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5-08-3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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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념의 장벽 '북방정책'의 화룡점정, 한중수교
    한중수교는 냉전 시대의 종식을 알리는 상징적인 사건이자, 이후 30여 년간 동북아 정세와 대한민국의 운명을 근본적으로 바꿔놓은 '외교 혁명'이었습니다. 1992년 8월 24일 오전 10시, 중국 베이징의 조어대(釣魚台) 국빈관. 대한민국의 이상옥 외무부 장관과 중화인민공화국의 첸지천(錢其琛) 외교부장이 수교 공동성명서에 서명한 뒤 굳은 악수를 나눴다. TV 생중계를 통해 전 세계로 송출된 이 짧은 순간은, 40여 년간 이어진 동북아 냉전 체제의 견고한 벽이 무너져 내리는 극적인 장면이었다. 불과 42년 전, 한반도에서 서로를 향해 총부리를 겨눴던 '적국'이 모든 이념의 장벽을 넘어 공식적인 외교 관계를 맺은 것이다. 노태우 정부 '북방정책'의 가장 찬란한 성공으로 기록된 한중수교. 그러나 이 역사적인 악수의 이면에는 오랜 동맹이었던 대만과의 가슴 아픈 단교, 혈맹 북한의 거센 반발, 그리고 양국 외교관들이 펼쳤던 첩보전을 방불케 하는 치열한 비밀 협상이 숨어 있었다. 제1부: 얼어붙은 장벽, "죽의 장막" 너머의 두 나라 한국전쟁 이후, 대한민국과 중화인민공화국은 서로를 인정하지 않는 적대 관계였다. 우리는 중국을 '중공(中共)'이라 부르며 공산주의 팽창의 선봉으로 여겼고, 중국은 우리를 '남조선'이라 칭하며 미 제국주의의 괴뢰 정권으로 간주했다. 서울에는 중화민국, 즉 대만의 대사관이 있었고, 양국은 반공이라는 공동의 가치를 기반으로 끈끈한 우방 관계를 유지했다. '죽의 장막' 너머의 두 나라는 수십 년간 어떠한 공식적인 교류도 없이 서로를 향한 불신과 적대감만을 쌓아갔다. 이 얼어붙은 관계에 첫 균열이 생긴 것은 1983년 5월, 예상치 못한 사건 때문이었다. 중국 민항기가 공중 납치되어 춘천의 미군기지에 불시착한 것이다. 이 사건을 처리하기 위해 중국 민항총국장이 공식 직함을 들고 서울을 방문했고, 대한민국 외무부와 중국 정부 대표단은 '대한민국'과 '중화인민공화국'이라는 정식 국호를 사용하며 9일간의 협상을 벌였다. 비록 외교적 해프닝이었지만, 이는 양국 정부가 서로를 실체로 인정한 최초의 공식 접촉으로 역사에 기록되었다. 제2부: 실리의 바람이 불다 - 노태우의 북방정책 1988년 서울 올림픽은 냉전의 벽을 허무는 기폭제가 되었다. '화합과 전진'을 내세운 올림픽에는 중국, 소련을 비롯한 대다수의 공산권 국가들이 참가했다. 이를 계기로 노태우 정부는 이념을 넘어 실리를 추구하는 '북방정책'을 본격적으로 추진했다. 서독이 '동방정책'으로 동독 및 동구권과 교류하며 통일의 기반을 닦았듯, 우리도 북한의 오랜 동맹인 중국, 소련과 관계를 개선해 한반도의 평화를 정착시키고 새로운 경제 영토를 개척하자는 대담한 구상이었다. 이러한 우리의 필요와 덩샤오핑의 '개혁·개방' 노선을 걷던 중국의 이해관계가 정확히 맞아떨어졌다. 한국의 자본과 기술, 그리고 경제 발전 경험은 중국에게 매력적인 협력 파트너의 조건이었다. 1991년, 양국은 무역대표부를 상호 설치하며 사실상의 대사관 업무를 시작했다. 이념의 시대가 가고, 국익과 경제가 외교의 최우선 순위가 되는 새로운 시대가 열리고 있었던 것이다. 제3부: 첩보전을 방불케 한 비밀 협상 본격적인 수교 협상은 철저한 보안 속에서 진행되었다. 가장 큰 난관은 단연 '대만 문제'였다. 중국은 '하나의 중국' 원칙을 내세우며, 한국이 대만과 단교하고 중화인민공화국을 유일한 합법 정부로 인정할 것을 수교의 전제 조건으로 요구했다. 오랜 우방을 우리 손으로 내쳐야 하는 것은 외교적으로나 인간적으로나 고통스러운 결정이었다. 당시 정부는 대만과의 관계를 고려해 '선 수교, 후 단교'를 희망했지만, 중국의 입장은 단호했다. 결국 우리 정부는 대만 측에 수교 발표 불과 24시간 전에 단교 방침을 통보하는, 외교적으로는 비정한 방식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이 소식을 들은 리덩후이 당시 대만 총통은 "한국은 신의 없는 나라"라며 격분했고, 타이베이의 한국 대사관 앞에서는 연일 격렬한 시위가 벌어졌다. 또 다른 난관은 '북한 문제'였다. 수십 년간 '순치보거(脣齒輔車, 입술과 이, 수레와 바퀴처럼 뗄 수 없는 관계)'를 맺어온 북한을 설득하는 것은 중국의 몫이었다. 첸지천 외교부장은 수교 발표 직전 평양을 극비리에 방문하여 김일성 주석에게 "중국도 국익을 위해 남조선과 수교할 수밖에 없다"고 통보했다. 김일성은 "배신행위"라며 격노했지만, 이미 기울어진 대세를 되돌릴 수는 없었다. 북한은 이후 한동안 중국을 향해 노골적인 비난을 쏟아내며 깊은 배신감을 드러냈다. 제4부 결론: 동반자인가, 경쟁자인가? 30년의 동상이몽(同床異夢) 1992년의 역사적인 악수 이후, 한중 관계는 폭발적인 성장을 거듭했다. 수교 당시 63억 달러에 불과했던 교역액은 30년 만에 3,600억 달러를 돌파하며 50배 이상 증가했다. 중국은 우리의 최대 교역국이 되었고, '한류(韓流)'는 중국 대륙을 휩쓸며 양국 국민의 마음을 가깝게 만들었다. 하지만 지난 30여 년의 여정이 장밋빛이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사드(THAAD) 배치에 따른 중국의 한한령(限韓令) 보복, 동북공정과 같은 역사 왜곡 문제, 그리고 반도체 등 첨단 산업 분야에서의 치열한 경쟁은 양국 관계가 더 이상 '상호보완적'이 아닌 '경쟁적' 관계로 변화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한때 같아 보였던 양국의 꿈은 이제 서로 다른 방향을 향하고 있다는 '동상이몽'의 현실을 마주하게 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92년의 결단이 20세기 말 한국 외교사에서 가장 성공적인 선택 중 하나였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한중수교는 이념의 굴레를 벗어던지고 국익을 위해 과감한 결단을 내릴 때, 어떻게 새로운 길을 열 수 있는지를 보여준 생생한 증거다. 파트너이자 경쟁자로서 복잡한 관계를 이어가고 있는 오늘, 30여 년 전 냉전의 벽을 넘었던 그 지혜와 용기가 다시 한번 필요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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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8-30
  • 조선의 3일 천하를 짓밟은 야심가 위안스카이
    갑신정변은 한국 근대사에서 가장 극적인 실패이자, 가장 중요한 전환점 중 하나이다. 특히 이 사건을 통해 역사의 무대에 화려하게 등장한 '위안스카이'라는 인물에 초점을 맞추면, 단순한 국내 정변을 넘어 동아시아의 운명을 건 한중일 삼국의 각축전이라는 더 큰 그림을 볼 수 있을 것이다. 1884년 12월 4일, 한성(서울)의 밤은 근대의 불빛으로 그 어느 때보다 밝았다. 신식 우편제도를 관장할 '우정총국'의 개국 축하연이 열리고 있었다. 서양식 연회복을 입은 외교관들과 조선의 고위 관료들이 어울린 이 화려한 연회는, 그러나 곧 피비린내 나는 역사의 현장으로 돌변한다. 김옥균을 필두로 한 급진개화파가 조선의 완전한 자주독립과 근대화를 목표로 일으킨 '갑신정변'의 서막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혁명은 단 3일 만에 처참한 실패로 끝나고 만다. 이 '3일 천하'를 무력으로 진압하고 역사의 전면에 등장한 인물, 그는 조선의 개혁가가 아닌 스물다섯 살의 야심에 찬 청나라 군인, 위안스카이(袁世凱)였다. 이것은 좌절된 혁명의 기록이자, 한 개인의 결단이 어떻게 한 나라의 운명을 바꾸고 제국의 향방을 결정했는지에 대한 이야기다. 제1부: "오늘 밤, 거사를 일으킵시다!" - 불타는 우정총국 1880년대 초반의 조선은 폭풍전야였다. 서구 열강과 일본의 개항 압력 속에서, 나라는 두 개의 길을 두고 갈등했다. 청나라와의 전통적인 사대 관계를 유지하며 점진적 개혁을 추구하자는 민씨 척족 중심의 '사대당(수구파)'과, 일본의 메이지 유신을 모델로 삼아 급진적인 개혁을 통해 완전한 독립을 이루자는 김옥균, 박영효 등 '개화당(독립파)'의 대립이 그것이다. 이러한 갈등은 1882년 '임오군란' 이후 더욱 첨예해졌다. 군란을 진압한다는 명분으로 청나라와 일본의 군대가 모두 한성에 주둔하게 된 것이다. 특히 청나라는 3천 명의 군대를 주둔시키며 조선의 내정에 깊숙이 개입했고, 그 선봉에 선 인물이 바로 위안스카이였다. 김옥균과 개화파는 이러한 상황을 타개할 기회만을 엿보고 있었다. 마침 청나라가 베트남을 둘러싼 '청프전쟁'에 발이 묶여 조선에 주둔하던 병력의 절반을 철수시키자, 이들은 '바로 지금'이 기회라고 판단했다. 일본 공사 다케조에 신이치로로부터 "일본군 150명이 당신들을 돕겠다"는 약속까지 받아낸 이들은, 우정총국 개국 축하연을 거사의 신호탄으로 삼았다. 연회장 밖에서 피어오른 불길을 신호로, 개화파 행동대원들은 수구파 핵심 인물들을 차례로 제거하고, 급히 궁으로 달려가 고종을 확보하는 데 성공한다. 제2부: 짧았던 혁명의 꿈, 14개조 개혁안 고종의 신변을 확보한 개화파는 즉시 새로운 내각을 발표하고, 자신들의 꿈이 담긴 '14개조 개혁 정강'을 선포했다. 그 내용은 혁명적이었다. "청나라에 대한 조공 허례를 폐지한다(제1조), 문벌을 폐지하여 인민 평등의 권리를 세운다(제2조), 조세 제도를 개혁하여 국가 재정을 튼튼히 한다(제4조)..." 이는 수백 년간 이어져 온 청나라와의 사대 관계를 청산하고, 신분제를 철폐하며, 근대적인 재정 및 행정 시스템을 갖춘 완전한 독립 국가를 만들겠다는 청사진이었다. 조선 역사상 최초로 '근대 국민 국가'의 비전을 제시한 순간이었다. 일본 공사관의 호위를 받으며 경복궁에서 경우궁으로 거처를 옮긴 고종과 개화파 내각. 그들의 혁명은 일단 성공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불안한 시간은 계속 흘렀다. 한성 내에는 여전히 1,500명의 청나라 군대가 남아있었고, 그들의 지휘관 위안스카이는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수구파 세력은 위안스카이에게 달려가 "개화당과 일본이 왕을 납치했으니 구원해달라"고 눈물로 호소했다. 이제 모든 것은 스물다섯 청년 장교의 손에 달려 있었다. 제3부: 야심가의 결단, "조선을 구원하라" 위안스카이는 혼란에 빠졌다. 그는 조선의 정변 소식을 듣고 즉시 본국에 전보를 쳤지만, 답신을 기다릴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외교적 관례상 타국의 궁에 군대를 투입하는 것은 전쟁을 의미했다. 하지만 그는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만약 이 정변이 성공하여 조선에 친일 정권이 들어선다면, 청나라가 수백 년간 누려온 종주권은 물거품이 되고 동아시아의 판도는 일본에게 넘어갈 것이라는 사실을. 그는 결단을 내렸다. "왕이 위험에 처했으니 구출한다"는 명분을 내걸고, 휘하의 청군 1,500명을 이끌고 창덕궁으로 진격했다. 이는 개화파를 호위하던 일본군 150명의 10배에 달하는 압도적인 병력이었다. 12월 6일 오후, 위안스카이의 군대는 궁궐 담을 넘어 총공격을 개시했다. 결과는 명백했다. 중과부적이었던 일본군은 얼마 버티지 못하고 공사관으로 퇴각했고, 개화파 지도자들은 뿔뿔이 흩어져 망명길에 올라야 했다. 김옥균, 박영효 등은 인천을 통해 일본으로 탈출했지만, 홍영식, 박영교 등은 미처 피하지 못하고 참살당했다. 우정총국의 불꽃으로 시작된 혁명은, 위안스카이의 총칼 아래 단 3일 만에 막을 내렸다. 제4부 결론: 실패한 혁명, 그러나 역사는 시작되었다 갑신정변의 실패로 조선은 더욱 깊은 청나라의 그늘 아래로 들어갔다. 위안스카이는 정변을 진압한 공로로 조선의 국정을 총괄하는 '조선 주재 총리교섭통상사의'에 임명되어, 이후 10년간 조선의 왕 위에 군림하는 실질적인 통치자로 행세했다. 이 사건은 그의 정치적 야망에 날개를 달아준 첫 번째 무대였으며, 훗날 그가 청나라를 무너뜨리고 중화민국 대총통의 자리에 오르는 기나긴 여정의 출발점이 되었다. 비록 실패로 끝났지만, 갑신정변은 조선 역사에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겼다. 그것은 낡은 질서에 맞서 자주적인 근대 국가를 세우려 했던 최초의 정치 혁명이었으며, 그들이 내걸었던 14개조 개혁안은 이후 갑오개혁과 독립협회 활동의 사상적 뿌리가 되었다. 3일 천하를 짓밟은 위안스카이의 총성은 모든 것을 끝낸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것은 끝이 아니라, 조선의 독립을 둘러싼 청나라와 일본의 본격적인 대결, 즉 10년 뒤 발발할 청일전쟁의 서막을 알리는 신호탄이기도 했다. 실패한 혁명은 그렇게 또 다른 역사의 문을 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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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8-30
  • 열하일기, 250년 전 한 선비의 뜨거운 중국 리포트
    조선 최고의 문장가이자 실학사상을 집대성한 연암(燕巖) 박지원의 '열하일기'는 단순한 여행기를 넘어, 한 시대의 통념에 맞선 위대한 지식인의 고뇌와 성찰이 담긴 역작이다. 그의 여정을 따라가며 250년 전 한 선비가 던진 날카로운 질문의 현재적 의미를 짚어본다. 1780년 조선. 나라는 성리학이라는 단단한 이념의 성벽 안에 갇혀 있었다. 지식인들은 청나라를 여전히 '오랑캐의 나라'라 멸시하며, 망해버린 명나라에 대한 의리를 지키는 것이 세상의 유일한 진리라 믿었다. '북벌(北伐)'의 구호는 공허한 메아리가 된 지 오래였지만, 청나라를 배우자는 주장은 감히 입에 담을 수 없는 불경(不敬)으로 여겨지던 시대였다. 바로 그해 여름, 조선 최고의 문장가로 이름났으나 주류 사회에 편입되지 못했던 아웃사이더, 연암 박지원(1737~1805)이 청나라 건륭제의 칠순 잔치 축하 사절단의 일원으로 압록강을 건넜다. 그리고 그는 5개월간의 여정에서 보고 겪은 모든 것을 담아, 조선 사회를 발칵 뒤집어 놓은 한 권의 '현장 리포트'를 써 내려갔다. 바로 '열하일기(熱河日記)'다. 이것은 단순한 여행기가 아닌, 편견을 깨고 실용을 외친 한 위대한 지식인의 혁명적 제안서였다. 제1부: 편견의 땅에서 미지의 땅으로 박지원이 여행을 떠나던 18세기 후반의 조선은 '소중화(小中華)', 즉 작은 중국이라는 자부심이 지배하던 사회였다. 임진왜란 때 우리를 도왔던 명나라가 만주족의 청나라에 멸망하자, 이제 중화문명의 정통성은 오직 조선에만 남았다는 선민의식이 팽배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청나라 수도 연경(북경)을 방문하는 사신단의 마음은 복잡했다. 공식적으로는 황제의 생일을 축하하는 사절이었지만, 내심으로는 '오랑캐'의 땅을 밟는다는 치욕과 경멸감을 감추지 못했다. 하지만 연암 박지원은 달랐다. 그는 44세가 되도록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고, 홍대용, 이덕무, 박제가 등 젊은 실학자들과 교류하며 세상을 다른 눈으로 보는 법을 익혔다. 그에게 이번 여정은 마지못해 떠나는 길이 아니라, 조선이 나아갈 길을 찾기 위한 절호의 기회였다. 그는 한양을 출발해 압록강을 건너고, 요동 벌판을 지나 연경에 도착한 뒤, 황제의 여름 별궁이 있는 열하(熱河, 현재의 청더시)까지 향하는 1천여 킬로미터의 대장정에 오른다. 그리고 그의 눈은 궁궐의 화려함이 아닌, 청나라 사람들의 평범한 일상과 그 속에 담긴 실용의 지혜를 향하고 있었다. 제2부: 벽돌 한 장, 수레 하나에 담긴 충격 '열하일기'가 위대한 이유는 거대한 담론이 아닌, 아주 작은 관찰에서 시작하기 때문이다. 박지원이 받은 첫 번째 충격은 바로 '벽돌'이었다. 흙과 짚으로 집을 짓고 나무로 다리를 놓던 조선과 달리, 청나라는 집도, 성벽도, 다리도 모두 벽돌로 만들었다. 그는 벽돌이 운반과 보관이 쉽고, 견고하며, 제작 기술만 보급되면 어디서든 쓸 수 있는 실용적인 건축 자재임을 간파했다. 그는 조선이 쓸데없는 명분에 사로잡혀 실용을 놓치고 있음을 통탄했다. 두 번째 충격은 '수레'였다. 청나라의 넓은 길 위로는 수많은 수레가 쉴 새 없이 오가며 사람과 물자를 실어 날랐다. 잘 닦인 도로망과 규격화된 수레가 유통 경제의 근간을 이루고 있었던 것이다. 반면 조선의 수레는 좁은 길 때문에 제대로 쓰이지도 못하고, 바퀴의 폭마저 제각각이라 효율이 떨어졌다. 박지원은 "수레를 이용하지 않는 나라는 망할 것이다"라고 단언하며, 유통과 상업을 천시하는 조선의 현실을 날카롭게 비판했다. 그는 단순히 보고 감탄하는 데 그치지 않았다. 직접 청나라 학자, 상인, 농민들과 필담을 나누며 그들의 개방적인 사고방식과 실용적인 지식에 감탄했다. 그에게 청나라는 더 이상 오랑캐의 나라가 아니라, 조선이 반드시 배워야 할 '선진 기술과 시스템'을 갖춘 나라였다. 이 모든 깨달음이 실학사상의 핵심인 '이용후생(利用厚生, 도구를 편리하게 사용하여 백성의 삶을 풍요롭게 한다)'으로 집약되었다. 제3부: "법고창신", 열하에서 조선의 미래를 보다 열하에서 돌아온 박지원은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조선 사회에 던질 메시지를 정리했다. 그것이 바로 '법고창신(法古創新)' 정신이다. 이는 '옛것을 본받되, 그것을 변화시켜 새로운 것을 만든다'는 뜻이다. 그가 말하는 '옛것(古)'은 맹목적인 명나라 숭배가 아니었다. 오히려 청나라의 발전된 현실 그 자체가 조선이 본받아야 할 '본보기(古)'였다. 그는 청나라의 벽돌, 수레, 시장, 화폐 시스템 등 실용적인 제도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조선의 현실에 맞게 새롭게 적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것은 "오랑캐에게 배울 것은 없다"는 조선 지배층의 통념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혁명적인 발상이었다. 당연히 그의 주장은 엄청난 반발에 부딪혔다. 당시 국왕이었던 정조는 박지원의 문체가 순정하지 못하고 저속하다며 '문체반정(文體反正)'을 통해 그의 글을 공개적으로 비판하고 반성문을 쓰게 했다. 그의 파격적인 생각과 표현 방식이 조선의 전통적 질서를 흔들 수 있다고 염려했기 때문이다. '열하일기'는 금서(禁書)처럼 취급받으며 한동안 양지에서 논의될 수 없었다. 제4부 결론: 250년 전의 질문, "우리의 현실은 어떠한가?" 비록 당대에는 혹독한 비판을 받았지만, '열하일기'는 암암리에 젊은 지식인들 사이에서 퍼져나가며 실학사상의 '교과서'가 되었다. 추사 김정희를 비롯한 후대의 개혁 사상가들은 '열하일기'를 통해 세상을 보는 새로운 눈을 떴다. 박지원은 조선 최초의 '중국 통신원'으로서, 편견 없이 현실을 직시하고 그 본질을 꿰뚫어 자국 사회에 필요한 대안을 제시하는 저널리스트의 역할을 완벽하게 수행했던 것이다. 250년이 지난 오늘날, '열하일기'는 우리에게 묻는다. 우리는 과연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고 있는가? 익숙한 편견과 낡은 명분에 사로잡혀, 우리가 마땅히 배워야 할 가치들을 외면하고 있지는 않은가? 급변하는 세계 속에서 박지원의 "현실을 직시하고 실용을 추구하라"는 외침은 여전히 유효한, 아니 어쩌면 더욱 절실한 화두로 우리 곁에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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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8-30
  • 별 헤는 밤...북간도의 고뇌, 윤동주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슴 한편에 품고 있을 이 문장은, 단순한 시구를 넘어 한 시대의 양심과 순결한 영혼의 무게를 담고 있다. 시인 윤동주. 그는 스물일곱의 짧은 생을 살다 갔지만, 그의 시는 암흑의 시대를 건너와 오늘날까지도 우리에게 '부끄러움'의 의미를 묻는다. 그의 문학적 자양분이 된 고향, 그의 시에 등장하는 언덕과 강, 별과 십자가의 실제 무대였던 곳. 바로 중국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에 위치한 북간도(北間島)다. 일제의 서슬 퍼런 감시 속에서도 우리말과 민족 교육의 불꽃을 지폈던 그 땅, 용정(龍井)으로 떠나 시인의 마지막 발자취를 따라가 본다. 제1부: 용정(龍井), 시인의 고향을 걷다 두만강 너머 만주 땅에 우리 민족이 터를 잡은 디아스포라의 땅, 북간도. 그 중심지인 용정(과거 지명 간도)은 윤동주의 문학 세계를 이해하기 위한 첫걸음이다. 현재는 '룽징(龙井)'이라 불리는 이 도시의 이름은 시내 중심에 있는 한 우물에서 유래했다. 과거 이 우물가에서 두 명의 조선인이 책을 읽는 것을 보고 고을 원님이 감탄하여 우물에 '용정(龍井)'이라는 이름을 붙였다는 이야기는, 이곳이 일찍부터 배움과 문화의 중심지였음을 짐작게 한다. 윤동주는 이 용정에서도 '동방을 밝힌다'는 뜻을 지닌 명동촌(明東村)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그의 외조부이자 민족 교육자였던 김약연이 세운 이 마을은, 단순한 촌락이 아니었다. 교회와 학교가 마을의 중심이었고, 독립운동가들이 드나들며 민족의 앞날을 논하던 저항의 심장부였다. 현재 복원된 윤동주 생가는 명동촌 언덕 위에 소박하게 자리 잡고 있다. 생가에 올라 그가 매일 보았을 해란강(海蘭江)과 드넓은 만주 벌판을 바라보면,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라 노래했던 그의 시 '향수'가 절로 떠오른다. 이곳의 모든 풍경이 그의 시의 일부였던 것이다. 제2부: 별과 십자가, 고뇌하는 영혼 윤동주의 시 세계를 관통하는 두 가지 핵심 상징은 '부끄러움'과 '자기성찰'이다. 이러한 정서는 그가 다녔던 은진중학교 시절에 싹텄다. 당시 은진중학교는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우리말과 역사를 가르치다 여러 차례 탄압을 받은 민족학교였다. 그는 이곳에서 평생의 동지이자 라이벌이었던 고종사촌 송몽규를 만난다. 적극적이고 행동가였던 송몽규와 달리, 내성적이고 사색적이었던 윤동주는 독립운동에 직접 나서지 못하고 시를 쓰는 자신을 늘 부끄러워했다. 이러한 고뇌는 그의 대표작들에 고스란히 녹아있다. "별 하나에 추억과/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쓸쓸함과..."로 시작하는 **'별 헤는 밤'**은 그가 서울 연희전문학교 시절, 고향 북간도를 그리며 쓴 시다. 시에 등장하는 '패, 경, 옥' 등은 명동촌에서 함께 자란 누이와 친구들의 이름이다. 고향의 밤하늘을 수놓았을 별들을 헤아리며, 그는 시대의 어둠 속에서 자신이 가야 할 길을 고뇌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고 추억처럼 사나이가 있습니다." ('자화상') 자신을 비춰보는 매개체인 우물은 용정의 상징이자, 끝없는 자기성찰의 도구였다. 그는 우물 속 사나이가 미워졌다가, 가여워졌다가, 다시 그리워하며 끊임없이 자신과 화해하고 또 갈등했다. "십자가가 허락된다면/ 모가지를 드리우고/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어두워가는 하늘 밑에/ 조용히 흘리겠습니다." ('십자가') 독실한 기독교 집안에서 자란 그에게 명동교회의 십자가는 희생의 상징이었다. 그는 시대의 아픔을 외면할 수 없어 괴로워하며, 자신에게 주어진 길이 십자가의 길이라면 기꺼이 감당하겠다는 비장한 각오를 시로 남겼다. 제3부: 시대의 비극, 두 청년의 엇갈린 길 시를 통한 저항을 꿈꿨던 윤동주와, 직접 행동을 통해 독립을 쟁취하고자 했던 송몽규. 두 청년은 각자의 방식으로 시대와 맞섰다. 더 넓은 학문을 배우고자 일본 유학길에 오른 것은 그들의 운명을 가른 비극적 선택이었다. 나라를 잃은 청년에게 일본 유학은 '적의 심장부'로 들어가는 것과 같았고, 이는 더 큰 고뇌와 부끄러움의 근원이 되었다. 결국 두 사람은 1943년, 독립운동을 꾀했다는 혐의로 일본 경찰에 체포된다. 죄명은 '치안유지법 위반'. 송몽규는 적극적인 독립운동 계획이 드러나 징역 2년을 선고받았고, 윤동주는 별다른 혐의가 없었음에도 송몽규와 가깝다는 이유만으로 같은 형량을 선고받았다. 그들이 수감된 곳은 악명 높은 후쿠오카 형무소. 이곳에서 두 청년은 정체불명의 주사를 맞으며 생체 실험의 대상이 되었을 것이라는 의혹이 짙다. 결국 1945년 2월 16일, 윤동주는 "알 수 없는 주사를 맞은 뒤 이상해졌다"는 옥중 동료의 증언을 마지막으로 차가운 감방에서 숨을 거둔다. 송몽규 역시 그의 뒤를 이어 3월 7일에 옥사했다. 조국 광복을 불과 5~6개월 앞둔 시점이었다. 제4부 결론: 왜 우리는 여전히 윤동주를 부르는가 윤동주의 시는 그의 사후, 친구였던 정병욱이 보관하고 있던 원고 덕분에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라는 제목으로 세상에 나올 수 있었다. 만약 이 유고 시집이 없었다면, 우리는 영원히 이 위대한 시인을 몰랐을지도 모른다. 오늘날 우리는 왜 그토록 윤동주에 열광하는가? 그것은 그의 시가 단 한 순간도 순결함을 잃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불의한 시대에 행동하지 못하는 자신을 끊임없이 부끄러워하고 성찰했던 그의 정직한 목소리는, 온갖 불의와 타협에 무뎌진 현대인들의 양심을 깨운다. 그는 영웅이 되려 하지 않았지만, 그의 삶과 시 자체가 시대의 어둠을 밝히는 등불이 되었다. 북간도 명동촌의 언덕 위에 서면, 지금도 '잎새에 이는 바람'에 괴로워하던 한 청년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그가 남긴 시들은 단순한 문학을 넘어, 우리가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를 묻는 영원한 질문으로 남아있다.
    • 기획특집
    • 역사산책
    2025-08-30
  • 1909년 하얼빈의 총성, 이토를 쏘고 동양 평화를 꿈꾸다
    독립을 향한 한 개인의 의지가 어떻게 역사의 물줄기를 바꾸려 했는지, 그리고 그가 남긴 평화의 메시지가 오늘날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가? 하얼빈 역 현장에는 플랫폼에 표식이 되어 있는데 그날의 공기를 느끼며 숙인 머리를 쉽게 들지 못했다. 2025년 현재, 하루 수만 명이 오가는 중국 하얼빈역. 유라시아 대륙을 향해 뻗어 나가는 고속철의 기적 소리가 쉴 새 없이 울리는 이곳은 현대 중국의 역동적인 발전을 상징하는 공간이다. 하지만 시간을 거슬러 1909년 10월 26일의 차가운 아침, 이곳 플랫폼에서는 단 세 발의 총성이 동아시아의 역사를 뒤흔들었다. 대한의군 참모중장 안중근이 쏜 총탄이 ‘조선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의 심장을 꿰뚫은 것이다. 오는 10월 26일로 116주년을 맞는 이 의거는 단순히 한 개인의 복수나 저항이 아니었다. 법정에서도, 차가운 감옥의 독방에서도 조국의 독립과 나아가 동양의 항구적인 평화를 외쳤던 한 선각자의 위대한 투쟁이었다. 116년 전 그날의 하얼빈으로 돌아가, 짧게 타올랐으나 영원히 기억될 그의 마지막 여정을 따라가 본다. 제1부: 운명의 날, 하얼빈역 9시 30분 1909년 10월 26일 오전 9시. 러시아 재무대신 코코프체프와의 회담을 위해 이토 히로부미를 태운 특별열차가 하얼빈역 플랫폼으로 서서히 들어왔다. 러시아군 의장대의 환영 연주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이토는 의기양양하게 열차에서 내렸다. 바로 그 순간, 환영 인파 뒤편에 서 있던 대한의군 참모중장 안중근은 품속에 숨겨두었던 브라우닝 권총을 꺼내 들었다. 며칠 전부터 '단지동맹(斷指同盟)' 동지들과 함께 이곳에서 잠복해 온 그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었다. 러시아 의장대를 사열하던 이토가 몸을 돌려 귀빈들과 악수를 나누기 시작하자, 안중근은 불과 10보 남짓한 거리에서 이토를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탕, 탕, 탕!' 세 발의 총탄은 정확히 이토의 가슴과 배에 명중했다. 이토가 쓰러지는 것을 확인한 그는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옆에 있던 일본 관리들을 향해 추가로 세 발을 더 발사했다.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된 현장에서 그는 권총을 내던지며 러시아어로 외쳤다. "코레아 우라! (Корея! Ура! 대한 만세!)" 체포되는 순간까지 그의 얼굴에는 두려움이나 후회의 기색 없이 오직 조국 독립을 완수했다는 확신과 기개만이 서려 있었다. 현재 하얼빈역 1번 플랫폼에는 당시 의거 현장을 알리는 두 개의 표식이 바닥에 새겨져 있다. 역사를 기억하려는 중국의 배려이지만, 수많은 여행객들은 그 의미를 모른 채 무심히 그 위를 지나쳐 간다. 한때 역 내에 있었던 '안중근의사기념관'은 현재 시내의 '조선민족예술관'으로 이전하여 그 정신을 이어가고 있다. 제2부: 왜 이토 히로부미였는가? 안중근 의사는 왜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 대상으로 삼았는가? 이토는 당시 일본 정계의 원로이자 초대 총리로서 메이지 유신을 이끈 설계자였지만, 한국인들에게 그는 '국권 침탈의 상징' 그 자체였다. 그는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한 을사늑약(1905)을 강제하고, 초대 조선 통감으로 부임해 내정을 장악했으며, 헤이그 특사 사건을 빌미로 고종 황제를 강제 퇴위시킨 장본인이었다. 안 의사는 뤼순(旅順) 감옥에서 진행된 재판 과정에서 자신의 거사가 개인적인 원한이 아닌, 대한의군 참모중장으로서 침략의 원흉을 처단한 '전쟁 행위'임을 분명히 밝혔다. 그는 검사의 심문에 맞서 이토 히로부미가 저지른 15가지 죄악을 논리정연하게 열거했다. "첫째, 명성황후를 시해한 죄요, 둘째, 고종 황제를 폐위시킨 죄요, 셋째, 을사늑약과 정미7조약을 강제로 체결한 죄요..." 그의 주장은 단순히 이토 개인에 대한 고발을 넘어, 제국주의 일본이 대한제국에 자행한 불법적 침략 행위 전체에 대한 고발장이었다. 그는 이토 한 명을 제거함으로써 일본의 침략 정책에 경종을 울리고, 나아가 한국이 독립 의지를 잃지 않았음을 전 세계에 알리고자 했던 것이다. 그의 총구는 한 인간이 아닌, 제국주의의 심장을 겨누고 있었다. 제3부: 재판정에서 피어난 동양평화론 안중근 의사의 위대함은 하얼빈에서의 의거로 끝나지 않는다. 오히려 그의 진면목은 죽음을 앞둔 뤼순 감옥에서의 5개월 동안 더욱 선명하게 드러났다. 일제는 그를 단순 '살인범'으로 몰아 서둘러 재판을 끝내려 했지만, 재판정은 오히려 그의 사상과 철학을 만천하에 알리는 무대가 되었다. 그는 사형 선고를 받은 뒤에도 조금도 굴하지 않고 항소마저 포기한 채, 미완의 저서 '동양평화론(東洋平和論)' 집필에 몰두했다. 그는 이토 히로부미가 주장했던 '동양평화'가 일본 중심의 침략적 평화임을 간파하고, 진정한 평화를 위한 대안을 제시했다. '동양평화론'의 핵심은 한·중·일 3국이 서로 독립된 주권 국가로서 대등하게 협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3국이 공동으로 관리하는 '여순(뤼순)'을 평화 회의 기구의 본부로 삼고, 3국 공동 은행과 공동 화폐를 만들며, 공동 군대를 창설하여 서구 열강의 침략에 맞서자는 파격적인 구상이었다. 100여 년 전, 제국주의가 기승을 부리던 시대에 유럽연합(EU)과 같은 지역 공동체의 비전을 제시한 것이다. 안타깝게도 일제는 그가 '동양평화론'을 완성할 시간을 주지 않고 서둘러 사형을 집행했다. 1910년 3월 26일, 그는 "내가 죽은 뒤에 나의 뼈를 하얼빈 공원 곁에 묻어두었다가 우리 국권이 회복되거든 고국으로 반장해다오"라는 유언을 남기고 순국했다. 그의 나이 고작 31세였다. 제4부 결론: 테러리스트인가, 평화의 선구자인가 안중근 의사의 의거를 두고 일본 우익은 여전히 그를 '테러리스트'라 폄하한다. 하지만 그의 행위와 사상을 전체적으로 조망할 때, 그러한 평가는 지극히 편협하고 왜곡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는 조국의 독립을 위해 총을 들었지만, 그 궁극적인 목표는 개인의 복수나 민족의 이익을 넘어선 '동양의 평화'에 있었다. 오늘날 동북아는 여전히 과거사 문제와 영토 분쟁, 군비 경쟁으로 갈등의 골이 깊다. 서로를 향한 불신과 적대의 목소리가 높은 지금, 116년 전 한 청년이 차가운 감옥에서 꿈꿨던 '동양평화론'은 우리에게 더욱 무거운 질문을 던진다. 진정한 평화는 힘의 논리가 아닌, 상호 존중과 협력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그의 외침은 시대를 넘어선 깊은 울림을 준다. 그의 유해는 아직도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그가 남긴 '위국헌신 군인본분(爲國獻身 軍人本分)'이라는 유묵처럼, 나라를 위해 몸을 바치는 것이 군인의 본분임을 삶으로 증명한 그의 정신은 우리 모두의 가슴 속에 영원히 살아 숨 쉴 것이다.
    • 기획특집
    • 역사산책
    2025-08-30
  • 잊혀진 독립의 길을 걷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발자취를 따라서...상하이에서 충칭까지
    1919년 4월 11일, 중국 상하이의 한 평범한 건물에 '대한민국'이라는 이름의 새로운 정부가 탄생했다. 3.1 만세운동의 열망을 안고 출범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그러나 환호와 축복 속에서 시작되지 않았다. 나라도, 군대도, 재정도 없이 오직 꺼지지 않는 독립의 의지 하나만을 자산으로 삼아야 했다. 이후 1945년 8월 15일 광복을 맞이하기까지 27년. 상하이를 시작으로 항저우, 전장, 창사, 광저우를 거쳐 충칭에 정착하기까지, 임시정부가 걸었던 길은 장장 4,000km에 달하는 고난의 여정이었다. 그것은 일제의 추격을 피하고, 열강의 냉대 속에서 생존하며,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끝내 희망을 지켜낸 위대한 망명길이었다. 화려한 관광지가 아닌, 역사의 상흔과 선열들의 숨결이 밴 그 '잊혀진 길'을 따라 걸으며 오늘날 우리가 딛고 선 이 땅의 근원을 되새겨 본다. 제1부: 상하이(1919~1932) - 희망과 혼돈의 교차점 상하이의 심장부, 화려한 명품관과 세련된 노천카페가 즐비한 신천지(新天地) 거리. 전 세계에서 몰려든 관광객들로 발 디딜 틈 없는 이곳의 바로 곁, 좁은 골목 안으로 들어서면 시간의 흐름이 거짓말처럼 멈춘다. 붉은 벽돌의 3층 석고문(石庫門) 건축물, '대한민국 임시정부 유적지'다. 100여 년 전, 이곳에서 우리 선조들은 번영하는 상하이의 이면에서 조국의 미래를 걱정하며 뜨거운 눈물을 삼켰다. 당시 상하이는 각국 열강의 조계지가 얽힌, 동아시아의 가장 국제적인 도시였다. 특히 프랑스 조계지는 치외법권 지역으로, 일본 경찰의 권력이 미치지 못하는 일종의 '해방구'였다. 임시정부는 이 위태로운 울타리 안에서 민주공화제 헌법을 제정하고, '독립신문'을 발행하며 전 세계에 우리의 존재를 알렸다. 파리강화회의에 대표를 파견하고 미국에 구미위원부를 설치하는 등, 비록 성과는 미미했을지언정 주권 국가로서의 외교 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하지만 이곳에서의 삶 역시 평온과는 거리가 멀었다. 활동 자금은 늘 쪼들렸고, 일제 밀정들의 감시는 서슬 퍼렇게 번뜩였다. 이런 절박함이 1932년 4월 29일, 윤봉길 의사의 '훙커우 공원 의거'를 낳았다. 일왕의 생일 기념식장을 피로 물들인 이 의거는 전 세계를 놀라게 했고, 중국의 장제스 총통으로부터 "중국의 100만 대군도 해내지 못한 일을 조선의 한 청년이 해냈다"는 찬사를 받았다. 그러나 이 통쾌한 승리의 대가는 혹독했다. 눈에 불을 켠 일제는 프랑스 조계지를 무시하고 무차별 검거에 나섰다. 임시정부 요인들은 가족과 생이별을 하며 뿔뿔이 흩어져 피난길에 오를 수밖에 없었다. 13년간 희망과 혼돈의 터전이었던 상하이를 뒤로하고, 기약 없는 유랑의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제2부: 유랑(1932~1938) - 기약 없는 길 위에서 상하이를 떠난 임시정부의 여정은 '정부의 이전'이라기보다는 '개인의 도피'에 가까웠다. 특히 60만 원이라는 거액의 현상금이 걸린 백범 김구 주석의 피난길은 한 편의 첩보 영화와도 같았다. 그는 중국인 친구였던 저장성 도서관장 추푸청(褚輔成)의 도움으로, 그의 선량한 사위인 뱃사공 주애보(朱愛寶)의 배에 몸을 싣는다. 이후 1년 가까이 자싱(嘉興)의 호수 위를 떠도는 배 안에서 숨어 지내며 일본군의 추적을 따돌렸다. 백범의 어머니 곽낙원 여사는 아들의 뒷바라지를 위해 궂은 뱃일을 마다하지 않았고, "나라의 큰일을 하는 사람이니 내 아들이 아니다"라며 주애보 부부를 안심시켰다고 전해진다. 이 시기 임시정부는 항저우, 전장, 난징, 창사 등으로 중국 국민당 정부를 따라 계속해서 이동했다. 흩어진 요인들 간의 소통은 단절되기 일쑤였고, 활동 자금은 거의 고갈 상태였다. 독립운동 노선을 둘러싼 내부의 이념 갈등은 극에 달해, 한때 국무회의조차 열지 못할 정도로 기능이 마비되기도 했다. 1937년 중일전쟁 발발 후 잠시 정착했던 창사(長沙)는 또 다른 비극의 무대였다. 김구 주석을 중심으로 분열된 독립운동 세력을 통합하려는 노력이 결실을 보려던 찰나, 조선혁명당 소속의 청년 이운한이 쏜 총탄에 김구 주석이 쓰러지는 '남목청 사건'이 발생한다. 다행히 목숨은 건졌지만, 동지라 믿었던 이에게 총을 맞은 충격은 임시정부 전체에 깊은 상처를 남겼다. 얼마 뒤에는 일본군의 진격에 대비한다는 명분으로 일어난 방화로 창사 시내의 90%가 불타는 대참사까지 겪으며, 임시정부는 또다시 정처 없는 피난길에 올라야 했다. 제3부: 충칭(1940~1945) - 마지막 불꽃을 태우다 광저우, 류저우, 치장을 거치는 남부 내륙으로의 피난길은 이전보다 더욱 처절했다. 말라리아와 같은 풍토병과 굶주림, 일본군의 무차별 폭격 속에서 수많은 독립운동가와 그 가족들이 이름 없이 스러져갔다. 이 기나긴 어둠의 터널 끝에 다다른 곳이 바로 중국의 전시수도 충칭(重慶)이었다. 안개와 가파른 언덕으로 유명한 이 '산의 도시(山城)'는 일본군의 폭격을 피할 수 있는 천연 요새였다. 임시정부는 이곳 연화지(蓮花池)에 마지막 청사를 마련하고, 27년 망명사의 마지막 장을 열었다. 허름하고 비좁은 청사였지만, 이곳에서 임시정부는 비로소 좌우 연합정부를 구성하고, 숙원이던 정규군 '한국광복군'을 창설하며 국가의 면모를 갖추게 된다. 당시 임시정부의 생존에는 중국 국민당 정부의 지원이 절대적이었다. 장제스 총통은 김구 주석을 개인적으로 신뢰하며 매달 상당한 금액의 활동 자금을 지원했다. 독립운동사 전문가인 한시준 교수는 "국민당의 지원이 없었다면 충칭 시기 임시정부의 활동은 사실상 불가능했을 것"이라며, "이는 윤봉길 의거 이후 형성된 한중 간의 연대 의식이 낳은 중요한 결실"이라고 평가했다. 한국광복군은 연합군의 일원으로 인도-버마 전선에 투입되었고, 미국 전략정보국(OSS)과 함께 한반도 내 진공을 목표로 하는 '독수리 작전'을 준비하며 조국 해방의 날을 손꼽아 기다렸다. 그러나 역사는 이들의 손에 직접 해방을 쟁취할 기회를 허락하지 않았다. 1945년 8월 10일, 미국의 원자폭탄 투하로 일본이 무조건 항복을 준비한다는 소식을 들은 백범 김구는 '백범일지'에 그 심정을 이렇게 남겼다. "이 소식은 내게 희소식이라기보다는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일이었다. (중략) 수년간 애를 써서 참전할 준비를 한 것도 다 허사로 돌아갔다." 제4부 결론: 길 위에서 역사를 묻다 1945년 11월, 김구 주석과 임시정부 요인들은 개선장군이 아닌 개인 자격으로 쓸쓸히 귀국해야 했다. 그들이 27년간 지켜온 '정부'의 정통성은 끝내 인정받지 못했다. 그래서일까. 상하이에서 충칭까지 이어진 4,000km의 길은 우리에게 조금은 낯설고 '잊혀진 길'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이 길은 결코 패배의 역사가 아니다. 가진 것 하나 없이 시작해 온갖 시련 속에서도 '대한민국'이라는 국호와 민주공화제의 법통, 그리고 독립을 향한 신념을 목숨처럼 지켜낸 위대한 승리의 기록이다. 이 길 위에는 김구, 김규식과 같은 위대한 지도자들뿐만 아니라, 이름 없이 스러져간 수많은 독립운동가와 그 가족들의 피와 눈물, 그리고 꺾이지 않는 의지가 서려 있다. 중국 대륙 곳곳에 점처럼 흩어져 있는 임시정부의 발자취를 따라 걷는 것은, 단순히 과거를 돌아보는 여행이 아니다. 그것은 오늘 우리가 누리는 자유와 민주주의가 결코 쉽게 얻어진 것이 아님을 확인하고, 국가의 뿌리를 되새기는 성스러운 순례의 여정이다. 이 길의 끝에서, 우리는 진정으로 대한민국이 어디에서 시작되었는지를 깨닫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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