. 혁명당원이 되겠다며 설쳤던 아Q는 완벽한 희생양이 된다. 그는 졸지에 강도죄의 주범으로 몰려 관아로 끌려간다. 글을 모르는 그는 자신이 무엇에 서명하는지도 모른 채, 붓을 잡고 동그라미를 그리라는 말에 열심히 원을 그린다. 수박씨처럼 삐뚤어진 원을 보며, '내 인생에 오점을 남겼다'고 한탄하는 그의 모습은 비극적이면서도 우스꽝스럽다. 결국 그는 총살형을 선고받는다. 형장으로 끌려가는 수레 위에서, 그는 자신을 구경하는 마을 사람들의 무심한 눈빛을 본다. 그의 머릿속에 마지막으로 스친 생각은 '총살은 참수보다 구경거리가 못 될 텐데'라는 실없는 걱정뿐이었다. 그는 그렇게 자신이 왜 죽어야 하는지도 모른 채, 한 시대의 희생양이 되어 허무하게 죽는다. 마을 사람들은 싱거운 구경거리였다며 불평하며 흩어진다. 루쉰이 던진 세 가지 날카로운 질문 하나, '정신승리법'은 누구의 것인가? 아Q의 정신승리법은 단순히 한 개인의 어리석은 성격이 아니다. 루쉰은 이를 통해 아편전쟁 이후 서구 열강에 연이어 패배하면서도, '중화사상'이라는 허울 속에 갇혀 자신들의 패배를 직시하지 못했던 당시 중국 전체의 정신 상태를 비판했다. 현실의 패배를 인정하고 변화를 모색하는 대신, 과거의 영광에 기대어 정신적인 자위를 하는 것으로는 결코 미래로 나아갈 수 없다는 통렬한 경고였다. 둘째, 혁명은 무엇을 바꾸었는가? '아Q정전'은 신해혁명에 대한 가장 날카로운 문학적 비판이다. 루쉰이 보기에, 신해혁명은 황제의 성을 바꾸고 깃발의 색깔을 바꿨을 뿐, 민중의 삶과 의식을 근본적으로 바꾸지 못한 '미완의 혁명'이었다. 지배층은 이름만 바꿔 기득권을 유지했고, 아Q와 같은 민중은 혁명에서 철저히 소외된 채 구경꾼으로 남거나 희생양이 될 뿐이었다. 셋째, 구경꾼은 죄가 없는가? 아Q를 괴롭히고, 그의 허세에 잠시 빌붙었다가, 그의 죽음을 무심하게 구경하는 웨이주앙의 마을 사람들은 이 소설의 또 다른 주인공이다. 루쉰이 의학을 포기한 결정적인 이유도, 처형당하는 중국인을 동포들이 무감각하게 구경하는 모습을 담은 슬라이드를 보고 나서였다. 그는 병든 개인을 치료하는 것보다, 이처럼 우매하고 냉담한 '군중'의 영혼을 깨우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믿었다. 아Q의 비극은 그 혼자만의 것이 아니라, 그것을 방관하고 즐긴 군중 모두의 비극인 셈이다. 100년이 지나도 살아있는 '아Q 정신' '아Q 정신'이라는 말은 오늘날에도 한국과 중국에서 공공연히 쓰인다. 현실의 문제를 직시하지 않고, 자기합리화를 통해 실패를 정신적으로 포장하려는 태도를 비판할 때 사용되는 관용구가 된 것이다. 100년 전 소설 속 인물이 이토록 생생한 현재성을 갖는다는 사실은 놀랍다. 이는 한국 사회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우리는 때로 문제의 본질을 해결하기보다는, "우리가 원래 더 우월하다"는 식의 정신적 자부심에 기대어 현실의 어려움을 외면하려 하지는 않는가? '아Q정전'은 민족주의나 국가주의가 자기기만으로 흐를 때 얼마나 위험할 수 있는지를 경고하는, 우리 모두를 향한 예방주사와도 같다. 우리 안의 '아Q'를 돌아보게 하는 거울 '아Q정전'은 유쾌한 소설이 아니다. 오히려 읽는 내내 불편하고, 때로는 자신의 초라한 모습을 들키는 듯한 부끄러움을 느끼게 한다. 하지만 위대한 고전은 우리에게 편안함이 아닌, 성찰의 계기를 제공한다. 루쉰은 100년 전 아Q라는 인물을 통해 낡은 중국에 사망 선고를 내렸다. 아Q는 총살당했지만, 현실을 외면하고 허상 속으로 도피하려는 그의 '정신'은 여전히 우리 주변을 유령처럼 떠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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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8-31
  • '호우시절', 좋은 비처럼 스며드는 잊었던 첫사랑의 기억
    사랑에도 '알맞은 때'가 있다 당신의 '호우시절'은 언제였나요? 사랑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어쩌면, 가장 필요한 순간에 가장 알맞게 내려주는 '좋은 비(好雨)'와 같은 것이 아니겠냐고. 당나라 시인 두보(杜甫)의 유명한 시 '춘야희우(春夜喜雨)'의 첫 구절인 '好雨知時節(좋은 비는 시절을 안다)'에서 따왔다. 두보의 시라는 문학적 감성과 청두라는 역사적 공간을 통해 두 남녀의 인연과 감정을 섬세하게 그려낸, 한 폭의 수묵화 같은 수작이다. 영화 속에서 두 주인공이 두보초당(두보가 머물던 초가집을 복원한 기념관)에서 재회하고, 비 내리는 청두의 서정적인 풍경이 우리를 설레게 한다. 한국의 정우성 배우와 중국의 고원원 배우가 주연을 맡아, 중국 쓰촨성의 성도인 청두(成都)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잔잔한 멜로드라마 '8월의 크리스마스', '봄날은 간다' 등을 통해 만남과 헤어짐, 그리고 그 사이에 존재하는 미세한 감정의 결을 스크린에 아로새겨 온 허진호 감독. 그가 중국의 대문호 두보의 시를 품고, 배우 정우성, 고원원과 함께 만들어낸 '호우시절'은 한 편의 서정시와 같은 영화다. 이 영화에는 극적인 사건이나 폭발하는 갈등이 없다. 대신, 잊었던 감정이 서서히 되살아나는 과정의 어색한 설렘과, 상대의 아픔을 조심스럽게 보듬는 어른스러운 배려가 짙은 안개와 비의 도시, 청두의 풍경 속에 고스란히 녹아있다. 영화는 묻는다. 사랑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어쩌면, 가장 필요한 순간에 가장 알맞게 내려주는 '좋은 비(好雨)'와 같은 것이 아니겠냐고. 시절을 알아챈 좋은 비처럼, 다시 만난 우리 ... 1부: 낯선 도시 익숙한 얼굴 건축가인 박동하(정우성 분)는 2008년 쓰촨성 대지진 피해 복구 지원을 위한 출장으로 중국 청두를 찾는다. 프로젝트의 책임자로서 바쁜 일정을 보내던 중, 그는 잠시 시간을 내어 청두의 명소인 '두보초당'을 찾는다. 바로 그곳에서, 그는 믿을 수 없는 사람과 마주친다. 미국 유학 시절, 가장 친한 친구였지만 미처 마음을 전하지 못했던 메이(고원원 분). 그녀는 이곳 두보초당에서 유창한 한국어로 관광객들을 안내하는 가이드로 일하고 있었다. 몇 년 만의 재회는 반가움과 동시에 어색함이 감돈다. 그들은 저녁 식사를 약속하고, 청두의 명물인 매운 사천요리를 먹으며 조심스럽게 서로의 안부를 묻는다. 동하는 아직 미혼이고, 메이는 "결혼했다"고 짧게 답한다. 2부: 어긋났던 기억의 조각들 메이는 동하를 위해 기꺼이 청두의 가이드가 되어준다. 그들은 함께 자전거를 타고 시내를 누비고, 찻집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며 유학 시절의 추억을 꺼내놓는다. 그 과정에서 과거 두 사람의 어긋난 기억이 드러난다. 동하는 당시 메이에게 여자친구가 있다고 오해했고, 메이는 동하가 자신에게 고백해주기만을 기다렸었다. 사랑했지만, 용기가 없었고 때가 맞지 않아 스쳐 지나가야만 했던 풋사랑의 기억이 두 사람 사이에 아련하게 되살아난다. 동하는 메이를 향한 자신의 감정이 단순한 추억이 아니라, 여전히 현재진행형임을 깨닫는다. 하지만 '결혼한' 그녀에게 더 이상 다가설 수 없음을 알기에, 그는 친구라는 이름 뒤에 자신의 마음을 숨긴다. 3부: 그녀의 비밀 그리고 그의 위로와 함께 시간을 보낼수록, 동하는 메이가 어딘가 깊은 슬픔에 잠겨 있음을 느낀다. 어느 날 저녁, 동하는 메이의 집을 방문하게 되고, 그곳에서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 된다. 메이의 남편은 2년 전, 쓰촨성 대지진으로 세상을 떠났다는 것. 그녀는 남편을 잃은 깊은 슬픔에서 아직 헤어나오지 못한 채, 과거의 시간에 갇혀 살고 있었다. "결혼했다"는 그녀의 말은, 새로운 인연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은 자신을 지키기 위한 방어막이었던 것이다. 모든 사실을 알게 된 동하는 혼란에 빠진다. 그녀가 유부녀가 아니라는 안도감도 잠시, 그가 감당해야 할 것은 남편의 빈자리가 아니라, 그녀의 마음속에 자리 잡은 거대한 슬픔의 무게임을 깨닫는다. 그는 섣불리 다가서거나 그녀를 위로하려 하지 않는다. 대신, 묵묵히 그녀의 곁을 지키며 그녀가 스스로 슬픔을 마주하고 걸어 나올 수 있도록 기다려준다. 4부: 좋은 비는 시절을 안다 (好雨知時節) 동하의 출장 기간이 끝나고 한국으로 돌아가야 할 날이 다가온다. 떠나기 전날 밤, 두 사람은 함께 술을 마신다. 동하는 메이에게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다"는 진심을 전하고, 메이는 처음으로 동하의 어깨에 기대어 참았던 눈물을 흘린다. 다음 날 아침, 공항으로 향하던 동하는 차를 돌린다. 그는 메이에게 돌아가 "조금 더 있다 가겠다"고 말한다. 그의 갑작스러운 결정에 메이는 놀라지만, 이내 옅은 미소를 짓는다. 영화는 두 사람이 다시 만나는 장면을 마지막으로, 어떤 확실한 결말도 보여주지 않은 채 막을 내린다. 마치 두보의 시처럼, 좋은 비는 만물을 소리 없이 적시지만, 그 비가 어떤 꽃을 피워낼지는 오직 시간만이 알 수 있다는 여운을 남기면서. 동하의 귀환은 메이의 얼어붙었던 마음에 내리는 '호우(好雨)', 즉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단비였던 것이다. 허진호표 멜로드라마의 정수 허진호 감독은 인물들의 감정을 대사가 아닌, 분위기와 눈빛, 그리고 작은 몸짓으로 쌓아 올리는 데 탁월한 능력을 지닌 연출가다. '호우시절' 역시 마찬가지다. 두 주인공은 "사랑한다"거나 "그립다"는 말을 거의 하지 않는다. 대신, 함께 자전거를 타는 모습, 말없이 밥을 먹는 모습, 비를 피해 처마 밑에 함께 서 있는 모습 등을 통해 그들의 감정적 교류를 섬세하게 보여준다. 이러한 절제된 연출은 관객들이 인물들의 감정선을 조용히 따라가며 더 깊이 몰입하게 만든다. 도시 '청두'가 주는 서정성 이 영화에서 '청두'는 단순한 배경이 아닌, 제3의 주인공이다. 늘 안개가 낀 듯 흐리고, 예고 없이 비가 내리는 청두의 날씨는 두 주인공의 내면 풍경과 완벽하게 조응한다. 짙은 녹음의 대나무 숲이 우거진 두보초당의 고즈넉한 분위기와, 시민들의 여유로운 일상이 엿보이는 찻집 등은 낯선 도시에서의 만남이 주는 설렘과 아련함을 배가시킨다. 영화는 청두라는 도시의 매력을 담아낸 가장 아름다운 여행 엽서이기도 하다. 두보의 시, 영화의 영혼이 되다 "좋은 비는 시절을 알아, 봄이 오면 내려주네(好雨知時節, 當春乃發生)." 영화의 제목이자 주제인 두보의 시 '춘야희우'는 '타이밍'의 중요성을 이야기한다. 유학 시절, 두 사람은 서로를 사랑했지만 그 시절은 '좋은 때'가 아니었다. 하지만 몇 년이 흘러, 남편의 죽음이라는 깊은 상처를 가진 메이에게 동하가 다시 나타난 지금이, 어쩌면 그녀의 상처를 치유하고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할 '알맞은 때'일지도 모른다. 영화는 두보의 시를 통해, 사랑이란 격정이 아니라 '시절인연(時節因緣)'임을 이야기한다. '호우시절'은 한국 감독이 중국의 도시와 문화를 얼마나 깊이 있고 존중하는 태도로 담아낼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가장 이상적인 한중 합작 영화의 사례다. 영화는 중국을 신비롭거나 이국적인 시선으로 대상화하지 않는다. 오히려 두보의 시와 쓰촨성 대지진이라는 역사적 상처를 자연스럽게 녹여내며, 보편적인 인간의 감정을 이야기하는 무대로 활용한다. 특히, 대지진 복구 지원을 위해 청두를 찾은 동하의 설정은 의미심장하다. 이는 국가적 재난 앞에서 서로를 돕는 연대의식을 상징하며, 두 주인공의 만남에 단순한 로맨스를 넘어선 '치유'와 '회복'의 의미를 부여한다. 정치적, 경제적 이해관계를 떠나, 문화적 공감대를 바탕으로 한 진정한 교류가 어떤 모습일 수 있는지를 이 영화는 조용히 증명한다. 당신의 '호우시절'은 언제였나요? '호우시절'은 화려하지 않지만 은은한 향기가 오래 남는 차(茶)와 같은 영화다. 성급한 결론 대신, 인물들의 감정이 익어가는 과정을 묵묵히 지켜보며 기다림의 미학을 보여준다. 영화를 보고 나면, 누구나 마음속에 간직한 풋풋했던 첫사랑의 기억과 아쉽게 스쳐 지나간 인연들을 떠올리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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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8-31
  • '나는 약신이 아니다', 돈 없는 게 죄가 되는 세상을 향한 통쾌한 외침
    "그가 유죄라는 건 압니다. 하지만 법이 꼭 정답은 아니지 않습니까?" 중국 대륙을 뒤흔든 실제 사건을 바탕으로, 상업 영화의 문법을 따르면서도 날카로운 사회적 메시지를 담아냈다. 2018년 여름, 중국 영화계는 '나는 약신이 아니다(我不是药神)'라는 영화 한 편으로 발칵 뒤집혔다. 이 영화는 단순히 박스오피스를 점령하는 데 그치지 않고, 중국 전역에 '의료 개혁'이라는 거대한 사회적 담론을 촉발시켰다. 영화가 상영되는 동안 관객들은 극장 안에서 함께 웃고 울었으며, 극장 밖에서는 웨이보 등 SNS를 통해 영화가 제기한 문제에 대해 열띤 토론을 벌였다. 급기야 리커창 총리가 직접 나서서 "영화가 지적한 의약품 가격 문제를 해결하라"고 지시하기에 이르렀다. 어떻게 영화 한 편이 이토록 거대한 파장을 일으킬 수 있었을까? '나는 약신이 아니다'는 실제 사건을 바탕으로, 돈 없고 힘없는 환자들의 절박한 생존 투쟁과, 그들을 돕기 위해 나선 한 소시민의 위대한 변화를 코미디와 드라마의 절묘한 결합으로 그려낸 기적 같은 영화다. 돈에 눈먼 밀수꾼, 환자들의 영웅이 되다 돈이 절실했던 한 남자 주인공 청융은 상하이에서 인도산 정력제를 파는, 별 볼 일 없는 중년 남성이다. 이혼한 아내는 아들을 데리고 이민을 가려 하고, 가게 월세는 밀려 있으며, 요양원에 계신 아버지는 수술비가 급하다. 한마디로 돈이 절실한 인생이다. 어느 날, 두꺼운 마스크를 쓴 한 남자가 그를 찾아온다. 만성 골수성 백혈병 환자인 뤼서우이다. 그는 스위스에서 수입하는 정품 치료제 '글리벡'이 한 달에 4만 위안(약 700만 원)에 달해, 자신과 같은 환자들은 약을 먹지 못하고 죽어가고 있다고 호소한다. 그는 청융에게 효과는 동일하지만 가격은 20분의 1에 불과한 인도산 복제약(제네릭)을 밀수해달라고 간청한다. 처음에는 감옥에 갈까 두려워 거절했던 청융. 하지만 아버지의 수술비를 마련할 길이 막막해지자, 결국 돈을 벌기 위해 위험한 제안을 받아들인다. 인도에서 복제약을 구해 온 청융은 환자들에게 약을 유통하기 위해 어설픈 팀을 꾸린다. 그를 찾아왔던 뤼서우이, 딸의 약값을 벌기 위해 폴댄서로 일하는 강인한 싱글맘 류쓰후이, 시골 출신의 순박하지만 힘센 청년 '황마오(노란 머리)', 그리고 영어를 할 줄 아는 류 목사까지. 각자의 절박한 사연을 가진 이들은 함께 약을 팔기 시작한다. 청융의 사업은 대성공을 거둔다. 그는 막대한 돈을 벌어 번듯한 사업가로 변신하고, 환자들은 값싼 약 덕분에 생명을 연장한다. 환자들은 청융을 '약의 신(药神)'이라 부르며 떠받들기 시작한다. 하지만 '짝퉁 약'을 유통하는 그의 행위는 명백한 불법이었다. 정품 약을 만드는 스위스 제약회사의 압력과 가짜 약 사기꾼까지 등장하면서 경찰의 수사망은 점점 좁혀온다. 겁이 난 청융은 마침 더 비싼 값에 합법적인 중국 총판권을 제안한 제약사 대표에게 유통권을 넘기고, 팀을 해체한 뒤 손을 털어버린다. 그는 환자들의 배신감 어린 눈빛을 외면한 채, 그동안 번 돈으로 섬유 공장을 차려 합법적인 사업가로 변신한다. 1년 뒤, 청융은 뤼서우이를 다시 만난다. 약값이 다시 오르자 그는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있었다. 결국 뤼서우이는 병세 악화와 생활고를 비관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그의 장례식장에서, 청융은 절규하는 환자들의 원망과 마주한다. 친구의 죽음에 큰 충격을 받은 청융은 병원을 찾아간다. 그곳에서 그는 약을 구하지 못해 죽어가는 환자들의 절망적인 모습을, 그리고 위독해진 류쓰후이의 어린 딸을 보며 깊은 죄책감에 휩싸인다. 그는 다시 인도로 날아간다. 그리고 예전보다 더 오른 가격에 약을 사 와, 자신이 샀던 가격 그대로 환자들에게 팔기 시작한다. 심지어 약값이 더 오르자, 자신의 섬유 공장 돈까지 쏟아부으며 손해를 보면서 약을 공급한다. 돈을 벌기 위해 밀수를 시작했던 이기적인 소시민이, 이제는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하며 환자들을 구하는 진정한 '약신'으로 거듭난 것이다. 하지만 그의 선행은 오래가지 못한다. 경찰의 추적이 계속되고, 그를 돕던 '황마오'는 청융을 탈출시키기 위해 차를 몰고 경찰을 유인하다가 교통사고로 비극적인 죽음을 맞는다. 결국 청융은 체포된다. 재판정에는 그가 구해낸 수백 명의 백혈병 환자들이 몰려와 그의 선처를 호소하는 탄원서를 제출한다. 그를 쫓던 형사마저 그의 편에 서서 변론한다. "그가 유죄라는 건 압니다. 하지만 법이 꼭 정답은 아니지 않습니까?" 청융은 징역형을 선고받고 교도소로 이송된다. 그가 탄 호송 버스가 도로를 지날 때, 길가에는 수많은 백혈병 환자들이 그를 배웅하기 위해 늘어서 있다. 그들은 모두 약속이라도 한 듯, 감염의 위험을 막아주던 마스크를 벗고, 자신들의 영웅에게 경의를 표하며 조용히 고개를 숙인다. 사회를 움직인 영화의 힘 코미디와 드라마의 절묘한 균형 '나는 약신이 아니다'의 가장 큰 미덕은 무거운 주제를 다루면서도 관객을 끌어들이는 대중적 재미를 놓치지 않았다는 점이다. 영화의 전반부는 어설픈 인물들이 모여 밀수를 하는 과정에서 벌어지는 소동을 그리며 케이퍼 무비(caper movie)의 유쾌함을 선사한다. 하지만 후반부로 갈수록 인물들의 비극적인 사연이 드러나면서, 영화는 관객의 눈물샘을 자극하는 최루성 드라마로 전환된다. 이 영리한 장르의 변주는 관객들이 영화의 사회적 메시지를 거부감 없이, 그리고 더욱 깊이 받아들이게 만든다. 이기적 소시민, 영웅이 되다 주인공 청융은 처음부터 정의로운 인물이 아니다. 오히려 돈을 밝히고 책임감도 없는, 지극히 속물적인 인물에 가깝다. 그렇기에 그의 변화는 더욱 설득력 있고 감동적으로 다가온다. 그는 위대한 이념 때문이 아니라, 바로 곁에서 고통받는 이웃의 죽음과 눈물을 목격하면서 조금씩 변해간다. 그의 영웅성은 평범한 사람의 마음속에 잠재된 '측은지심(惻隱之心)'이 행동으로 발현된 결과다. 영화, 현실의 벽을 넘다 이 영화의 가장 놀라운 지점은 스크린 밖 현실에 미친 영향력이다. 이 영화는 중국 사회에 "생존권과 특허권 중 무엇이 우선하는가?", "법은 가난한 사람들을 보호하고 있는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던졌다. 수억 명의 관객이 이 질문에 공감했고, 이는 거대한 사회적 여론으로 형성되었다. 결국 중국 정부는 영화 개봉 직후 항암제에 대한 관세를 철폐하고, 수십 종의 비싼 항암제를 의료보험 적용 대상에 포함시키는 등 신속한 정책 변화를 보여주었다. 예술이 현실을 바꾸는 기적을 실현한 것이다. 한중 양국의 '사회고발 영화' 계보 '나는 약신이 아니다'를 본 한국 관객이라면 자연스럽게 '변호인', '택시운전사', '1987'과 같은 영화들을 떠올릴 것이다. 평범했던 소시민이 시대적 사건을 겪으며 각성하고, 불의한 시스템에 저항하는 인물로 거듭나는 서사는 한국 영화의 성공 공식 중 하나이기도 하다. 과거 장이머우, 천카이거 등 '5세대 감독'들이 과거의 역사를 은유적으로 비판했던 것과 달리, '나는 약신이 아니다'는 동시대 중국 사회의 가장 민감한 문제를 정면으로 다룬다. 이는 중국 영화계에도 대중의 공감을 얻는 '사회고발 영화'가 중요한 장르로 자리 잡고 있음을 보여준다. 부조리한 현실을 바꾸고 싶어 하는 대중의 열망이 한국과 중국, 두 나라에서 각기 다른 소재를 통해 스크린 위에서 발현되고 있다는 점은 매우 흥미로운 현상이다. 재미와 감동, 그리고 세상을 바꾼 용기 '나는 약신이 아니다'는 잘 만든 상업 영화가 가질 수 있는 모든 미덕을 갖춘 작품이다. 관객을 웃고 울게 만드는 탄탄한 스토리, 생생하게 살아있는 캐릭터, 그리고 가슴을 뜨겁게 만드는 사회적 메시지까지 완벽하게 조화를 이룬다. 이 영화는 돈이 생명보다 우선시되는 비정한 자본주의의 현실 속에서, 평범한 한 사람이 시작한 선한 의지가 얼마나 큰 기적을 만들어낼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감동적인 증거다. 재미와 감동, 사회적 메시지를 모두 잡은 웰메이드 영화를 보고 싶은 분. 돈보다 생명이 중요하다는 당연한 진리를 다시 한번 확인하고 싶은 분. 그리고 영화 한 편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기적을 믿고 싶은 모든 분께 이 영화를 강력히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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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8-31
  • '화양연화(花樣年華)', 가장 아름다웠던 시절의 스쳐 가는 엇갈림
    침묵과 여백의 미학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 없이, '화양연화'는 가장 깊은 사랑의 감정을 전달한다. 왕자웨이 감독의 2000년 작 '화양연화'는 친절한 영화가 아니다. 흔한 사랑 영화처럼 기승전결이 명확하지도, 주인공들의 감정을 속 시원히 터뜨리지도 않는다. 이 영화는 하나의 '이야기'라기보다는 하나의 '분위기'이자 '감정' 그 자체에 가깝다. 1960년대 홍콩의 비좁은 아파트, 눅눅한 공기, 흔들리는 카메라, 그리고 스쳐 가는 두 남녀의 눈빛. 왕자웨이 감독은 이 모든 것을 정교하게 조율하여, 시작조차 못 하고 끝나버린 한 사랑의 가장 애틋하고 아름다운 순간을 스크린에 영원히 박제했다. 영화의 제목 '화양연화'는 '인생에서 가장 아름답고 찬란한 시절'을 뜻하지만, 영화는 그 가장 아름다운 시절이 얼마나 쓸쓸하고 아픈 기억으로 남을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고혹적인 역설이다. 시작도 끝도 없었던 그들의 이야기 1부: 우연, 혹은 필연 (1962년 홍콩) 1962년 홍콩의 한 상하이 이민자들이 모여 사는 공동주택. 같은 날, 두 가구가 이웃하여 이사를 온다. 무역회사 비서로 일하는 아내 소려진(장만옥 분)과 그녀의 남편, 그리고 신문사 편집기자인 차우(양조위 분)와 그의 아내. 이삿짐이 뒤섞이고, 서로의 하인들이 인사를 나누는 어수선함 속에서 두 사람, 소려진과 차우의 인연이 시작된다. 그들의 배우자들은 출장이 잦다. 영화는 소려진의 남편과 차우의 아내의 얼굴을 단 한 번도 명확하게 보여주지 않는다. 그들은 목소리와 뒷모습으로만 존재하는 유령 같은 존재다. 홀로 남겨진 소려진과 차우는 좁은 복도와 계단, 국수를 사러 가는 길목에서 끊임없이 마주치지만, 나누는 것은 예의 바른 목례와 짧은 인사뿐이다. 2부: 조심스러운 확신, 슬픈 비밀의 공유 어느 날, 차우는 자신의 아내가 소려진의 남편과 똑같은 넥타이를 가지고 있음을 발견한다. 비슷한 시기, 소려진은 차우의 아내가 자신과 똑같은 핸드백을 일본에서 사 왔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의심은 곧 확신으로 변한다. 그들은 조심스러운 만남을 통해, 각자의 배우자가 서로 바람을 피우고 있다는 잔인한 진실을 확인한다. 이 배신감은 역설적으로 두 사람을 묶어주는 끈이 된다. "그들은 어떻게 시작되었을까?" 서로의 상처를 위로하며, 그들은 자신들의 배우자가 어떻게 사랑에 빠졌을지를 상상하고 '연습'하는 비밀스러운 만남을 시작한다. 3부: 우리들은 그들과 다르다 두 사람의 비밀스러운 만남은 점점 깊어진다. 함께 저녁을 먹고, 차우는 무협소설을 쓰는 소려진의 작업을 도와주며 호텔 방에서 함께 밤을 새우기도 한다. 하지만 그들은 결코 선을 넘지 않는다. "우리들은 그들과 다르다"는 이 한마디는, 그들의 관계를 규정하는 도덕률이자 넘을 수 없는 벽이 된다. 사랑의 감정은 싹트지만, 그들은 서로에게 한 발짝도 다가서지 못한다. 대신 그들은 이별을 연습하고, 떠나보내는 것을 연습한다. 이웃들의 눈을 피해 좁은 뒷골목을 걷고, 택시 뒷자리에 나란히 앉아 서로의 어깨에 기대는 것이 그들이 나눌 수 있는 가장 큰 위로이자 애정 표현이다. 그들의 사랑은 행동이 아닌 망설임으로, 고백이 아닌 침묵으로 깊어진다. 4-1부: 엇갈린 시간, 영원한 비밀 결국 차우는 이 위태로운 관계를 끝내기 위해 싱가포르로 떠나기로 결심한다. 그는 떠나기 전, 소려진에게 "만약 배표가 한 장 더 있다면, 나와 같이 가겠소?"라고 묻지만, 그녀는 대답하지 못한다. 뒤늦게 용기를 내어 그가 머무는 호텔 방을 찾아갔을 때, 그는 이미 떠나고 난 뒤였다. 시간은 흐른다. 싱가포르에 있는 차우의 집에 소려진이 찾아오지만, 그는 부재중이다. 그녀는 그의 방에서 담배 한 대를 피우고, 립스틱이 묻은 꽁초만 남긴 채 조용히 떠난다. 다시 세월이 흘러 홍콩의 옛집을 찾은 차우는, 이제 그 집에 아들과 함께 사는 소려진과 바로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스쳐 지나간다. 4-2부: 앙코르와트의 속삭임 1966년 캄보디아, 앙코르와트. 기자가 된 차우는 취재차 이곳을 찾는다. 그는 폐허가 된 사원의 한 기둥에 난 작은 구멍을 찾아,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자신의 비밀스러운 사랑을 조용히 속삭인다. 그리고 흙으로 그 구멍을 막아버린다. 그의 사랑은 그렇게 영원히 그곳에 묻혔다. 영화는 다음과 같은 자막으로 끝을 맺는다. "그 시절은 지나갔고, 이제 거기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 스타일이 곧 내용이 되는 영화 미장센: 갇힌 욕망의 시각화 '화양연화'는 왕자웨이 감독의 미학이 정점에 달한 작품이다. 인물들은 늘 좁은 복도, 계단, 창살, 문틈 사이에 갇힌 모습으로 프레임 안에 담긴다. 이는 그들의 억압된 욕망과 사회적 통념이라는 보이지 않는 감옥을 시각적으로 구현한 것이다. 특히, 매 장면마다 바뀌는 장만옥의 화려하고 아름다운 치파오는, 그녀의 말 못 할 감정의 변화를 대변하는 또 다른 언어다. 촬영과 음악: 꿈결 같은 멜랑콜리 영화는 시종일관 슬로우 모션과 흔들리는 카메라 워크를 통해, 인물들의 불안한 심리와 과거를 회상하는 듯한 아련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특히, 우메바야시 시게루의 '유메지의 테마'는 이 영화의 상징과도 같다. 애절한 첼로와 바이올린 선율은 두 사람이 마주치는 순간마다 반복해서 흘러나오며, 그들의 이룰 수 없는 사랑의 테마를 관객의 가슴에 아프게 각인시킨다. 침묵과 여백의 미학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 없이, '화양연화'는 가장 깊은 사랑의 감정을 전달한다. 두 주인공의 감정은 대사가 아닌, 스쳐 가는 눈빛, 망설이는 손짓, 함께 나누는 침묵 속에서 더욱 애틋하게 쌓여간다. "그들과는 다르다"는 다짐 아래 육체적 관계를 거부하는 그들의 선택은, 단순한 도덕적 결벽이 아니라 자신들의 사랑을 더럽히지 않으려는 마지막 자존심이자 가장 고결한 사랑의 방식이다. 홍콩의 노스탤지어, 그 정체성 '화양연화'는 1997년 홍콩이 중국에 반환된 직후인 2000년에 개봉했다. 영화의 배경인 1960년대는, 수많은 중국 본토인들이 공산 혁명을 피해 홍콩으로 이주하여, 중국 전통과 서구 문화가 기묘하게 뒤섞인 홍콩만의 독특한 정체성을 만들어가던 시기였다. 영화는 바로 그 '돌아갈 수 없는 시절'에 대한 짙은 노스탤지어를 담고 있다. 이는 정치적 격변기를 겪으며 미래에 대한 불안감과 과거에 대한 그리움을 동시에 안고 있던 당시 홍콩 사회의 정서를 반영한다. 한국 관객에게 '화양연화'의 절제된 감정 표현은 '한(恨)'의 정서와도 맞닿아 있지만, 그 표현 방식은 사뭇 다르다. 격정적으로 터뜨리기보다는 안으로 삭이며, 그리움을 '스타일'로 승화시키는 왕자웨이의 미학은 한국의 관객에게도 독특하고 깊은 영화적 체험을 선사한다. 만질 수 없는 과거에 대한 가장 아름다운 헌사 '화양연화'는 머리로 이해하는 영화가 아니라, 가슴으로 느끼고 온몸으로 스며드는 영화다. 이 영화를 보고 나면 며칠 동안 진한 여운과 함께 '유메지의 테마'가 귓가에 맴돌게 될 것이다. 왕자웨이 감독은 이 작품을 통해, 이룰 수 없었기에 더욱 완벽하고 아름답게 기억되는 사랑이 있음을, 그리고 인생에서 가장 찬란한 순간은 때로 가장 아픈 순간과 맞닿아 있음을 증명한다. 자극적인 사건 대신, 인물들의 미세한 감정선과 분위기에 흠뻑 취하고 싶은 분. '사랑'이라는 감정이 행동이 아닌 망설임 속에서 얼마나 깊어질 수 있는지 목격하고 싶은 분. 그리고 영화가 보여줄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미장센과 스타일의 정점을 경험하고 싶은 모든 분께 이 영화를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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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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