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5-09-08(월)
 
  • 한국 사회의 권력 구조를 교실이라는 작은 세계에 압축적으로 담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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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로운 저항은 왜 굴복하는가, 그리고 괴물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이문열의 소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을 읽는 것은, 돋보기로 우리 사회의 가장 불편한 지점을 들여다보는 것과 같다. 1987년 발표된 이 중편소설은 초등학교 5학년 교실이라는 지극히 작은 공간을 배경으로 하지만, 그 안에는 한 시대의 폭압적인 권력 구조와 그에 기생하고 굴종하는 대중의 심리가 놀랍도록 정교하게 압축되어 있다. 

 

서울에서 온 자유주의자 한병태와, 그 교실을 완벽하게 장악한 독재자 엄석대. 두 소년의 대립과 갈등, 그리고 파국을 통해, 작가는 정의는 왜 패배하고 불의는 어떻게 유지되는지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을 던진다. 

 

발표된 지 40년 가까이 되었지만, 학교 폭력 문제부터 직장 내 권력관계, 나아가 우리 사회의 정치적 현실에 이르기까지 그 어떤 텍스트보다 현실적인 알레고리(allegory, 우의)로 읽히는 작품.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은 시대를 넘어 인간과 권력의 본질을 성찰하게 하는 우리 시대의 필독 고전이다.

 

 

 

한 소년의 전학, 그리고 시작된 싸움

 

 

 

1부: 이방인, 질서에 도전하다

 

이야기는 자유분방한 서울의 초등학교에서 잘나가던 학생 한병태가, 아버지의 좌천으로 시골의 작은 학교로 전학을 오면서 시작된다. 그가 마주한 5학년 2반은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곳이었다. 급장인 엄석대가 담임선생님마저 묵인하는 절대 권력을 휘두르며 반 전체를 지배하고 있었다. 시험을 볼 때는 석대의 지시 아래 전교 1등부터 꼴찌까지 성적이 조작되고, 아이들은 자발적으로 석대에게 도시락 반찬을 상납하며, 그의 폭력과 감시 아래 누구 하나 저항하지 못하는 '석대의 왕국'이었다.

 

서울의 합리적인 질서에 익숙했던 한병태는 이 부조리한 시스템에 정면으로 맞서기로 결심한다. 그는 석대의 권위에 도전하고, 아이들에게 저항을 호소하며, 담임선생님에게 부정을 고발하는 등 홀로 외로운 싸움을 시작한다.

 

2부: 고독한 저항, 그리고 패배

 

그러나 한병태의 저항은 무력했다. 반 아이들은 그를 돕기는커녕, 기존 질서를 위협하는 '이단아'로 취급하며 따돌리고 괴롭힌다. 그들은 석대가 주는 '질서'와 '안정'에 이미 길들여져 있었기 때문이다. 담임선생님 역시 "뛰어난 한 명만 잘 관리하면 반 전체가 편하다"는 논리로 석대의 독재를 방관할 뿐이다.

 

결국 한병태는 고립과 폭력을 견디지 못하고 무너진다. 그는 석대에게 굴복하고, 그의 시스템에 편입되는 길을 택한다. 석대가 주는 보호와 특권 속에서 그는 점차 저항의 의지를 잃고, 불의한 권력에 순응하는 편안함에 안주하게 된다. 그는 더 이상 이방인이 아닌, '석대의 왕국'의 충실한 일원이 되어간다.

 

3부: 새로운 질서, 영웅의 몰락

 

그렇게 1년이 흐르고 6학년이 되었을 때, 새로운 담임선생님이 부임하면서 석대의 왕국은 예기치 못한 균열을 맞는다. 젊고 이상주의적인 새 담임은 석대의 부정행위를 용납하지 않고, 아이들을 개별적인 인격체로 대하며 민주적인 질서를 가르친다.

 

절대 권력의 비호가 사라지자, 어제까지 석대에게 충성을 바치던 아이들은 하루아침에 돌변한다. 그들은 석대의 모든 비리를 앞다투어 폭로하고, 그를 조롱하며 집단으로 린치를 가한다. 그렇게 견고했던 '우리들의 영웅' 엄석대는 한순간에 '일그러진 영웅'으로 전락하여 교실에서 도망치듯 사라진다.

 

4부: 어른이 된 후, 남겨진 부끄러움

 

세월이 흘러 어른이 된 한병태는 우연히 수갑을 찬 채 경찰에 연행되는 초라한 엄석대의 모습을 목격한다. 그 순간, 그는 승리감이나 안도감 대신 깊은 부끄러움과 죄책감에 휩싸인다. 

 

그는 깨닫는다. 진정한 악은 엄석대라는 한 명의 독재자가 아니라, 그의 독재를 가능하게 하고 그에 기생하며 안주했던 자기 자신을 포함한 다수의 '방관자들'이었음을. 그리고 그는 자문한다. 과연 우리 사회는 엄석대의 시대로부터 얼마나 자유로워졌는가.

 

 

 

교실, 독재자, 그리고 방관자들

 

 

작은 공화국, '교실'이라는 알레고리 이 소설의 가장 큰 문학적 성취는 '교실'이라는 공간을 통해 1970~80년대 한국의 권위주의적 독재 시대를 완벽하게 은유했다는 점이다. ①절대 권력자(엄석대), ②그 권력을 묵인하고 이용하는 기득권(담임선생님), ③권력에 저항하다 좌절하는 지식인(한병태), ④그리고 권력에 순응하며 기생하는 다수의 민중(반 아이들)의 구도는 당시 우리 사회의 축소판이었다.

 

'영웅'인가, '괴물'인가 - 엄석대 

 

엄석대는 단순히 힘센 골목대장이 아니다. 그는 폭력과 공포뿐만 아니라, '성적 관리'와 '질서 유지'라는 당근을 통해 아이들의 자발적인 복종을 이끌어내는 교활한 통치자다. 그는 반 아이들에게 예측 가능한 질서를 제공하고, 그 대가로 절대적인 권력을 누린다. 작가는 엄석대를 통해 절대 권력이 어떻게 개인을 타락시키고 시스템을 왜곡하는지를 보여준다.

 

저항과 굴종 사이 - 한병태 

 

한병태는 이 소설을 읽는 독자들이 가장 깊이 감정을 이입하게 되는 인물이다. 그는 처음에는 정의감에 불타는 저항자였지만, 결국 현실의 벽 앞에서 좌절하고 권력의 달콤함에 길들여지는 나약한 지식인의 모습을 대변한다. 

 

그의 변절 과정은 독자들에게 "나라면 과연 달랐을까?"라는 불편한 질문을 던지며, 정의를 외치는 것보다 불의에 침묵하는 것이 얼마나 쉬운지를 통찰하게 한다.

 

 

 

일그러진 영웅은 지금도 우리 곁에 있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은 박정희, 전두환으로 이어지는 군부독재 시절에 대한 명백한 정치적 알레고리다. 엄석대의 갑작스러운 몰락은 4·19 혁명이나 1987년 6월 항쟁과 같은, 외부의 충격이나 시대의 변화로 독재 정권이 무너지는 역사를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이 소설의 생명력은 과거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오늘날 우리가 마주하는 수많은 사회 현상 속에서 우리는 여전히 엄석대와 한병태, 그리고 다수의 방관자들을 발견한다.

 

학교: 교실 내의 집단 따돌림과 학교 폭력 문제에서 힘의 논리와 방관의 심리는 그대로 재현된다.

 

직장: 부당한 상사의 지시에 침묵하고 순응하며 자신의 안위를 지키려는 모습은 오늘날 직장인들의 생존 방식과 닮아있다.

 

사회: 비합리적인 여론 몰이나 '좌표 찍기'와 같은 온라인상의 집단 광기 속에서, 개인의 소신을 지키기보다 다수의 의견에 휩쓸리는 모습은 또 다른 형태의 집단적 굴종이다.

 

결국 이문열이 던지는 메시지는 명확하다. 진정한 영웅은 한 명의 카리스마 있는 지도자가 아니라, 부당한 권력에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진 평범한 개인들의 연대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저항과 연대에 실패했을 때 남는 것은, 평생을 따라다니는 '부끄러움'뿐이다.

 

 

 

당신은 저항자인가, 방관자인가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은 책을 덮은 후에도 독자에게 무거운 질문을 남기는 소설이다. 나는 내 삶의 공간에서 엄석대의 폭력을 방관하고 있지는 않은가? 혹은 한병태처럼 저항을 포기하고 안락함에 길들여져 있지는 않은가?

 

우리 사회의 보이지 않는 권력 구조와 그 속에서 살아가는 개인의 내면을 깊이 있게 성찰하고 싶은 독자라면, 반드시 이 소설을 읽어보길 권한다. 그것은 한 편의 잘 짜인 문학 작품을 넘어, 우리 자신을 비추는 날카로운 거울이 되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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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교실 속 독재자를 통해 본 권력의 민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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