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5-09-10(수)
 
  • 법원, 성폭력에 대한 '정당방위' 전격 인정... "사법부가 만든 비극, 뒤늦게나마 바로잡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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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뉴스

 

 

1964년, 18세의 나이로 자신을 성폭행하려던 남성의 혀를 깨물어 절단했다는 이유로 유죄 판결을 받았던 최말자 씨(79)가 사건 발생 61년 만에 열린 재심에서 마침내 무죄를 선고받았다. 사법부는 당시 최 씨의 행위가 자신의 순결과 신체를 지키기 위한 필사적인 저항이자 명백한 '정당방위'였음을 인정하며, 반세기가 넘는 세월 동안 '혀를 자른 여성'이라는 주홍글씨를 안고 살아온 피해자의 명예를 회복시켰다. 이번 판결은 성폭력에 대한 우리 사회와 사법부의 인식이 지난 60년간 어떻게 변화했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자, 뒤늦게나마 사법 정의를 바로 세운 역사적인 판결로 기록될 전망이다.

 

61년의 한(恨)을 푼 법정… "피고인은 무죄"

 

2025년 9월 10일, 수원고등법원 형사2부는 중상해 혐의로 기소됐던 최말자 씨의 재심 선고 공판에서 원심을 파기하고 무죄를 선고했다. 재판부는 판결문을 통해 "피고인의 행위는 자신에 대한 현재의 부당한 침해, 즉 성폭력에서 벗어나기 위한 행위였다"며 "이는 자신의 신체와 정조를 지키기 위한 최소한의 방어 수단으로, 정당방위의 요건을 모두 갖추었다"고 판시했다.

 

재판부는 이어 "당시 원심은 남성 중심적 시각에서 여성의 정조라는 가치를 소홀히 하고, 피해자의 방어 행위를 과잉으로 판단하는 오류를 범했다"고 지적했다. 또한 "이로 인해 피고인은 60년이 넘는 긴 세월 동안 신체적, 정신적 고통 속에서 살아왔다"며 "사법부가 제 역할을 다하지 못해 발생한 비극에 대해 깊은 유감을 표하며, 이 판결이 피고인의 명예를 회복하고 상처를 치유하는 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길 바란다"고 밝혔다.

 

무죄가 선고되는 순간, 최말자 씨는 굳게 감고 있던 눈을 뜨며 조용히 눈물을 흘렸다. 법정을 가득 메운 여성단체 회원들과 시민들은 박수와 환호로 61년 만에 이뤄진 정의를 축하했다. 최 씨는 재판이 끝난 후 변호인의 부축을 받으며 "이제야 법이 내 억울함을 알아줬다. 하늘나라에 있는 남편과 부모님께 떳떳할 수 있게 됐다"며 떨리는 목소리로 소회를 밝혔다.

 

18세 소녀에게 씌워진 '주홍글씨', 1964년의 비극

 

사건은 1964년 5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18세였던 최 씨는 경기도의 한 마을에서 자신보다 9살 많은 노 씨로부터 성폭행을 당할 위기에 처했다. 노 씨는 최 씨를 강제로 눕히고 옷을 벗기려 시도하며 강제로 입을 맞췄다. 필사적으로 저항하던 최 씨는 노 씨의 혀가 입안으로 깊숙이 들어오자, 이를 악물어 혀의 일부(약 1.5cm)를 절단했다.

 

그러나 당시 수사기관과 사법부의 판단은 지금과 판이하게 달랐다. 검찰은 노 씨의 성폭행 시도에 대해서는 불기소 처분을 내린 반면, 최 씨에 대해서는 '특수중상해' 혐의를 적용해 재판에 넘겼다. 1심과 2심 재판부는 "여성의 정조는 생명 다음으로 중요한 것이지만, 혀를 절단한 행위는 방어의 정도를 넘어선 과잉방위"라며 최 씨에게 징역 10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이 판결은 18세 소녀 최 씨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놓았다. '남자의 혀를 자른 무서운 여자'라는 낙인이 찍혔고, 평생을 죄인처럼 숨죽여 살아야 했다. 결혼 후에도 꼬리표처럼 따라다니는 소문과 손가락질에 시달렸으며, 자녀들에게조차 사건의 진실을 제대로 말하지 못한 채 깊은 상처를 안고 살아왔다.

 

꺼지지 않은 정의의 불씨, 재심으로 이어진 길

 

시간 속에 묻힐 뻔했던 이 사건이 다시 세상에 알려진 것은 여성인권단체와 변호인단의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2022년, 최 씨의 안타까운 사연을 접한 '한국여성의전화' 등 단체들은 변호인단을 꾸려 법원에 재심을 청구했다.

 

변호인단은 ▲당시 수사가 매우 미흡하고 강압적으로 이뤄졌다는 점 ▲성폭력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현저히 낮았던 시대적 한계로 인해 법리가 오용되었다는 점 ▲최 씨의 행위는 명백한 정당방위라는 점 등을 근거로 재심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법원은 이를 받아들여 2024년 재심 개시를 결정했고, 약 1년여의 심리 끝에 마침내 역사적인 무죄 판결을 내렸다. 이는 성폭력 피해자의 방어 행위를 정당방위로 인정한 중요한 판례로, 향후 유사 사건 재판에도 큰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시대의 변화, 사법 정의의 진일보

 

전문가들은 이번 최말자 씨의 무죄 판결이 단순히 한 개인의 명예 회복을 넘어, 우리 사회의 성 인지 감수성과 인권 의식이 크게 발전했음을 보여주는 증거라고 평가한다. 1960년대의 가부장적이고 남성 중심적인 사회 분위기 속에서는 상상하기 어려웠던 판결이 61년의 세월을 거쳐 가능해졌다는 것이다.

 

이번 판결은 과거 사법부의 잘못된 판결로 인해 고통받은 피해자들에게 새로운 희망을 제시하고, 유사한 '사법 피해' 사례를 재조명하는 계기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61년이라는 긴 어둠의 터널을 지나 마침내 빛을 보게 된 최말자 씨의 사례는, "지연된 정의는 정의가 아니다"라는 법언을 되새기게 함과 동시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포기하지 않을 때 정의는 반드시 실현될 수 있음을 우리 사회에 깊이 각인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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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제 키스 저항에 '혀 절단' 유죄"... 최말자 씨, 61년 만에 재심서 무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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