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5-08-31(일)
 
  • 위화(余华)가 들려주는 중국 민초들의 생존기... 가장 비극적인 서사 속에 가장 눈부신 가족애를 담다.

 

 

중국 현대문학의 거장 위화의 소설을 읽는 것은, 거대한 쇄빙선이 얼어붙은 강을 깨며 나아가는 모습을 보는 것과 같다. 그의 대표작 '인생'이 역사의 거대한 파도에 휩쓸리는 개인의 삶을 담담하게 그려냈다면, 또 다른 걸작 '허삼관매혈기'는 그 파도를 넘기 위해 제 몸의 피를 팔아야 했던 한 가장의 이야기를 통해 독자의 심장을 서늘하면서도 뜨겁게 만든다. '매혈(賣血)', 즉 피를 파는 행위. 이 섬뜩하고 비천하게 느껴지는 행위가, 한 남편이자 아버지에게는 가족을 구원하는 가장 신성한 의식이자 유일한 수단이 된다. 작가 특유의 냉정한 시선과 예기치 못한 순간에 터져 나오는 유머, 즉 해학(諧謔)을 통해, '허삼관매혈기'는 지독한 비극을 가장 눈부신 가족애로 승화시킨 우리 시대의 고전이다.

 

 

 

열한 번의 매혈, 한 편의 가족사

 

1부: 청년 허삼관, 피를 팔아 아내를 얻다 

 

1950년대, 갓 스무 살을 넘긴 청년 허삼관이 제사공장에서 누에고치를 실크로 만드는 일을 하면서 시작된다. 그는 마을 어른들로부터 "몸이 튼튼하다는 증거이자, 피를 팔고 난 뒤 볶은 돼지 간 한 접시와 데운 황주 두 냥을 마시는 것이 진짜 사내의 호사"라는 말을 듣는다. 그는 생애 처음으로 피를 팔고, 그 돈으로 호기롭게 돼지 간과 황주를 즐긴다. 이 '매혈 후 의식'은 그의 인생을 관통하는 중요한 상징이 된다.

 

어느 날 그는 마을 최고의 미녀이자 '꽈배기 서시'라 불리는 허옥란에게 반한다. 이미 약혼자가 있는 그녀의 마음을 얻기 위해, 허삼관은 다시 한번 피를 판 돈으로 그녀에게 맛있는 음식들을 사주며 끈질기게 구애하고, 마침내 결혼에 성공한다. 그렇게 그는 사랑하는 아내와 일락, 이락, 삼락 세 아들을 둔 가장이 된다.

 

 

2부: 피보다 진한 아버지의 이름 

 

가정의 행복은 "큰아들 일락이 허삼관의 아들이 아니라, 허옥란의 옛 애인이었던 하소용의 아들"이라는 소문이 퍼지면서 산산조각 난다. 일락의 얼굴이 하소용과 꼭 닮았기 때문이다. 허삼관은 온 동네 사람들의 놀림감이 되었다는 수치심에 분노하며 일락을 모질게 대한다. "남의 자식을 위해 돈을 쓸 수 없다"며 일락만 빼고 다른 두 아들에게만 국수를 사주는 그의 모습은 옹졸하기 짝이 없다.

 

그러던 어느 날, 일락이 싸움을 하다 상대방의 머리를 깨뜨리는 사고를 친다. 피해자 가족이 막대한 치료비를 요구하며 집에 쳐들어오자, 허삼관은 갈등에 휩싸인다. "내 아들도 아닌 놈을 위해 내 피를 팔 순 없다"고 소리치지만, 결국 그는 피를 팔아 치료비를 마련한다. 이것은 그의 인생에서 처음으로 '가족을 위해' 행한 매혈이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그는 비로소 피가 섞이지 않았을지 모르는 아이의 '진짜 아버지'가 되어간다.

 

 

3부: 위기의 순간마다 피를 파는 아버지

 

이후 허삼관의 삶은 거대한 역사의 파도와 일상적인 위기의 연속이다. 그리고 그는 그때마다 어김없이 병원으로 가 피를 판다.

대기근의 시대에는 온 가족이 굶주림에 죽어갈 위기에 처하자, 그는 몰래 피를 팔아 온 가족에게 평생 잊지 못할 국수 한 그릇씩을 사 먹인다.

문화대혁명의 시대에는 하방(下放) 운동으로 큰아들 일락이 시골 농촌으로 떠나고, 그곳에서 간염에 걸려 사경을 헤맨다. 아들을 도시의 큰 병원으로 데려오기 위해, 허삼관은 여러 도시를 전전하며 단기간에 여러 차례 피를 판다. 피를 너무 많이 판 나머지 길바닥에 쓰러지기까지 하는 그의 여정은 처절하고 눈물겹다.

 

둘째 아들이 속한 생산대의 대장이 사고를 당했을 때도, 아내 허옥란이 병에 걸렸을 때도, 집에 손님을 대접해야 할 때도 그는 어김없이 피를 팔아 위기를 넘긴다. 그의 몸에서 빠져나온 피는, 가족의 생명수이자 위기를 해결하는 만능 열쇠가 된다.

 

 

4부: 마지막 매혈, 그리고 눈물 

 

세월이 흘러 시대는 안정을 찾고, 아들들은 모두 장성했으며, 가정 형편도 나아졌다. 어느 날 우연히 길에서 피 파는 사람들을 본 허삼관은 문득 향수에 젖어 자신도 피를 팔고 싶다는 생각에 사로잡힌다. 위기 때문이 아니라, 오직 젊은 시절의 의식이었던 '볶은 돼지 간과 데운 황주'를 즐기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병원의 새로운 혈두(피를 관리하는 책임자)는 그의 나이 든 얼굴과 남루한 행색을 보더니 "당신 피는 돼지 피나 다름없소. 아무도 사지 않소"라며 그를 모욕하고 쫓아낸다. 그 순간 허삼관은 무너져 내린다. 평생 가족을 구원했던 자신의 유일한 능력과 자부심의 원천이 이제는 쓸모없어졌다는 사실에 그는 길거리 한복판에 주저앉아 서럽게 운다. "이제 집안에 무슨 일이 생겨도 나는 피를 팔 수가 없어. 나는 이제 쓸모없는 인간이야..."

 

이 소식을 들은 그의 세 아들과 아내 허옥란은 그를 찾아와, 자신들의 돈으로 그가 평생 먹고 싶어 했던 '볶은 돼지 간과 데운 황주'를 사준다. 이제는 아버지가 피를 팔지 않아도 된다고, 아버지는 그 존재만으로도 소중하다고 위로하면서. 허삼관은 가족의 위로 속에서, 자신의 인생이 헛되지 않았음을 깨닫는다.

 

 

 

비극을 희극으로, 눈물을 웃음으로

 

 

위화 작가 특유의 '해학' '허삼관매혈기'의 가장 위대한 성취는 이토록 비극적인 이야기를 놀랍도록 재미있게 읽게 만드는 작가의 힘에 있다. 등장인물들은 지독한 가난과 억압 속에서도 끊임없이 다투고, 허풍을 떨고, 어리석은 행동을 반복한다. 허삼관이 아내 허옥란과 벌이는 유치한 부부싸움, 피를 팔기 위해 물을 잔뜩 마셔 피의 양을 늘리려는 모습 등은 웃음을 자아낸다. 이러한 유머(해학)는 독자들이 비극의 무게에 짓눌리지 않고, 오히려 그들의 삶에 깊이 공감하고 애정을 느끼게 만드는 탁월한 장치다.

 

'피'의 다층적 상징 소설에서 '피'는 단순한 혈액이 아니다. 그것은 ①돈이자 생계 수단, ②남성성의 증명, ③가족을 구원하는 성수(聖水), ④그리고 아버지의 사랑 그 자체다. 특히 일락의 친자 논쟁을 통해, 작가는 '혈연(血緣)'이라는 생물학적 피보다, 가족을 위해 기꺼이 흘리는 '희생의 피'가 더 고귀하고 진실된 것임을 역설한다. 허삼관은 피를 팔아 진정한 아버지가 된다.

음식을 통한 구원과 위로 피를 판 대가는 언제나 '음식'으로 돌아온다. 볶은 돼지 간, 국수, 옥수수죽 등. 소설 속 음식은 단순한 먹거리가 아니라, 고된 삶을 버티게 하는 '위로'이자 '구원'이다. 대기근 속에서 온 가족이 함께 먹는 국수 한 그릇의 장면은, 이 소설에서 가장 아름답고 눈물겨운 장면 중 하나다.

 

 

 

소시민 가장, 허삼관과 우리들의 아버지

 

 

한국의 문학이나 영화에 등장하는 '아버지'는 종종 과묵하고, 엄격하며, 국가와 민족이라는 거대 담론 속에서 자신을 희생하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반면, 허삼관은 지극히 평범하고, 심지어 옹졸하고 이기적인 소시민이다. 그는 국가나 이념을 위해 피를 팔지 않는다. 오직 내 가족의 배고픔과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피를 판다.

 

바로 이 지점이 허삼관이라는 인물에 전 세계 독자들이 공감하는 이유다. 그는 영웅이 아니며,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속물적인 아버지의 모습과 닮았다. 하지만 가장 결정적인 순간에 자신의 몸을 내던져 가족을 지켜내는 그의 모습은, 그 어떤 영웅보다도 숭고하다. 이념의 시대가 가고 가족의 가치가 중요해진 오늘날, 허삼관의 '가족 이기주의'는 오히려 가장 보편적인 휴머니즘으로 다가온다.

 

 

 

세상 모든 아버지를 위한 찬가

 


 

'허삼관매혈기'는 가장 비극적인 시대의 이야기를 가장 희극적인 방식으로 풀어낸 걸작이다. 책을 읽는 내내 독자는 허삼관의 어리석음에 웃다가, 그의 끈질긴 생명력에 감탄하고, 그의 숭고한 부성애에 눈물을 흘리게 될 것이다.

가족을 위해 모든 것을 내어준 이 세상 모든 아버지들의 삶을 이해하고 싶은 분, 지독한 비극 속에서도 피어나는 유머와 인간애의 힘을 믿는 독자들에게 이 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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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삼관매혈기', 피를 팔아 시대를 건넌 한 남자의 눈물겨운 해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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