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5-10-16(목)

전체기사보기

  • 서울 전역·경기 12곳 '3중 규제' ...15억 넘는집 대출 4억, 25억 초과는 2억
    정부가 들끓는 수도권 부동산 시장을 안정시키기 위해 예상을 뛰어넘는 초강력 규제 카드를 꺼내 들었다. 서울시 25개 구 전역과 과천, 분당 등 경기도 12개 핵심 지역을 조정대상지역, 투기과열지구, 토지거래허가구역으로 동시에 묶는 '3중 규제'를 전격 시행한다고 15일 발표했다. 이번 대책은 16일부터 즉각 효력이 발생하며, 과열 양상을 보이는 주택 시장에 직접적인 충격을 줄 것으로 예상된다. 시장 전문가들은 "상상 이상의 고강도 대책"이라며 단기적인 시장 안정 효과를 기대하면서도, 공급 대책 부재에 따른 부작용과 '거래 절벽' 가능성에 대한 우려를 동시에 내놓고 있다. 기획 기사: 10·16 부동산 대책, 시장을 얼어붙게 할 극약 처방인가 1. 배경: "더 이상 물러설 곳 없다"…정부의 절박함 이재명 정부 출범 이후 6·27 대출 규제, 9·7 공급 대책 등 두 차례의 부동산 대책에도 불구하고 서울 및 수도권 집값은 좀처럼 꺾이지 않았다. 특히 '한강 벨트'로 불리는 지역과 경기 남부권의 일부 단지에서는 비이성적인 가격 급등세가 이어지며 '패닉 바잉(공황 구매)' 현상까지 나타났다. 통계청이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올해 3분기 서울 아파트 평균 매매가격은 전 분기 대비 4.5% 상승했으며, 이는 지난 2021년 부동산 급등기 이후 가장 높은 상승률이다. 이러한 시장 과열이 서민과 청년층의 내 집 마련 꿈을 앗아가는 것은 물론, 자산 격차를 심화시켜 사회적 위화감을 조성한다는 비판이 거세졌다. 정부는 더 이상 시장 자율에만 맡겨둘 수 없다는 판단하에, 수요를 강력하게 억제하는 이번 '10·16 부동산 대책'을 내놓게 된 것으로 분석된다. 구윤철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15일 관계부처 합동 브리핑에서 "국민의 주거 안정을 최우선 목표로 삼고, 투기 수요를 근절하기 위해 동원 가능한 모든 정책 수단을 검토했다"고 밝히며 정책 추진의 강력한 의지를 드러냈다. 2. '3중 규제'의 그물망: 무엇이 어떻게 바뀌나 이번 대책의 핵심은 서울 전역과 경기도 12개 지역을 '조정대상지역', '투기과열지구', '토지거래허가구역'으로 동시에 묶어 전방위적인 규제를 가하는 것이다. 해당 지역은 사실상 주택 거래에 있어 정부의 엄격한 통제를 받게 된다. 규제 대상 지역: 서울특별시: 25개 구 전역 경기도 (12곳): 과천시, 광명시, 성남시(분당구, 수정구, 중원구), 수원시(영통구, 장안구, 팔달구), 안양시(동안구), 용인시(수지구), 의왕시, 하남시 주요 규제 내용: 강화된 대출 규제: 규제지역 내 주택담보대출비율(LTV)이 현행 70%에서 40%로 대폭 축소된다. 특히 수도권 내 15억 원 초과 주택의 경우, 주택담보대출 한도가 가격에 따라 차등 적용된다. 15억~25억 원 주택은 최대 4억 원, 25억 원 초과 주택은 최대 2억 원까지만 대출이 가능해져 고가 주택에 대한 '레버리지(차입) 투자'가 사실상 불가능해졌다. '갭투자' 원천 봉쇄: 토지거래허가구역 지정(10월 20일 발효)은 이번 대책의 가장 강력한 카드로 꼽힌다. 해당 구역에서 주택을 매수할 경우, 구매자는 2년간 의무적으로 실거주해야 한다. 이는 전세를 끼고 집을 사는 '갭투자'를 원천적으로 차단하는 효과를 가져온다. 실거주 의무를 위반할 경우 이행강제금 부과 등 강력한 제재가 뒤따른다. 세금 중과 및 요건 강화: 다주택자에 대한 취득세와 양도소득세가 중과된다. 1세대 1주택자의 양도소득세 비과세 요건 역시 기존 '2년 보유'에서 '2년 보유 및 2년 거주'로 강화되어 단기 시세차익을 노린 투자를 억제한다. 청약 및 거래 제한: 세대주만 청약이 가능하도록 자격이 제한되며, 수도권 분양권 전매 제한 기간도 3년으로 늘어난다. 또한, 재건축·재개발 조합원의 지위 양도 역시 제한되어 정비사업을 통한 투기 수요 유입을 막는다. 3. 시장 반응 및 전문가 분석: "일단 멈춤"…향후 전망은? 정부의 고강도 대책 발표 직후 부동산 시장은 즉각적인 관망세로 돌아섰다. 매수 문의가 뚝 끊기고, 일부 지역에서는 호가를 낮춘 급매물이 등장할 것이라는 예측도 나온다. 긍정적 전망: 다수의 전문가는 이번 대책이 단기적인 시장 안정에는 분명한 효과를 낼 것이라고 평가한다. 박원갑 KB국민은행 부동산수석전문위원은 "서울 전역과 수도권 핵심지를 한꺼번에 규제지역으로 묶어 과거 '핀셋 규제'의 부작용으로 지적됐던 '풍선 효과'를 차단한 것이 주효할 것"이라며, "투기 수요가 위축되고 시장이 전반적인 숨 고르기 장세에 들어갈 것"으로 전망했다. 특히 토지거래허가구역 지정으로 갭투자가 불가능해지면서 비정상적으로 과열됐던 시장이 냉각될 것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우려 및 한계: 반면, 수요 억제에만 치중된 '반쪽짜리' 대책이라는 비판도 만만치 않다. 시장이 기대했던 재건축·재개발 규제 완화나 신규 택지 지정 등 획기적인 공급 확대 방안이 빠졌기 때문이다. 함영진 우리은행 부동산리서치랩장은 "4천조 원을 넘어선 시중의 풍부한 유동성과 저금리 기조가 유지되는 한, 규제만으로 집값 상승 압력을 장기간 억누르기는 어려울 수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또한 "매매 시장이 막히면서 수요가 전세 시장으로 몰려 전셋값 상승을 부추길 수 있으며, 이는 결국 서민들의 주거비 부담을 가중시키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고 우려했다. 실제로 '거래 절벽'에 대한 우려가 크다. 대출이 막히고 실거주 요건이 강화되면서 실수요자들의 '갈아타기'마저 어려워져 시장의 건전한 순환 기능이 마비될 수 있다는 지적이다. "공급 시그널 없이는 백약이 무효"…장기적 안정화는 미지수 정부의 10·16 부동산 대책은 투기 수요를 차단하고 과열된 시장을 안정시키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담은 '극약 처방'임이 분명하다. 단기적으로 매수 심리를 위축시키고 가격 상승세를 억제하는 효과는 나타날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근본적인 시장 안정을 위해서는 수요 억제와 더불어 양질의 주택이 지속적으로 공급될 것이라는 명확한 '시그널'을 시장에 주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국민들이 "지금 '영끌'해서 집을 사지 않아도, 몇 년 뒤 합리적인 가격에 내 집을 마련할 수 있다"는 신뢰와 기대를 갖게 될 때, 비로소 부동산 시장은 안정화의 길로 들어설 수 있을 것이다. 이번 대책으로 시간을 번 정부가 시장의 불안감을 해소할 수 있는 실효성 있는 공급 대책을 얼마나 신속하게 마련하느냐가 이번 정부 부동산 정책의 성패를 가늠할 핵심 변수가 될 전망이다.
    • 정치경제
    • 경제
    2025-10-16
  • 캄보디아發 비극, 청년들 노리는 검은 손길
    최근 캄보디아가 한국인 청년들을 겨냥한 강력범죄의 온상으로 급부상하며 충격을 주고 있다. '고수익 보장'이라는 달콤한 유혹에 속아 현지로 향했던 이들이 취업사기는 물론, 감금, 폭행, 심지어 사망에 이르는 끔찍한 범죄의 희생양이 되고 있다. 아름다운 앙코르와트로 기억되던 '기회의 땅'이 어쩌다 한국인에게 '범죄의 늪'이 되었을까. 1. 비극의 서막: '월 천만 원'의 유혹 사건의 발단은 대부분 소셜미디어(SNS)에 무분별하게 퍼지는 '고수익 해외 취업' 광고에서 시작된다. '항공권·숙식 제공', '간단한 업무로 월 1000만 원 보장' 등 현실성 없는 조건을 내걸고 경제적 어려움을 겪는 20~30대 청년들을 유인하는 것이다. 이들은 주로 중국계 범죄조직이 운영하는 온라인 도박, 보이스피싱 등 불법 사업체에 고용된다. 막상 캄보디아에 도착하면 조직원들에게 여권과 휴대전화를 빼앗기고 외딴곳에 감금된 채 강제 노동에 시달린다. 할당된 실적을 채우지 못하면 무자비한 폭행과 고문이 뒤따른다. 지난 8월, 캄보디아 깜폿주의 한 숙소에서 20대 한국인 대학생 A씨가 숨진 채 발견된 사건은 이러한 범죄의 참혹성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A씨 역시 고수익 아르바이트 제안을 받고 캄보디아로 향했다가 범죄조직에 감금돼 고문을 당하다 끝내 목숨을 잃었다. 이 사건의 용의자들은 모두 중국인으로 밝혀져 현지 중국계 범죄조직의 심각성이 수면 위로 드러났다. 2. 끔찍한 실상: 감금, 고문, 그리고 죽음 피해자들은 철저한 감시 속에 외부와의 연락이 차단된 채 생활한다. 탈출을 시도하다 발각되면 더욱 가혹한 폭력에 시달리거나 다른 조직에 팔려나가는 인신매매의 희생자가 되기도 한다. 일부 피해자들은 가족에게 연락해 거액의 몸값을 지불하고서야 풀려날 수 있었다. 최근에는 피해자들이 직접 나서 범죄 의심 인물들의 신상을 공개하는 온라인 채널까지 등장했다. 이곳에는 숨진 A씨가 강제로 마약을 투약하는 것으로 보이는 영상이 공개돼 국민적 공분을 사기도 했다. 캄보디아 내 한국인 대상 범죄가 폭증하자, 정부의 더딘 대응에 답답함을 느낀 이들이 '자경단' 성격의 활동에 나선 것이다. 외교부에 따르면 캄보디아에서 한국인 납치·감금 피해 신고 건수는 2023년 연간 10~20건 수준에서 지난해 220건, 올해는 330건으로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이는 공식적인 통계일 뿐, 실제 피해 사례는 훨씬 더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3. 현재 상황과 양국 정부의 대응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한 한국 정부는 캄보디아에 대한 여행경보 상향 조정을 검토하는 등 대응에 나섰다. 외교부는 현지 공관을 통해 피해자 구출 및 영사 조력을 제공하고 있으며, 캄보디아 당국에 신속하고 철저한 수사와 범인 엄벌을 촉구하고 있다. 최근 캄보디아에서 검거된 한국인 피의자 60여 명에 대한 국내 송환도 추진 중이다. 캄보디아 정부 또한 훈 마넷 총리의 지시로 온라인 사기 조직 소탕을 위한 대대적인 단속에 착수했다. 최근 프놈펜 등지에서 중국인을 포함한 수백 명의 범죄조직원들이 체포되는 등 가시적인 성과도 나타나고 있다. 하지만 현지 경찰의 부패 문제와 범죄조직의 뿌리 깊은 유착 관계는 근본적인 해결을 어렵게 하는 요인으로 지적된다. 양국은 1997년 수교 이래 꾸준히 우호적인 관계를 발전시켜왔으나, 이번 사태로 인해 양국 관계에 미묘한 긴장감이 흐르고 있다. 잇따른 강력 범죄 소식에 한국 내에서는 캄보디아 여행 취소 사태가 잇따르는 등 반(反)캄보디아 감정이 확산하는 모양새다. 한국 언론과 여론은 이번 사태를 집중 조명하며 정부의 미온적인 초기 대응을 비판하고, 재외국민 보호 시스템의 강화를 촉구하고 있다. 대학가를 중심으로 '고수익 해외취업 사기'에 대한 경각심을 높이는 캠페인도 진행되고 있다. 캄보디아 현지에서는 이번 사건이 국가 이미지에 미칠 악영향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나온다. 관광 산업이 주요 수입원인 캄보디아로서는 '범죄 국가'라는 오명이 치명적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이번 사태가 단순히 캄보디아만의 문제가 아닌, 동남아시아 전역으로 확산된 초국가적 범죄라는 점을 강조한다. 따라서 한국 정부는 캄보디아뿐만 아니라 주변국과의 긴밀한 사법 공조 체계를 구축하고, 국제 범죄조직에 대한 정보를 공유하는 등 보다 근본적이고 포괄적인 대책 마련에 나서야 한다고 조언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고수익'이라는 미끼에 현혹되지 않는 청년들의 현명한 판단이다. 정부와 사회는 청년들에게 안전한 해외 취업 정보를 제공하고, 해외에서 부당한 일을 겪었을 때 즉시 도움을 요청할 수 있는 시스템을 더욱 촘촘히 구축해야 할 것이다. 캄보디아에서 울리는 비극의 경고음은 더 이상 외면해서는 안 될 우리 사회 전체의 과제다.
    • 국제/중국
    2025-10-16
  • 이스라엘-하마스, 2년 만에 휴전 전격 합의…인질 석방·군 철수 개시
    2023년 10월 7일 시작되어 2년간 수많은 사상자를 낳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무장 정파 하마스 간의 전쟁이 마침내 중대한 전환점을 맞았다. 현지 시각 8일, 양측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중재 아래 휴전 1단계 안에 전격 합의했다. 이번 합의에 따라 하마스는 억류 중인 이스라엘 인질을 석방하고, 이스라엘은 가자지구에서 군대를 단계적으로 철수하며 팔레스타인 수감자를 풀어주게 된다. 2년간 지속된 교전으로 황폐해진 가자지구에 평화의 서광이 비치기 시작했다는 기대감이 커지고 있다. 이번에 타결된 1단계 휴전안의 핵심은 인질 및 수감자 교환과 이스라엘군의 단계적 철수다. 합의에 따르면, 하마스는 72시간 내에 생존해 있는 이스라엘 인질 약 20명을 포함한 모든 억류 인원을 석방한다. 그 대가로 이스라엘은 자국에 수감된 팔레스타인인 약 2,000명을 석방하기로 했다. 또한, 가자지구를 전면 봉쇄하고 지상 작전을 펼쳐온 이스라엘군은 합의된 특정 경계선까지 1차적으로 철수하게 된다. 이스라엘의 군사 작전도 즉각 중단된다. 이번 협상은 이집트와 카타르가 중재자 역할을 맡아왔으며,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지난달 29일 발표한 '가자 평화 구상'을 바탕으로 급물살을 탔다. 트럼프 대통령은 자신의 소셜미디어 '트루스 소셜'을 통해 "강력하고 지속적이며 영구적인 평화를 향한 첫 단계"라며 합의 사실을 알리고, "모든 인질이 곧 석방될 것"이라고 밝혔다.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는 이번 합의를 "국가적 승리"이자 "역사적 성취"라고 평가하며 환영의 뜻을 밝혔다. 하마스 측 역시 합의 사실을 확인하면서도, 중재국들이 이스라엘의 합의 이행을 철저히 보장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안토니우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을 비롯한 국제사회는 일제히 환영의 뜻을 표하며, 양측의 성실한 합의 이행을 촉구했다. 그러나 이번 합의는 영구적인 평화로 가기 위한 첫걸음에 불과하다는 신중론도 제기된다. 하마스의 무장 해제 문제, 전쟁으로 초토화된 가자지구의 재건 및 향후 통치 방식 등 민감하고 복잡한 문제들이 2단계 협상 과제로 남아있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이번 1단계 합의의 성공적인 이행 여부가 향후 중동 평화의 향방을 가늠할 중요한 척도가 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 국제/중국
    • 국제
    2025-10-10
  • 스톡홀름 증후군, 적과의 동침인가 생존을 위한 비극적 유대인가
    1973년 스웨덴 스톡홀름의 한 은행에 무장 강도가 침입했다. 6일간 이어진 인질극이 끝났을 때, 세계는 충격적인 장면에 주목했다. 인질들이 경찰이 아닌 인질범을 두둔하고, 심지어 재판에서 불리한 증언을 거부하며 그들을 옹호하고 나선 것이다. 이 기이한 심리적 현상에 '스톡홀름 증후군(Stockholm Syndrome)'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단순한 범죄 사건을 넘어, 극한의 공포 속에서 피어나는 피해자와 가해자 간의 비극적 유대는 오늘날 가정, 직장 등 다양한 사회 관계 속에서도 그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본 기획 기사에서는 스톡홀름 증후군의 개념과 발생 원인을 심층적으로 분석하고, 세계를 놀라게 한 주요 사례들을 통해 그 실체를 파헤치며, 우리 사회에 던지는 함의를 고찰해 보고자 한다. 1. 스톡홀름 증후군의 탄생: 노르말름스토리 은행 강도 사건 스톡홀름 증후군이라는 용어는 1973년 8월 23일, 스웨덴 스톡홀름 노르말름스토리(Norrmalmstorg) 광장의 크레디트반켄(Kreditbanken) 은행에서 발생한 강도 인질 사건에서 유래했다. 범인 얀에리크 올손(Jan-Erik Olsson)은 은행 직원 4명을 인질로 잡고, 동료인 클라르크 올로프손(Clark Olofsson)의 석방과 거액의 현금을 요구하며 경찰과 대치했다. 6일간의 대치 기간 동안 인질들은 외부와 완전히 차단된 채, 오직 인질범들에게만 의존해야 하는 극한 상황에 놓였다. 놀라운 일은 인질극이 끝난 후에 벌어졌다. 구출된 인질 중 한 명인 크리스틴 엔마르크(Kristin Enmark)는 당시 총리에게 전화를 걸어 "인질범들이 우리를 해치지 않았으며, 오히려 우리를 보호해주었다. 나는 경찰이 더 두렵다"고 말하며 인질범들을 옹호했다. 다른 인질들 역시 석방 후 인질범들과 포옹을 나누고, 재판에서 그들에게 불리한 증언을 거부하는 등 비상식적인 행동을 보였다. 이 사건을 분석한 정신과 의사 닐스 베예로트(Nils Bejerot)는 이러한 현상을 '노르말름스토리 증후군'이라 불렀고, 이는 곧 '스톡홀름 증후군'이라는 이름으로 전 세계에 알려지게 되었다. 공식적인 정신 질환으로 분류되지는 않지만,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의 일종으로 분류되며 극한 상황에서 나타나는 복합적인 심리 반응으로 이해된다. 2. 왜 피해자는 가해자에게 연민을 느끼나? 피해자가 가해자에게 감정적으로 동화되는 현상은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어렵다. 전문가들은 스톡홀름 증후군이 생존을 위한 무의식적인 '방어기제'이자 '생존 전략'이라고 분석한다. 발생 원인은 크게 네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생존에 대한 위협과 통제: 인질범은 인질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다. 인질은 생존에 대한 극심한 공포를 느끼며, 가해자의 기분을 거스르지 않기 위해 그의 요구와 감정에 극도로 민감해진다. 이 과정에서 가해자의 시각으로 상황을 바라보게 되고 점차 동화된다. 외부로부터의 완벽한 고립: 인질극 상황에서 피해자는 외부 세계와 완전히 단절된다. 유일하게 소통하고 의지할 수 있는 대상은 역설적으로 가해자뿐이다. 이러한 고립은 가해자의 관점과 논리를 비판 없이 수용하게 만드는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한다. 가해자가 베푸는 사소한 친절: 가해자가 물을 주거나, 화장실에 가게 해주거나, 잠시 밧줄을 풀어주는 등의 사소한 행동은 인질에게 큰 친절과 인간적인 배려로 왜곡되어 인식될 수 있다. '나를 죽일 수도 있는 사람이 나에게 호의를 베풀었다'는 사실이 강력한 긍정적 감정으로 발전하는 것이다. 탈출이 불가능하다는 믿음: 저항하거나 탈출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판단될 때, 피해자는 현재 상황을 받아들이고 적응하려는 심리적 기제를 발동시킨다. 가해자와 긍정적인 관계를 형성하는 것이 자신의 생존 가능성을 높이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무의식적으로 믿게 된다. 이 네 가지 조건이 충족될 때, 피해자는 가해자를 자신과 동일시하고, 외부의 구조 시도(경찰의 진압 등)를 오히려 자신과 가해자 모두에 대한 위협으로 인식하는 심리적 역전 현상을 보이게 된다. 3. 현실 속의 스톡홀름 증후군 스톡홀름 증후군은 영화나 소설 속 이야기가 아니다. 역사적으로 이를 명확히 보여주는 비극적인 사례들이 존재한다. 패티 허스트(Patty Hearst) 사건 (1974): 미국 언론 재벌의 손녀였던 패티 허스트는 급진 좌파 무장 단체 '공생해방군(SLA)'에 납치되었다. 그녀는 납치 두 달 후, 스스로를 '타니아'라 칭하며 납치범들과 함께 은행 강도에 가담하는 영상이 공개되어 미국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다. 체포 후 재판에서 변호인단은 그녀가 스톡홀름 증후군을 겪었다고 변호했지만, 유죄 판결을 받았다. 이 사건은 스톡홀름 증후군의 대중적 인지도를 높인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나타샤 캄푸쉬(Natascha Kampusch) 사건 (2006): 1998년, 10살의 나이로 등굣길에 납치된 오스트리아 소녀 나타샤 캄푸쉬는 8년 반 동안 작은 지하실에 감금되어 학대를 당했다. 2006년 극적으로 탈출에 성공했지만, 그녀는 범인 볼프강 프리클로필이 자살했다는 소식을 듣고 비통해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녀는 훗날 자서전에서 "그는 내 삶의 일부였다"고 회고하며, 가해자와 피해자 사이에 형성된 복잡하고 모순적인 감정의 실체를 보여주었다. 4. 사회적 함의: 인질 사건을 넘어 일상으로 스톡홀름 증후군은 더 이상 인질극과 같은 특수한 상황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전문가들은 가정 폭력, 아동 학대, 데이트 폭력, 직장 내 괴롭힘, 광신적 종교 집단 등 권력의 불균형이 존재하는 폐쇄적인 관계 속에서 유사한 심리적 기제가 나타날 수 있다고 경고한다. 가정 폭력 피해자가 가해자인 배우자를 떠나지 못하고 "그래도 저 사람이 나쁜 사람만은 아니다"라고 변호하거나, 지속적인 가스라이팅을 당한 자녀가 학대하는 부모를 감싸는 모습은 **'일상화된 스톡홀름 증후군'**의 단면이라 할 수 있다. 폭력과 간헐적인 다정함이 반복되는 '학대의 순환' 구조는 피해자의 심리를 지배하고, 가해자에게 벗어날 수 없다는 무력감과 비이성적인 유대감을 형성하게 만든다. 따라서 우리는 이러한 피해자들을 향해 "왜 벗어나지 못했는가?"라는 섣부른 비난을 던지기 전에, 그들이 처한 상황의 특수성과 생존을 위해 발버둥 칠 수밖에 없었던 복잡한 내면의 심리를 이해하려는 노력이 선행되어야 한다. 피해자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은 비난의 대상이 아니라, 깊은 트라우마의 신호이자 사회적 이해와 전문적인 치유가 필요한 영역이다. 결론적으로 스톡홀름 증후군은 인간의 생존 본능이 얼마나 처절하게 작동하는지, 그리고 정신이 극한의 상황에서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어떻게 현실을 왜곡하고 재구성하는지를 보여주는 비극적 증거다. 이는 우리에게 피해자의 목소리를 더욱 신중하게 경청하고, 그들의 상처를 섣불리 재단하지 말아야 한다는 무거운 사회적 과제를 던져주고 있다.
    • 기획특집
    • 상식지식
    2025-10-06
  • 빅브라더는 죽지 않았다, 조지 오웰의 '1984'가 던지는 섬뜩한 경고
    1949년, 제2차 세계대전의 포화가 채 가시지 않은 시대에 출간된 한 편의 소설이 미래 사회에 대한 가장 어둡고 통찰력 있는 예언서로 자리매김했다. 조지 오웰의 '1984'는 단순한 디스토피아 소설을 넘어, 전체주의의 작동 원리와 인간 정신의 말살 과정을 집요하게 파고든 위대한 문학적 성취다. 그가 그려낸 1984년은 이미 과거가 되었지만, '빅브라더', '사상경찰', '이중사고'와 같은 소설 속 개념들은 21세기 디지털 감시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여전히, 아니 오히려 더욱 섬뜩한 현실성을 띤다. 1. 진실을 꿈꾼 한 남자의 처절한 몰락 '1984'의 무대는 전 세계가 오세아니아, 유라시아, 이스트아시아라는 3개의 초거대 국가로 재편된 1984년의 런던이다. 주인공 윈스턴 스미스는 오세아니아를 지배하는 '당(The Party)'의 하급 당원으로, 진리부(Ministry of Truth) 기록국에서 과거의 신문 기사나 문서를 현재 당의 방침에 맞게 수정·조작하는 일을 한다. 1) 통제된 세계와 내면의 반란 오세아니아는 당의 최고 지도자인 '빅브라더(Big Brother)'가 모든 것을 지켜보는 절대적인 감시 사회다. 거리와 가정에는 양방향 통신이 가능한 '텔레스크린(Telescreen)'이 설치되어 시민들의 모든 말과 행동을 24시간 감시하며, 사상범죄를 색출하는 '사상경찰(Thought Police)'이 암약한다. 당은 과거를 지배하는 자가 미래를 지배하고, 현재를 지배하는 자가 과거를 지배한다는 슬로건 아래 역사를 끊임없이 날조한다. 언어 또한 '신어(Newspeak)'라는 새로운 언어로 대체하여, 반역적인 사상을 표현할 단어 자체를 소멸시키려 한다. 이 질식할 듯한 통제 속에서 윈스턴은 희미하게 남은 과거의 기억과 현실의 모순에 회의를 품는다. 그는 금지된 행위인 '일기 쓰기'를 통해 자신의 생각과 의심을 기록하며 위태로운 내면의 반란을 시작한다. 그는 당의 고위 간부로 보이는 '오브라이언(O'Brien)'에게서 자신과 같은 의심을 품고 있을지 모른다는 막연한 동질감을 느끼고, 당돌한 젊은 여성 '줄리아(Julia)'와 마주치면서 그의 삶은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간다. 2) 금지된 사랑과 짧은 해방 어느 날, 줄리아는 윈스턴에게 몰래 "당신을 사랑해요"라고 적힌 쪽지를 건넨다. 당은 성욕을 오직 출산을 위한 의무로만 규정하고 개인적인 쾌락과 사랑을 철저히 통제하기에, 이들의 만남은 그 자체로 체제에 대한 반역 행위다. 윈스턴과 줄리아는 사상경찰의 눈을 피해 런던 외곽의 숲이나 무산계급(Proles)이 사는 지역의 한 낡은 방에서 비밀스러운 만남을 이어간다. 그들에게 사랑은 단순한 육체적 쾌락을 넘어, 당이 통제할 수 없는 유일한 인간성의 영역이자 정치적 저항 행위였다. 특히 줄리아는 당의 이념에는 무관심하지만, 규칙을 어기고 개인적인 자유를 누리는 것을 즐기는 인물로, 이념적 반역을 꿈꾸는 윈스턴과는 다른 방식으로 체제에 저항한다. 이 짧고 위험한 밀애의 시간 동안 윈스턴은 잠시나마 해방감과 인간적인 유대를 맛본다. 3) 거짓 희망과 잔혹한 함정 저항에 대한 갈망이 커진 윈스턴은 마침내 오브라이언에게 접근한다. 오브라이언은 자신이 당에 저항하는 비밀 조직 '형제단(The Brotherhood)'의 일원이라며 그들을 안심시킨 뒤, 조직의 강령이 담긴 '그 책(The Book)'을 건네준다. 윈스턴은 책을 읽으며 당의 지배 구조와 이데올로기(영사주의, 영원한 전쟁의 본질, 이중사고 등)의 실체를 파악하고 자신의 생각이 틀리지 않았음을 확인한다. 하지만 이것은 모두 정교하게 설계된 함정이었다. 윈스턴과 줄리아가 유일한 안식처로 여겼던 낡은 방의 그림 뒤에는 텔레스크린이 숨겨져 있었다. 그들은 현장에서 체포되고, 윈스턴은 그토록 동경했던 오브라이언이 사실은 사상경찰의 핵심 간부이자 자신을 오랫동안 감시하고 유인해 온 장본인임을 깨닫게 된다. 4) 파괴되는 인간성, 그리고 '101호실' 체포된 윈스턴은 애정부(Ministry of Love)로 끌려가 혹독한 고문을 당한다. 고문의 총책임자는 다름 아닌 오브라이언이다. 고문의 목적은 자백이나 처벌이 아니다. 그것은 윈스턴의 저항 의지를 꺾고, 그의 생각을 완전히 개조하여 당이 원하는 방식으로 생각하게 만드는 데 있다. 오브라이언은 윈스턴에게 "2+2=5가 될 수도 있다"고 말하며, 당이 진리라고 말하는 것이 곧 진리이며, 객관적인 현실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강요한다. 육체적 고통과 심리적 압박 속에서 윈스턴의 저항은 서서히 무너진다. 하지만 그의 마음 깊은 곳에는 줄리아에 대한 사랑이 마지막 보루로 남아 있었다. 당은 그의 마지막 인간성마저 파괴하기 위해 그를 '101호실'로 보낸다. 101호실은 개인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을 이용해 공포의 한계점을 시험하는 곳이다. 쥐를 병적으로 무서워하는 윈스턴의 얼굴에 굶주린 쥐들이 든 철창이 씌워지자, 그는 이성을 잃고 절규한다. "나한테 하지 마! 줄리아한테 해!" 이 한마디는 그의 내면에 남은 마지막 인간성의 완전한 소멸을 의미했다. 그는 자신의 고통을 피하기 위해 사랑하는 연인을 제물로 바친 것이다. 석방된 윈스턴은 과거의 모든 기억과 감정이 거세된 채, 오직 빅브라더에 대한 사랑과 순응만이 남은 텅 빈 껍데기가 된다. 어느 날 카페에서 우연히 마주친 줄리아 역시 그와 마찬가지로 모든 것을 잃고 서로를 배신했음을 무감각하게 확인한다. 소설은 텔레스크린에서 흘러나오는 전쟁 승리 소식을 들으며 윈스턴이 "그는 빅브라더를 사랑했다"는 문장으로 끝을 맺는다. 그의 투쟁은 완벽한 패배로 끝났고, 체제는 한 개인의 정신을 완전히 정복했다. 2. '1984'는 무엇을 말하는가? 1) 전체주의와 절대 권력의 속성 '1984'는 전체주의 체제가 어떻게 개인의 삶을 완벽하게 통제하고 파괴하는지를 해부한다. 당은 물리적인 통제를 넘어 역사, 언어, 생각, 심지어 사랑이라는 가장 내밀한 감정까지 지배하려 한다. 오웰은 권력의 본질이 목적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권력 그 자체가 목적임을 오브라이언의 입을 통해 명확히 밝힌다. 당은 인류를 고문하고 굴복시키면서 영원히 권력을 유지하는 그림을 그리고 있으며, 이는 권력의 비인간적이고 자기 증식적인 속성을 통렬하게 고발한다. 2) 감시 사회와 프라이버시의 종말 '빅브라더가 당신을 지켜보고 있다(Big Brother is watching you)'는 소설 속 문구는 현대 사회의 감시 문제를 상징하는 아이콘이 되었다. 소설 속 텔레스크린은 오늘날의 CCTV, 인터넷 검열, 개인정보 수집, 안면 인식 기술 등을 놀랍도록 정확하게 예견한다. 오웰은 외부의 감시가 내면화될 때, 즉 개인이 스스로를 끊임없이 검열하게 될 때 진정한 자유는 소멸한다고 경고한다. 프라이버시의 상실은 단순히 사생활이 노출되는 문제를 넘어, 자유로운 사고와 개성의 형성을 원천적으로 봉쇄하는 기제로 작동한다. 3) 언어와 사고의 통제 신어(Newspeak)와 이중사고(Doublethink) 오웰이 창조한 가장 독창적인 개념 중 하나는 '신어'와 '이중사고'다. 신어는 어휘를 극단적으로 축소하여 사상의 폭을 좁히고, 최종적으로는 '사상범죄' 자체를 불가능하게 만드는 것을 목표로 하는 언어다. '자유'라는 단어는 남아있지만, '정치적 자유'나 '개인의 자유'의 의미는 사라지고 '이 개는 벼룩으로부터 자유롭다'는 식의 한정된 의미로만 사용된다. 이중사고는 한 사람의 마음속에 서로 모순되는 두 가지 신념을 동시에 받아들이고 둘 다 사실이라고 믿는 정신 상태를 의미한다. "전쟁은 평화, 자유는 예속, 무지는 힘"이라는 당의 슬로건이 대표적이다. 이는 진실과 거짓의 경계를 허물고, 체제의 모순을 비판적으로 사고할 능력을 마비시키는 강력한 심리 통제 수단이다. 오늘날 '가짜뉴스'와 '탈진실' 현상이 만연한 시대에, 이중사고의 개념은 더욱 섬뜩한 현실성을 갖는다. 3. 왜 지금 다시 오웰인가? 조지 오웰의 '1984'가 출간된 지 70년이 훌쩍 넘었지만, 그 영향력은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다. 오히려 인공지능, 빅데이터, 소셜미디어가 지배하는 21세기에 그의 경고는 더욱 절실하게 다가온다. 오늘날 각국 정부와 거대 테크 기업들은 막대한 양의 개인 데이터를 수집하고 분석하며, 이는 보이지 않는 새로운 '빅브라더'의 출현을 예고한다. 소셜미디어의 알고리즘은 사용자가 보고 듣는 정보를 필터링하여 '확증 편향'을 강화하고, 정치적 양극화를 심화시킨다. '가짜뉴스'는 여론을 조작하고 객관적 진실의 가치를 위협하며, 사회적 불신을 팽배하게 만든다. '1984'는 우리에게 끊임없이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편리함과 안전을 위해 얼마만큼의 자유와 프라이버시를 내어줄 수 있는가? 진실이 권력에 의해 왜곡될 때, 우리는 어떻게 저항할 것인가?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기 위한 마지막 보루는 무엇인가? 소설의 결말은 지독히도 비극적이지만, 오웰이 이 작품을 쓴 목적은 절망적인 예언을 하기 위함이 아니었다. 그는 이러한 끔찍한 미래가 현실이 되지 않도록 '경고'하기 위해 펜을 들었다. '1984'를 읽는다는 것은, 단순히 과거의 명작을 감상하는 것을 넘어, 비판적 사고의 중요성을 되새기고, 우리가 발 딛고 있는 현실을 냉철하게 성찰하며, 자유와 진실의 가치를 지키기 위해 깨어있는 시민으로 살아가야 할 책무를 확인하는 행위다. 빅브라더는 여전히 우리를 지켜보고 있기 때문이다.
    • 엔터테인
    2025-10-06
  • 21C 미국을 배회하는 매카시즘의 유령, 1950년대 냉전의 광풍
    1950년대 초, 미국 사회를 휩쓴 '붉은 공포(Red Scare)'의 광풍, 매카시즘. 조지프 매카시 상원의원의 입에서 시작된 이 거대한 마녀사냥은 수많은 이들의 삶을 파괴하고 미국 민주주의에 깊은 상처를 남겼다. 그로부터 70여 년이 흐른 지금, 우리는 왜 다시 매카시즘의 망령을 소환해야 하는가? 오늘날의 분열과 불신의 정치 지형 속에서 매카시즘의 개념과 역사, 그리고 그 비판적 교훈을 되짚어 보는 것은 단순한 과거사 회고를 넘어, 현재와 미래를 비추는 거울이 될 것이다. 1. 매카시즘의 탄생: 냉전의 공포가 낳은 괴물 매카시즘(McCarthyism)은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 소련과의 냉전이 격화되던 1950년부터 1954년까지 미국을 휩쓴 극단적인 반공산주의 열풍을 일컫는다. 이 용어는 당시 위스콘신주 출신의 공화당 상원의원 조지프 매카시(Joseph McCarthy)의 이름에서 유래했다. 1950년 2월 9일, 웨스트버지니아주 휠링의 한 여성 공화당원 클럽 연설에서 매카시는 "나는 오늘 국무장관에게 국무부에서 일하면서 정책을 만들고 있는 공산당원 205명의 명단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고 주장했다. 이 폭탄선언은 즉각 미국 사회를 충격에 빠뜨렸다. 비록 그가 제시한 명단의 실체는 끝내 명확히 입증되지 않았지만, 그의 발언은 이미 팽배해 있던 대중의 불안감에 불을 지폈다. 당시 미국은 '중국의 공산화', '소련의 원자폭탄 실험 성공' 등 연이은 국제 정세의 변화로 인해 공산주의의 위협을 피부로 느끼고 있었다.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매카시는 '내부의 적'을 색출하겠다는 선동적인 구호로 대중의 인기를 얻었고, 순식간에 정계의 중심인물로 떠올랐다. 그의 주장은 사실 확인보다는 의심과 공포를 기반으로 했으며, 언론은 그의 발언을 무비판적으로 중계하며 공포 분위기를 확산시키는 데 일조했다. 2. 광기의 시대: 마녀사냥의 방식과 그 희생자들 매카시즘의 광풍은 '비미(非美)활동조사위원회(House Un-American Activities Committee, HUAC)'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이 위원회는 정부, 학계, 예술계, 노동계 등 사회 각계각층의 인사들을 소환하여 그들의 사상과 충성심을 검증했다. 청문회는 피고발인의 인권을 철저히 무시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명확한 증거 없이 '공산주의 동조자'라는 낙인이 찍혔고, 소환된 이들은 동료나 친구의 이름을 거론하도록 강요받았다. 증언을 거부하거나 비판적인 태도를 보이는 이들은 '비협조적인 증인'으로 분류되어 사회적으로 매장당했다. 이러한 과정에서 수많은 지식인, 예술가, 공무원들이 직장을 잃고 사회적 명예를 실추당했다. 특히 할리우드 영화계는 가장 큰 타격을 입은 분야 중 하나였다. 영화감독 엘리아 카잔, 배우 게리 쿠퍼 등 많은 영화인이 청문회에 불려 나왔으며, '할리우드 텐(Hollywood Ten)'으로 불리는 10명의 영화인은 증언을 거부했다는 이유로 의회 모독죄 판결을 받고 수감되기도 했다. 세계적인 희극배우 찰리 채플린 역시 공산주의 동조자로 몰려 사실상 미국에서 추방당했다. 이러한 '블랙리스트(Blacklist)'는 영화계를 넘어 학계, 언론계, 노동계로 확산되며 미국 사회 전체의 지적 토양을 황폐하게 만들었다. 자유로운 사상과 표현의 자유는 위축되었고, 사회는 서로를 감시하고 불신하는 분위기에 휩싸였다. 3. 매카시즘의 몰락과 그 교훈 영원할 것 같던 매카시의 권력은 1954년을 기점으로 급격히 쇠락하기 시작했다. 그의 무분별한 폭로전이 군부로까지 향하면서 대중의 여론이 돌아선 것이다. 특히 육군과의 공방을 다룬 청문회가 TV로 생중계되면서, 증인에게 고압적인 태도로 윽박지르는 그의 모습이 전국에 그대로 노출되었다. 이는 그의 권위와 신뢰에 치명타를 입혔다. 당시 육군 측 변호사였던 조지프 웰치가 매카시를 향해 던진 "상원의원, 당신에게는 일말의 품위도 없습니까?(Have you no sense of decency, sir, at long last?)"라는 일갈은 시대의 양심을 일깨우는 외침이 되었다. 결국 그해 12월, 미 상원은 매카시에 대한 견책 결의안을 통과시켰고, 그는 정치적 영향력을 상실한 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매카시즘은 미국 사회에 값비싼 교훈을 남겼다. 국가 안보라는 명분 아래 개인의 자유와 인권이 얼마나 쉽게 짓밟힐 수 있는지를 똑똑히 보여주었다. 또한, 근거 없는 비방과 선동이 사회를 얼마나 극심한 분열과 불신으로 몰고 갈 수 있는지에 대한 생생한 증거가 되었다. 비판적 사고와 건전한 토론이 실종된 사회, 다름을 인정하지 않고 적으로 규정하는 사회가 얼마나 위험한지를 역사는 기록하고 있다. 4. 21세기에 트럼프의 이름으로 부활한 유령 매카시즘은 과거의 역사로만 남아있지 않다. 그 유령은 21세기 미국 정치, 특히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의 집권과 그 이후의 정치 현상인 '트럼피즘(Trumpism)' 속에서 더욱 선명하게 되살아났다. 많은 역사학자와 정치 분석가들은 트럼프의 정치 스타일과 매카시의 수법 사이에 놀라울 정도의 유사성이 존재한다고 지적한다. 첫째, '내부의 적'을 설정하고 공포를 조장하는 선동 방식이다. 매카시가 '정부 내 공산주의자'라는 보이지 않는 적을 설정했다면, 트럼프는 '가짜뉴스 언론', '딥 스테이트(Deep State, 숨은 권력 집단)', '불법 이민자' 등을 적으로 규정하고 지지층의 불안과 분노를 자극했다. 근거가 부족한 주장을 반복적으로 외치며 의심을 사실처럼 둔갑시키는 모습은 매카시의 수법과 판박이다. 둘째, 충성심을 강요하고 반대자를 적으로 돌리는 행태다. 매카시는 자신에게 비판적인 인물들을 '공산주의 동조자'로 몰아세웠다. 트럼프 역시 자신에게 비판적인 언론인을 '국민의 적'으로 칭하고, 당내 반대파를 '이름만 공화당원(RINO, Republican In Name Only)'이라 비난하며 개인에 대한 충성을 노골적으로 요구했다. 이는 건전한 정책 토론 대신, '우리 편'과 '적'을 가르는 이분법적 진영 논리를 강화시켰다. 셋째, '마녀사냥(Witch Hunt)'이라는 용어의 역설적 사용이다. 본래 매카시즘의 부당한 탄압을 비판하기 위해 사용되던 '마녀사냥'이라는 용어를, 트럼프는 자신을 향한 모든 의혹과 수사(러시아 스캔들 특검, 탄핵 조사 등)를 방어하는 수사(修辭)로 전용했다. 이는 자신을 정치적 박해의 희생자로 포장하고, 사법 시스템과 언론의 정당성을 훼손하려는 의도가 깔려 있다. 흥미로운 역사적 연결고리는 매카시의 악명 높은 수석 변호사였던 **로이 콘(Roy Cohn)**이 젊은 시절 트럼프의 멘토이자 변호사였다는 점이다. "절대 잘못을 인정하지 마라, 비난받으면 두 배로 되갚아주라"는 식의 로이 콘의 공격적인 전술은 트럼프의 정치 여정 내내 깊은 영향을 미쳤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결론적으로, 현대 미국 정치에서 나타나는 현상은 매카시즘의 단순한 반복을 넘어, 소셜미디어라는 강력한 확산 도구를 통해 더욱 교묘하고 파급력 있게 진화한 '신(新)매카시즘'의 형태를 띠고 있다. 공포를 이용한 정치, 진실을 경시하는 태도, 그리고 반대 세력에 대한 무자비한 공격은 70여 년의 시차를 두고 미국 민주주의를 다시금 위협하고 있다. 매카시즘의 역사를 올바르게 기억하고 성찰하는 것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한 이유다. 5. 21세기에 되살아난 매카시즘 매카시즘은 과거의 역사로만 남아있지 않다. 오늘날에도 정치적 반대 세력을 악마화하고, 이념적 잣대로 상대를 무차별적으로 공격하는 행태는 '현대판 매카시즘'이라는 이름으로 비판받고 있다. 특히 소셜미디어의 발달은 확인되지 않은 정보와 가짜뉴스를 순식간에 확산시키며 새로운 형태의 마녀사냥을 가능하게 하고 있다. 특정 인물이나 집단을 '반사회적' 혹은 '비애국적'으로 낙인찍고, 합리적인 토론 대신 감정적인 비난을 앞세우는 모습은 매카시즘의 어두운 그림자를 떠올리게 한다. 결론적으로, 매카시즘의 역사는 우리에게 민주주의 사회에서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명확히 보여준다. 그것은 바로 '공포'를 이용한 정치, 그리고 '다름'을 '틀림'으로 규정하는 intolerance(불관용)이다. 건전한 비판과 상호 존중의 자세, 그리고 무엇보다 사실에 기반한 냉철한 판단력이야말로 매카시즘의 유령이 우리 사회를 배회하지 못하게 막는 가장 강력한 무기일 것이다.
    • 기획특집
    • 상식지식
    2025-10-06
  • 60여 년 함께 일군 공동재산 장남에게 넘긴 90대 남편…대법 “이혼 사유”
    60여 년의 혼인 기간 동안 부부가 함께 일군 재산을 아내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장남에게 전부 넘겨준 90대 남편의 행위는 이혼 사유가 된다는 대법원의 최종 판단이 나왔다. 대법원 2부(주심 오경미 대법관)는 지난 4일, 80대 아내 A씨가 90대 남편 B씨를 상대로 낸 이혼 및 재산분할 소송 상고심에서 원고의 청구를 기각한 원심을 파기하고 사건을 서울고법으로 돌려보냈다. 1961년 혼인한 두 사람은 농사일과 식당일 등을 하며 생계를 유지했고, 재산 대부분은 남편 B씨의 명의로 되어 있었다. 갈등은 2022년 부부의 주거지가 산업단지에 편입되면서 받은 보상금 3억 원과 15억 원 상당의 부동산을 남편 B씨가 아내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모두 장남에게 증여하면서 시작됐다. 평생을 바쳐 이룬 공동의 재산이 한순간에 사라지자 A씨는 "회복할 수 없는 파탄"이라며 이혼 소송을 제기했다. 1심과 2심은 "B씨의 증여 행위가 부부관계를 파탄에 이르게 했다고 단정하기 어렵다"며 A씨의 이혼 청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하지만 대법원의 판단은 달랐다. 재판부는 "혼인 중 부부가 협력해 이룩한 재산은 명의와 상관없이 실질적인 공동재산"이라며 "배우자의 기여를 무시하고 일방적으로 재산을 처분해 상대방의 남은 생애에 대한 경제적 기대를 무너뜨린 행위는 혼인을 계속하기 어려운 중대한 사유에 해당한다"고 판시했다. 이번 판결은 부부 일방이 명의를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공동재산을 독단적으로 처분하는 행위에 경종을 울리고, 황혼 이혼에서 재산 형성에 대한 배우자의 실질적 기여도를 폭넓게 인정한 중요한 판례로 남게 될 전망이다.
    • 사회문화
    • 사회
    2025-10-04
  • "내 아이 때린 애들, 똑같이 갚아줘"...또래 폭행 사주한 30대 母, 징역형 법정구속
    자신의 자녀가 또래 학생들에게 폭행당한 것에 앙심을 품고, 다른 미성년자를 동원해 '보복 폭행'을 사주한 30대 친모가 실형을 선고받고 법정에서 구속됐다. 수원지방법원 형사1단독 김유진 판사는 4일, 특수폭행교사 혐의로 기소된 A씨(38·여)에게 징역 10개월을 선고했다고 밝혔다. A씨는 지난 4월, 자신의 중학생 자녀가 동급생인 B군 등 2명으로부터 폭행을 당해 전치 3주의 상해를 입자, 이에 대한 복수를 계획한 것으로 조사됐다. A씨는 평소 알고 지내던 10대 C군에게 "내 아이를 때린 애들을 똑같이 때려달라"며 현금 10만 원을 건네고 폭행을 지시한 혐의를 받는다. C군은 A씨의 지시를 받고 B군 등을 찾아가 실제로 폭력을 행사한 것으로 드러났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피고인은 자녀가 폭행당한 것에 대한 부모로서의 격분한 심정은 이해되나, 국가의 법질서를 무시하고 사적 구제 수단을 택했다"고 지적했다. 이어 "이는 어떠한 이유로도 용납될 수 없으며, 법치주의의 근간을 훼손하는 중대한 범죄"라고 판시했다. 특히 재판부는 "아직 인격이 성숙하지 않은 미성년자를 자신의 복수를 위한 범죄의 도구로 이용했다는 점에서 죄질이 매우 불량하다"며 "피해자들로부터 용서받지 못한 점 등을 고려할 때 실형 선고가 불가피하다"고 양형 이유를 설명했다. 이번 판결은 자녀의 학교폭력 피해에 대해 부모가 법적 절차가 아닌 사적 보복으로 대응할 경우, 그 동기와 상관없이 엄중한 형사 처벌을 받을 수 있다는 경종을 울리고 있다.
    • 사회문화
    • 사회
    2025-10-04
  • 中 '하늘 위 고속도로'…63빌딩 2.5배 높이 세계 최고 다리 위용
    중국 남서부의 험준한 협곡을 가로지르는, 말 그대로 '하늘 위의 고속도로'가 그 위용을 드러내고 있다. 서울 63빌딩(249m)의 약 2.5배, 남산서울타워(해발 479m)보다도 높은 곳에 건설된 이 다리는 중국의 초격차 인프라 건설 기술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로 평가받고 있다. 화제의 다리는 윈난성 쉬안웨이와 구이저우성 수이청을 잇는 베이판장(北盘江) 대교다. 항저우에서 윈난성 루이리까지 이어지는 G56 고속도로의 일부인 이 다리는 강 수면에서 상판까지의 높이가 무려 565m에 달해, 현존하는 다리 중 세계에서 가장 높은 다리로 공식 기록되어 있다. 다리의 총 길이는 1,341m에 이른다. 베이판장 대교의 개통은 단순한 기록 경신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과거 깎아지를 듯한 협곡으로 인해 4시간 이상 걸렸던 두 지역 간의 이동 시간은 단 1시간으로 단축됐다. 이는 중국 정부가 역점적으로 추진하는 '서부 대개발' 전략의 핵심적인 성과로, 물류 혁신과 지역 경제 발전에 획기적인 전기를 마련했다는 평가다. 험준한 지형과 거센 바람 등 최악의 건설 환경을 극복하고 3년여 만에 완공된 이 프로젝트는 중국의 발전된 교량 건설 기술과 엔지니어링 역량을 전 세계에 과시하는 계기가 되었다.
    • 국제/중국
    • 경제
    2025-10-01
  • 퐁네프의 연인들, 꺼져가는 시선 속에서 영원을 꿈꾼 사랑
    프랑스 영화사를 넘어 세계 영화사에 길이 남을 문제작이자 걸작. 레오스 카락스 감독의 '퐁네프의 연인들'은 한 편의 영화가 완성되기까지 겪을 수 있는 모든 고난과 영광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신화와도 같은 작품이다. 1989년 프랑스 혁명 200주년의 불꽃이 파리의 밤하늘을 수놓던 여름, 보수 공사로 폐쇄된 퐁네프 다리 위에서 모든 것을 잃은 두 남녀가 만난다. 시력을 잃어가는 화가 미셸(줄리엣 비노쉬)과 거리의 곡예사 알렉스(드니 라방). 세상의 가장 밑바닥, 버려진 공간에서 시작된 그들의 사랑은 때로는 격렬한 춤처럼, 때로는 서로를 파괴하는 불꽃처럼 타오른다. 단순한 멜로드라마의 범주를 아득히 뛰어넘어, 사랑이라는 감정이 인간을 어디까지 이끌고 갈 수 있는지에 대한 지독하고도 황홀한 영상 시(詩)를 심층적으로 분석한다. 1. 영화사를 뒤흔든 '문제작', 그 신화의 시작 '퐁네프의 연인들'을 이야기하기에 앞서, 이 영화의 전설적인 제작 과정을 먼저 언급해야 한다. 당초 3주간의 실제 퐁네프 다리 촬영 허가를 받았던 제작팀은 배우 드니 라방의 부상으로 촬영이 중단되는 악재를 맞는다. 이후 파리 시의 허가가 더 이상 나지 않자, 레오스 카락스 감독은 파리 외곽에 센 강과 퐁네프 다리, 그리고 주변 건물까지 완벽하게 재현한 거대한 세트장을 짓는 무모한 결정을 내린다. 이로 인해 제작비는 눈덩이처럼 불어났고, 수많은 제작자가 파산하고 교체되는 등 영화는 완성 자체가 불투명한 상황에 놓였다. 3년이 넘는 촬영 기간, 천문학적인 제작비. '퐁네프의 연인들'은 프랑스 영화계의 가장 뜨거운 감자이자 애물단지로 전락했다. 그러나 온갖 역경 끝에 완성된 영화는 그 광적인 제작 과정이 고스란히 스크린에 투영된 듯, 전에 없던 폭발적인 에너지와 처절한 아름다움을 선보이며 전 세계를 놀라게 했다. 영화의 내용은 물론, 그 탄생 과정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서사인 셈이다. 2. 가장 어두운 곳에서 만난 두 영혼, 알렉스와 미셸 영화의 주된 무대인 '퐁네프(Pont-Neuf)'는 '새로운 다리'라는 이름과 달리 파리에서 가장 오래된 다리다. 영화 속 퐁네프는 보수 공사로 인해 일반인의 출입이 통제된, 도시 속의 고립된 섬과 같은 공간이다. 이곳은 화려한 파리의 이면에 가려진, 사회로부터 밀려난 부랑자들의 안식처이자 그들만의 왕국이다. 이곳의 물리적 어둠과 고립은 주인공들이 처한 내면의 절망과 완벽한 공명을 이룬다. 한쪽 눈을 안대로 가린 채 거리를 떠도는 미셸은 유부남 화가와의 사랑에 실패하고, 원인 모를 병으로 점차 세상을 볼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해가는 화가다. 그림을 그리는 이에게 시력의 상실은 곧 사형선고나 다름없다. 모든 희망을 잃은 그녀는 스스로 가장 낮은 곳으로 걸어 들어가 퐁네프에 잠든다. 그곳에서 그녀는 다리의 '주인' 행세를 하는 알렉스를 만난다. 알렉스는 서커스단에서 불을 뿜는 재주를 부리다 사고로 연인을 잃고, 마취제 없이는 잠들지 못하는 불안정한 영혼의 소유자다. 그는 세상과 소통하는 법을 잊은 채 오직 거리에서의 생존 기술만으로 살아가는 인물이다. 가진 것 없고 기댈 곳 없는 두 사람은 서로의 상처를 본능적으로 알아보고, 위태로운 동거를 시작한다. 그들의 관계는 달콤한 속삭임이 아닌, 투박한 몸짓과 거친 욕설, 그리고 서로의 상처를 핥아주는 동물적인 교감으로 이루어진다. 3. 감독 레오스 카락스, 광기를 스크린에 새기다 '퐁네프의 연인들'은 감독 레오스 카락스의 영화 세계를 이해하지 않고서는 온전히 받아들이기 어렵다. '나쁜 피', '소년, 소녀를 만나다' 등으로 이어지는 그의 초기작들에서부터 그는 언제나 소외된 청춘의 격정적인 사랑과 고독을 탐구해왔다. 특히 그의 영화적 분신(Alter ego)이라 할 수 있는 배우 드니 라방의 동물적인 몸짓과 에너지는 카락스 영화의 핵심적인 상징이다. 카락스는 현실에 발을 딛고 있으면서도 끊임없이 현실을 뛰어넘는 초현실적인 이미지를 창조해낸다. 그는 인물의 내면을 대사가 아닌 이미지와 음악, 그리고 몸짓으로 폭발시킨다. '퐁네프의 연인들'에서 이러한 그의 연출 스타일은 정점에 달한다. 사랑의 환희와 광기를 표현하기 위해 그는 실제 파리의 밤하늘을 불꽃으로 뒤덮고, 센 강 위에서 배우들이 수상스키를 타게 하는 장관을 연출한다. 이는 단순한 볼거리를 넘어, 인물의 감정이 현실의 물리적 한계를 초월하는 순간을 포착하려는 감독의 집념이 빚어낸 결과물이다. 4. 사랑이라는 이름의 광기, 그 눈부신 이미지의 향연 이 영화를 불멸의 작품으로 만든 것은 단연코 스크린을 가득 채우는 압도적인 이미지들이다. 알렉스의 사랑은 순수하지만 이기적이고, 열정적이지만 파괴적이다. 그는 미셸의 눈을 멀게 하는 병을 고쳐주고 싶은 마음에 한밤중 파리 시내를 불태우려 하고, 그녀를 찾는 가족의 포스터를 발견하자 미셸이 자신을 떠날까 두려워 포스터를 붙이는 인부를 살해하기까지 한다. 이 맹목적인 사랑의 광기는 영화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장면 중 하나로 꼽히는 '센 강 불꽃놀이' 시퀀스에서 절정을 맞는다. 프랑스 혁명 200주년을 기념하는 불꽃이 밤하늘을 가득 채우자, 훔친 경찰 보트를 탄 알렉스는 미셸을 이끌고 센 강 위에서 광란의 수상스키를 즐긴다. 스트라빈스키의 음악과 함께 펼쳐지는 이 장면은 절망적인 현실을 잠시 잊고 순간의 환희에 몸을 내던진 두 연인의 감정을 스크린 밖으로까지 터뜨려 놓는다. 불과 물, 빛과 어둠, 환희와 죽음의 이미지가 충돌하며 만들어내는 이 황홀경은, 사랑이 주는 해방과 구원의 순간을 완벽하게 포착한 영화적 기적이라 할 수 있다. 또한,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에 맞춰 다리 위에서 격렬하게 춤을 추는 장면은, 그 어떤 화려한 무대보다도 순수하고 절실한 생의 에너지를 느끼게 한다. 5. '본다'는 것의 실존적 의미와 예술가의 운명 영화는 '본다'는 행위에 대해 끊임없이 철학적인 질문을 던진다. 미셸은 화가로서의 생명과도 같은 시력을 잃어가지만, 역설적으로 알렉스를 통해 세상의 이면과 사랑의 본질을 '보게' 된다. 문명화된 세상의 질서와 아름다움이 아닌, 거리의 소음, 추위, 배고픔, 그리고 그 속에서 피어나는 날것 그대로의 생명력을 온몸으로 체험하며 새로운 '시각'을 얻는 것이다. 반면, 모든 것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볼 수 있는 알렉스는 오직 미셸만을 바라보는 맹목적인 사랑에 빠져 세상을 외면한다. 그에게 미셸은 자신의 공허한 존재를 확인시켜주는 유일한 거울이자 세상 그 자체다. 그렇기에 그는 미셸이 세상을 다시 '보게' 되는 것을, 즉 자신을 떠나 원래의 세계로 돌아가는 것을 죽음처럼 두려워한다. '본다'는 것은 이 영화에서 단순한 감각을 넘어, 관계의 지속과 소멸, 그리고 존재의 의미와 직결되는 실존적 행위가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은 계속된다 결국 수술로 시력을 되찾은 미셸은 알렉스를 떠나 화가로서의 삶으로 돌아가지만, 3년 뒤 크리스마스이브에 운명처럼 퐁네프에서 재회한다. 모든 오해와 상처를 뒤로하고 서로의 사랑을 확인한 두 사람은 차가운 센 강으로 함께 몸을 던진다. 동반자살처럼 보였던 이 행위는 그러나, 과거의 자신들을 모두 강물에 장사 지내고 새롭게 태어나려는 정화의 의식에 가깝다. 마침내 모래를 싣고 바다로 향하는 작은 바지선에 의해 구조된 그들. "네가 나를 사랑한다면, '하늘이 하얗다'고 말해줘"라는 미셸의 말에 알렉스가 "하늘은 하얗다"고 답하며 영화는 끝을 맺는다. 현실의 하늘색이 무엇이든, '우리의 사랑'이라는 진실 앞에서는 세상의 모든 명제가 새롭게 정의될 수 있음을 선언하는 것이다. '퐁네프의 연인들'은 결코 편안한 로맨스 영화가 아니다. 거칠고 불편하며, 때로는 주인공들의 기행에 고개를 젓게 만든다. 하지만 영화는 상식과 이성의 틀을 벗어던진 사랑의 순수한 에너지가 얼마나 눈부시고 파괴적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얼마나 절실한 구원이 될 수 있는지를 온몸으로 증명한다. 세월이 흘러 다시 만난 이 영화는 여전히 우리에게 묻는다. 당신은 이들처럼 모든 것을 내던지고 사랑해 본 적이 있는가. 당신의 삶에 이들처럼 찬란한 불꽃놀이의 순간이 있었는가. 그 묵직한 질문 앞에 우리는 잠시 말을 잃고, 파리의 낡은 다리 위에서 영원을 꿈꿨던 두 연인의 모습을 오래도록 기억하게 될 것이다.
    • 엔터테인
    • 영화
    2025-09-29
비밀번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