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5-08-31(일)
 
  • 안중근 의사 의거 116주년... 단순한 암살을 넘어선 동양평화론의 외침

 

 

독립을 향한 한 개인의 의지가 어떻게 역사의 물줄기를 바꾸려 했는지, 그리고 그가 남긴 평화의 메시지가 오늘날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가? 하얼빈 역 현장에는 플랫폼에 표식이 되어 있는데 그날의 공기를 느끼며 숙인 머리를 쉽게 들지 못했다.

 

2025년 현재, 하루 수만 명이 오가는 중국 하얼빈역. 유라시아 대륙을 향해 뻗어 나가는 고속철의 기적 소리가 쉴 새 없이 울리는 이곳은 현대 중국의 역동적인 발전을 상징하는 공간이다. 하지만 시간을 거슬러 1909년 10월 26일의 차가운 아침, 이곳 플랫폼에서는 단 세 발의 총성이 동아시아의 역사를 뒤흔들었다. 대한의군 참모중장 안중근이 쏜 총탄이 ‘조선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의 심장을 꿰뚫은 것이다. 오는 10월 26일로 116주년을 맞는 이 의거는 단순히 한 개인의 복수나 저항이 아니었다. 법정에서도, 차가운 감옥의 독방에서도 조국의 독립과 나아가 동양의 항구적인 평화를 외쳤던 한 선각자의 위대한 투쟁이었다. 116년 전 그날의 하얼빈으로 돌아가, 짧게 타올랐으나 영원히 기억될 그의 마지막 여정을 따라가 본다.

 

 

 

제1부: 운명의 날, 하얼빈역 9시 30분

1909년 10월 26일 오전 9시. 러시아 재무대신 코코프체프와의 회담을 위해 이토 히로부미를 태운 특별열차가 하얼빈역 플랫폼으로 서서히 들어왔다. 러시아군 의장대의 환영 연주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이토는 의기양양하게 열차에서 내렸다. 바로 그 순간, 환영 인파 뒤편에 서 있던 대한의군 참모중장 안중근은 품속에 숨겨두었던 브라우닝 권총을 꺼내 들었다.

 

며칠 전부터 '단지동맹(斷指同盟)' 동지들과 함께 이곳에서 잠복해 온 그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었다. 러시아 의장대를 사열하던 이토가 몸을 돌려 귀빈들과 악수를 나누기 시작하자, 안중근은 불과 10보 남짓한 거리에서 이토를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탕, 탕, 탕!' 세 발의 총탄은 정확히 이토의 가슴과 배에 명중했다. 이토가 쓰러지는 것을 확인한 그는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옆에 있던 일본 관리들을 향해 추가로 세 발을 더 발사했다.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된 현장에서 그는 권총을 내던지며 러시아어로 외쳤다. "코레아 우라! (Корея! Ура! 대한 만세!)" 체포되는 순간까지 그의 얼굴에는 두려움이나 후회의 기색 없이 오직 조국 독립을 완수했다는 확신과 기개만이 서려 있었다. 현재 하얼빈역 1번 플랫폼에는 당시 의거 현장을 알리는 두 개의 표식이 바닥에 새겨져 있다. 역사를 기억하려는 중국의 배려이지만, 수많은 여행객들은 그 의미를 모른 채 무심히 그 위를 지나쳐 간다. 한때 역 내에 있었던 '안중근의사기념관'은 현재 시내의 '조선민족예술관'으로 이전하여 그 정신을 이어가고 있다.

 

 

 

제2부: 왜 이토 히로부미였는가?

안중근 의사는 왜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 대상으로 삼았는가? 이토는 당시 일본 정계의 원로이자 초대 총리로서 메이지 유신을 이끈 설계자였지만, 한국인들에게 그는 '국권 침탈의 상징' 그 자체였다. 그는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한 을사늑약(1905)을 강제하고, 초대 조선 통감으로 부임해 내정을 장악했으며, 헤이그 특사 사건을 빌미로 고종 황제를 강제 퇴위시킨 장본인이었다.

안 의사는 뤼순(旅順) 감옥에서 진행된 재판 과정에서 자신의 거사가 개인적인 원한이 아닌, 대한의군 참모중장으로서 침략의 원흉을 처단한 '전쟁 행위'임을 분명히 밝혔다. 그는 검사의 심문에 맞서 이토 히로부미가 저지른 15가지 죄악을 논리정연하게 열거했다.

 

"첫째, 명성황후를 시해한 죄요, 

둘째, 고종 황제를 폐위시킨 죄요, 

셋째, 을사늑약과 정미7조약을 강제로 체결한 죄요..."

 

그의 주장은 단순히 이토 개인에 대한 고발을 넘어, 제국주의 일본이 대한제국에 자행한 불법적 침략 행위 전체에 대한 고발장이었다. 그는 이토 한 명을 제거함으로써 일본의 침략 정책에 경종을 울리고, 나아가 한국이 독립 의지를 잃지 않았음을 전 세계에 알리고자 했던 것이다. 그의 총구는 한 인간이 아닌, 제국주의의 심장을 겨누고 있었다.

 

 

 

제3부: 재판정에서 피어난 동양평화론

안중근 의사의 위대함은 하얼빈에서의 의거로 끝나지 않는다. 오히려 그의 진면목은 죽음을 앞둔 뤼순 감옥에서의 5개월 동안 더욱 선명하게 드러났다. 일제는 그를 단순 '살인범'으로 몰아 서둘러 재판을 끝내려 했지만, 재판정은 오히려 그의 사상과 철학을 만천하에 알리는 무대가 되었다.

 

그는 사형 선고를 받은 뒤에도 조금도 굴하지 않고 항소마저 포기한 채, 미완의 저서 '동양평화론(東洋平和論)' 집필에 몰두했다. 그는 이토 히로부미가 주장했던 '동양평화'가 일본 중심의 침략적 평화임을 간파하고, 진정한 평화를 위한 대안을 제시했다.

 

'동양평화론'의 핵심은 한·중·일 3국이 서로 독립된 주권 국가로서 대등하게 협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3국이 공동으로 관리하는 '여순(뤼순)'을 평화 회의 기구의 본부로 삼고, 3국 공동 은행과 공동 화폐를 만들며, 공동 군대를 창설하여 서구 열강의 침략에 맞서자는 파격적인 구상이었다. 100여 년 전, 제국주의가 기승을 부리던 시대에 유럽연합(EU)과 같은 지역 공동체의 비전을 제시한 것이다.

 

안타깝게도 일제는 그가 '동양평화론'을 완성할 시간을 주지 않고 서둘러 사형을 집행했다. 1910년 3월 26일, 그는 "내가 죽은 뒤에 나의 뼈를 하얼빈 공원 곁에 묻어두었다가 우리 국권이 회복되거든 고국으로 반장해다오"라는 유언을 남기고 순국했다. 그의 나이 고작 31세였다.

 

 

 

제4부 결론: 테러리스트인가, 평화의 선구자인가


 

안중근 의사의 의거를 두고 일본 우익은 여전히 그를 '테러리스트'라 폄하한다. 하지만 그의 행위와 사상을 전체적으로 조망할 때, 그러한 평가는 지극히 편협하고 왜곡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는 조국의 독립을 위해 총을 들었지만, 그 궁극적인 목표는 개인의 복수나 민족의 이익을 넘어선 '동양의 평화'에 있었다.

 

오늘날 동북아는 여전히 과거사 문제와 영토 분쟁, 군비 경쟁으로 갈등의 골이 깊다. 서로를 향한 불신과 적대의 목소리가 높은 지금, 116년 전 한 청년이 차가운 감옥에서 꿈꿨던 '동양평화론'은 우리에게 더욱 무거운 질문을 던진다. 진정한 평화는 힘의 논리가 아닌, 상호 존중과 협력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그의 외침은 시대를 넘어선 깊은 울림을 준다.

 

그의 유해는 아직도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그가 남긴 '위국헌신 군인본분(爲國獻身 軍人本分)'이라는 유묵처럼, 나라를 위해 몸을 바치는 것이 군인의 본분임을 삶으로 증명한 그의 정신은 우리 모두의 가슴 속에 영원히 살아 숨 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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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9년 하얼빈의 총성, 이토를 쏘고 동양 평화를 꿈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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