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암흑의 시대, 만주 땅에서 쓴 고뇌와 희망의 시
- 용정의 십자가, 명동촌의 언덕에서 그의 순결한 영혼을 만나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슴 한편에 품고 있을 이 문장은, 단순한 시구를 넘어 한 시대의 양심과 순결한 영혼의 무게를 담고 있다. 시인 윤동주. 그는 스물일곱의 짧은 생을 살다 갔지만, 그의 시는 암흑의 시대를 건너와 오늘날까지도 우리에게 '부끄러움'의 의미를 묻는다. 그의 문학적 자양분이 된 고향, 그의 시에 등장하는 언덕과 강, 별과 십자가의 실제 무대였던 곳. 바로 중국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에 위치한 북간도(北間島)다. 일제의 서슬 퍼런 감시 속에서도 우리말과 민족 교육의 불꽃을 지폈던 그 땅, 용정(龍井)으로 떠나 시인의 마지막 발자취를 따라가 본다.
제1부: 용정(龍井), 시인의 고향을 걷다
두만강 너머 만주 땅에 우리 민족이 터를 잡은 디아스포라의 땅, 북간도. 그 중심지인 용정(과거 지명 간도)은 윤동주의 문학 세계를 이해하기 위한 첫걸음이다. 현재는 '룽징(龙井)'이라 불리는 이 도시의 이름은 시내 중심에 있는 한 우물에서 유래했다. 과거 이 우물가에서 두 명의 조선인이 책을 읽는 것을 보고 고을 원님이 감탄하여 우물에 '용정(龍井)'이라는 이름을 붙였다는 이야기는, 이곳이 일찍부터 배움과 문화의 중심지였음을 짐작게 한다.
윤동주는 이 용정에서도 '동방을 밝힌다'는 뜻을 지닌 명동촌(明東村)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그의 외조부이자 민족 교육자였던 김약연이 세운 이 마을은, 단순한 촌락이 아니었다. 교회와 학교가 마을의 중심이었고, 독립운동가들이 드나들며 민족의 앞날을 논하던 저항의 심장부였다. 현재 복원된 윤동주 생가는 명동촌 언덕 위에 소박하게 자리 잡고 있다. 생가에 올라 그가 매일 보았을 해란강(海蘭江)과 드넓은 만주 벌판을 바라보면,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라 노래했던 그의 시 '향수'가 절로 떠오른다. 이곳의 모든 풍경이 그의 시의 일부였던 것이다.
제2부: 별과 십자가, 고뇌하는 영혼
윤동주의 시 세계를 관통하는 두 가지 핵심 상징은 '부끄러움'과 '자기성찰'이다. 이러한 정서는 그가 다녔던 은진중학교 시절에 싹텄다. 당시 은진중학교는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우리말과 역사를 가르치다 여러 차례 탄압을 받은 민족학교였다. 그는 이곳에서 평생의 동지이자 라이벌이었던 고종사촌 송몽규를 만난다. 적극적이고 행동가였던 송몽규와 달리, 내성적이고 사색적이었던 윤동주는 독립운동에 직접 나서지 못하고 시를 쓰는 자신을 늘 부끄러워했다.
이러한 고뇌는 그의 대표작들에 고스란히 녹아있다. "별 하나에 추억과/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쓸쓸함과..."로 시작하는 **'별 헤는 밤'**은 그가 서울 연희전문학교 시절, 고향 북간도를 그리며 쓴 시다. 시에 등장하는 '패, 경, 옥' 등은 명동촌에서 함께 자란 누이와 친구들의 이름이다. 고향의 밤하늘을 수놓았을 별들을 헤아리며, 그는 시대의 어둠 속에서 자신이 가야 할 길을 고뇌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고 추억처럼 사나이가 있습니다." ('자화상') 자신을 비춰보는 매개체인 우물은 용정의 상징이자, 끝없는 자기성찰의 도구였다. 그는 우물 속 사나이가 미워졌다가, 가여워졌다가, 다시 그리워하며 끊임없이 자신과 화해하고 또 갈등했다.
"십자가가 허락된다면/ 모가지를 드리우고/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어두워가는 하늘 밑에/ 조용히 흘리겠습니다." ('십자가') 독실한 기독교 집안에서 자란 그에게 명동교회의 십자가는 희생의 상징이었다. 그는 시대의 아픔을 외면할 수 없어 괴로워하며, 자신에게 주어진 길이 십자가의 길이라면 기꺼이 감당하겠다는 비장한 각오를 시로 남겼다.
제3부: 시대의 비극, 두 청년의 엇갈린 길
시를 통한 저항을 꿈꿨던 윤동주와, 직접 행동을 통해 독립을 쟁취하고자 했던 송몽규. 두 청년은 각자의 방식으로 시대와 맞섰다. 더 넓은 학문을 배우고자 일본 유학길에 오른 것은 그들의 운명을 가른 비극적 선택이었다. 나라를 잃은 청년에게 일본 유학은 '적의 심장부'로 들어가는 것과 같았고, 이는 더 큰 고뇌와 부끄러움의 근원이 되었다.
결국 두 사람은 1943년, 독립운동을 꾀했다는 혐의로 일본 경찰에 체포된다. 죄명은 '치안유지법 위반'. 송몽규는 적극적인 독립운동 계획이 드러나 징역 2년을 선고받았고, 윤동주는 별다른 혐의가 없었음에도 송몽규와 가깝다는 이유만으로 같은 형량을 선고받았다.
그들이 수감된 곳은 악명 높은 후쿠오카 형무소. 이곳에서 두 청년은 정체불명의 주사를 맞으며 생체 실험의 대상이 되었을 것이라는 의혹이 짙다. 결국 1945년 2월 16일, 윤동주는 "알 수 없는 주사를 맞은 뒤 이상해졌다"는 옥중 동료의 증언을 마지막으로 차가운 감방에서 숨을 거둔다. 송몽규 역시 그의 뒤를 이어 3월 7일에 옥사했다. 조국 광복을 불과 5~6개월 앞둔 시점이었다.
제4부 결론: 왜 우리는 여전히 윤동주를 부르는가
윤동주의 시는 그의 사후, 친구였던 정병욱이 보관하고 있던 원고 덕분에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라는 제목으로 세상에 나올 수 있었다. 만약 이 유고 시집이 없었다면, 우리는 영원히 이 위대한 시인을 몰랐을지도 모른다.
오늘날 우리는 왜 그토록 윤동주에 열광하는가? 그것은 그의 시가 단 한 순간도 순결함을 잃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불의한 시대에 행동하지 못하는 자신을 끊임없이 부끄러워하고 성찰했던 그의 정직한 목소리는, 온갖 불의와 타협에 무뎌진 현대인들의 양심을 깨운다. 그는 영웅이 되려 하지 않았지만, 그의 삶과 시 자체가 시대의 어둠을 밝히는 등불이 되었다.
북간도 명동촌의 언덕 위에 서면, 지금도 '잎새에 이는 바람'에 괴로워하던 한 청년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그가 남긴 시들은 단순한 문학을 넘어, 우리가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를 묻는 영원한 질문으로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