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5-08-31(일)
 
  • 청나라 군대를 이끌고 역사의 전면에 등장한 한 남자, 그의 선택이 동아시아의 운명을 바꾸다.
  • 급진개화파의 좌절된 혁명, 갑신정변

 

 

갑신정변은 한국 근대사에서 가장 극적인 실패이자, 가장 중요한 전환점 중 하나이다. 

특히 이 사건을 통해 역사의 무대에 화려하게 등장한 '위안스카이'라는 인물에 초점을 맞추면, 단순한 국내 정변을 넘어 동아시아의 운명을 건 한중일 삼국의 각축전이라는 더 큰 그림을 볼 수 있을 것이다. 

 

 

1884년 12월 4일, 한성(서울)의 밤은 근대의 불빛으로 그 어느 때보다 밝았다. 신식 우편제도를 관장할 '우정총국'의 개국 축하연이 열리고 있었다. 서양식 연회복을 입은 외교관들과 조선의 고위 관료들이 어울린 이 화려한 연회는, 그러나 곧 피비린내 나는 역사의 현장으로 돌변한다. 김옥균을 필두로 한 급진개화파가 조선의 완전한 자주독립과 근대화를 목표로 일으킨 '갑신정변'의 서막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혁명은 단 3일 만에 처참한 실패로 끝나고 만다. 이 '3일 천하'를 무력으로 진압하고 역사의 전면에 등장한 인물, 그는 조선의 개혁가가 아닌 스물다섯 살의 야심에 찬 청나라 군인, 위안스카이(袁世凱)였다. 이것은 좌절된 혁명의 기록이자, 한 개인의 결단이 어떻게 한 나라의 운명을 바꾸고 제국의 향방을 결정했는지에 대한 이야기다.

 

 

 

제1부: "오늘 밤, 거사를 일으킵시다!" - 불타는 우정총국

1880년대 초반의 조선은 폭풍전야였다. 서구 열강과 일본의 개항 압력 속에서, 나라는 두 개의 길을 두고 갈등했다. 청나라와의 전통적인 사대 관계를 유지하며 점진적 개혁을 추구하자는 민씨 척족 중심의 '사대당(수구파)'과, 일본의 메이지 유신을 모델로 삼아 급진적인 개혁을 통해 완전한 독립을 이루자는 김옥균, 박영효 등 '개화당(독립파)'의 대립이 그것이다.

 

이러한 갈등은 1882년 '임오군란' 이후 더욱 첨예해졌다. 군란을 진압한다는 명분으로 청나라와 일본의 군대가 모두 한성에 주둔하게 된 것이다. 특히 청나라는 3천 명의 군대를 주둔시키며 조선의 내정에 깊숙이 개입했고, 그 선봉에 선 인물이 바로 위안스카이였다.

 

김옥균과 개화파는 이러한 상황을 타개할 기회만을 엿보고 있었다. 마침 청나라가 베트남을 둘러싼 '청프전쟁'에 발이 묶여 조선에 주둔하던 병력의 절반을 철수시키자, 이들은 '바로 지금'이 기회라고 판단했다. 일본 공사 다케조에 신이치로로부터 "일본군 150명이 당신들을 돕겠다"는 약속까지 받아낸 이들은, 우정총국 개국 축하연을 거사의 신호탄으로 삼았다. 연회장 밖에서 피어오른 불길을 신호로, 개화파 행동대원들은 수구파 핵심 인물들을 차례로 제거하고, 급히 궁으로 달려가 고종을 확보하는 데 성공한다.

 

 

 

제2부: 짧았던 혁명의 꿈, 14개조 개혁안

고종의 신변을 확보한 개화파는 즉시 새로운 내각을 발표하고, 자신들의 꿈이 담긴 '14개조 개혁 정강'을 선포했다. 그 내용은 혁명적이었다.

 

"청나라에 대한 조공 허례를 폐지한다(제1조), 문벌을 폐지하여 인민 평등의 권리를 세운다(제2조), 조세 제도를 개혁하여 국가 재정을 튼튼히 한다(제4조)..."

 

이는 수백 년간 이어져 온 청나라와의 사대 관계를 청산하고, 신분제를 철폐하며, 근대적인 재정 및 행정 시스템을 갖춘 완전한 독립 국가를 만들겠다는 청사진이었다. 조선 역사상 최초로 '근대 국민 국가'의 비전을 제시한 순간이었다. 일본 공사관의 호위를 받으며 경복궁에서 경우궁으로 거처를 옮긴 고종과 개화파 내각. 그들의 혁명은 일단 성공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불안한 시간은 계속 흘렀다. 한성 내에는 여전히 1,500명의 청나라 군대가 남아있었고, 그들의 지휘관 위안스카이는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수구파 세력은 위안스카이에게 달려가 "개화당과 일본이 왕을 납치했으니 구원해달라"고 눈물로 호소했다. 이제 모든 것은 스물다섯 청년 장교의 손에 달려 있었다.

 

 

 

제3부: 야심가의 결단, "조선을 구원하라"

위안스카이는 혼란에 빠졌다. 그는 조선의 정변 소식을 듣고 즉시 본국에 전보를 쳤지만, 답신을 기다릴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외교적 관례상 타국의 궁에 군대를 투입하는 것은 전쟁을 의미했다. 하지만 그는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만약 이 정변이 성공하여 조선에 친일 정권이 들어선다면, 청나라가 수백 년간 누려온 종주권은 물거품이 되고 동아시아의 판도는 일본에게 넘어갈 것이라는 사실을.

 

그는 결단을 내렸다. "왕이 위험에 처했으니 구출한다"는 명분을 내걸고, 휘하의 청군 1,500명을 이끌고 창덕궁으로 진격했다. 이는 개화파를 호위하던 일본군 150명의 10배에 달하는 압도적인 병력이었다. 12월 6일 오후, 위안스카이의 군대는 궁궐 담을 넘어 총공격을 개시했다.

 

결과는 명백했다. 중과부적이었던 일본군은 얼마 버티지 못하고 공사관으로 퇴각했고, 개화파 지도자들은 뿔뿔이 흩어져 망명길에 올라야 했다. 김옥균, 박영효 등은 인천을 통해 일본으로 탈출했지만, 홍영식, 박영교 등은 미처 피하지 못하고 참살당했다. 우정총국의 불꽃으로 시작된 혁명은, 위안스카이의 총칼 아래 단 3일 만에 막을 내렸다.

 

 

 

제4부 결론: 실패한 혁명, 그러나 역사는 시작되었다


 

갑신정변의 실패로 조선은 더욱 깊은 청나라의 그늘 아래로 들어갔다. 위안스카이는 정변을 진압한 공로로 조선의 국정을 총괄하는 '조선 주재 총리교섭통상사의'에 임명되어, 이후 10년간 조선의 왕 위에 군림하는 실질적인 통치자로 행세했다. 이 사건은 그의 정치적 야망에 날개를 달아준 첫 번째 무대였으며, 훗날 그가 청나라를 무너뜨리고 중화민국 대총통의 자리에 오르는 기나긴 여정의 출발점이 되었다.

 

비록 실패로 끝났지만, 갑신정변은 조선 역사에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겼다. 그것은 낡은 질서에 맞서 자주적인 근대 국가를 세우려 했던 최초의 정치 혁명이었으며, 그들이 내걸었던 14개조 개혁안은 이후 갑오개혁과 독립협회 활동의 사상적 뿌리가 되었다.

 

3일 천하를 짓밟은 위안스카이의 총성은 모든 것을 끝낸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것은 끝이 아니라, 조선의 독립을 둘러싼 청나라와 일본의 본격적인 대결, 즉 10년 뒤 발발할 청일전쟁의 서막을 알리는 신호탄이기도 했다. 실패한 혁명은 그렇게 또 다른 역사의 문을 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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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3일 천하를 짓밟은 야심가 위안스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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