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과 중국의 패권 경쟁이 무역, 기술을 넘어 이제 '화폐'라는 보이지 않는 전선으로 이동하고 있다. 그 중심에는 중국이 세계 주요국 중 가장 앞서 추진 중인 중앙은행 디지털화폐(CBDC), 즉 '디지털 위안화(e-CNY)'가 있다. 이는 단순히 결제 편의성을 높이는 핀테크 혁신을 넘어, 지난 70여 년간 세계 경제를 지배해 온 달러의 아성에 균열을 내려는 장기적이고 치밀한 국가 전략의 일환이다. 비록 당장은 그 파급력이 미미해 보이지만, 디지털 위안화는 달러 중심의 국제 금융 질서에 대한 '조용한 도전'을 시작했다.
국내 통제력 강화와 국경 밖 야망
2019년 시범 운영을 시작한 디지털 위안화는 현재 중국 내에서 착실히 그 영역을 넓혀가고 있다. 2025년 6월 말 기준, 누적 거래액은 ‘7조 위안(약 1,330조 원)’을 돌파했으며, 개인 지갑 개설 수는 3억 개에 육박한다. 일부 도시에서는 공무원 월급, 교통비, 공과금 납부 등에 활용되며 점차 실생활에 뿌리내리고 있다.
중국 정부가 디지털 위안화를 추진하는 첫 번째 목표는 명확하다. 바로 국내 금융 시스템에 대한 완벽한 통제력 확보다. 알리페이와 위챗페이가 장악한 민간 결제 시장에 '국가대표'를 투입함으로써, 정부는 모든 거래 흐름을 실시간으로 파악할 수 있는 '통제 가능한 익명성'을 확보하게 된다. 이는 자금 세탁, 탈세 등 불법 행위를 원천 차단하고 통화 정책의 효율성을 극대화하는 강력한 수단이다.
그러나 중국의 야망은 국경 안쪽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디지털 위안화의 진정한 목표는 위안화의 국제화와 미국의 금융 제재로부터의 탈피에 있다. 현재 국제 무역 결제와 외환 보유고의 대부분은 달러가 차지하고 있으며, 이는 국제은행간통신협회(SWIFT)망을 통해 처리된다. 미국은 이 SWIFT망을 통제하며 이란, 러시아 등에 대한 금융 제재를 가해왔다. 중국은 디지털 위안화를 통해 SWIFT를 우회하는 독자적인 국제 결제 시스템을 구축함으로써, 미국의 잠재적인 금융 공격으로부터 자국을 보호하고 위안화 사용을 확대하려는 것이다.
'm브릿지' 프로젝트: 달러 없는 세상의 실험
디지털 위안화의 국제화 야망이 가장 뚜렷하게 드러나는 곳은 'm브릿지(mBridge)' 프로젝트다. 이는 중국, 홍콩, 태국, 아랍에미리트(UAE) 중앙은행이 국제결제은행(BIS)과 함께 추진하는 다자간 CBDC 플랫폼이다.
m브릿지는 각국 중앙은행이 발행한 디지털화폐를 이용해 중개 은행 없이 국가 간 거래를 실시간으로 직접 결제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기존의 달러 기반 해외 송금이 여러 중개 은행을 거치며 수일이 걸리고 높은 수수료가 발생했던 것과 비교하면, m브릿지는 시간과 비용을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다. 2024년 말 MVP(최소기능제품) 단계에 도달한 이 프로젝트는 2025년 들어 사우디아라비아까지 참여를 선언하며 규모를 키우고 있다.
중국은 이 프로젝트를 통해 일대일로(一带一路) 참여국이나 상하이협력기구(SCO) 회원국 등 자국과 경제적 유대가 깊은 국가들을 중심으로 '위안화 경제권'을 구축하려 하고 있다. 특히 미국의 제재를 받고 있는 국가들에게 SWIFT를 대체할 수 있는 '숨통'을 제공함으로써, 달러 중심의 금융 질서에 반대하는 국가들을 규합하는 구심점 역할을 할 수 있다.
넘기 힘든 '달러의 벽'
이러한 중국의 야심 찬 계획에도 불구하고, 디지털 위안화가 단기간에 달러의 패권을 위협하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전망이 지배적이다. 몇 가지 근본적인 한계 때문이다.
자본 통제와 낮은 신뢰도: 중국은 여전히 엄격한 자본 통제를 시행하고 있어 위안화의 자유로운 환전과 이동이 제한된다. 이는 위안화가 국제적인 준비자산이나 결제 통화로 기능하는 데 가장 큰 걸림돌이다. 또한, 모든 거래가 정부에 의해 감시될 수 있다는 '빅브라더'의 이미지는 투명성과 법치주의를 중시하는 국제 금융 시장에서 신뢰를 얻기 어렵게 만든다.
네트워크 효과: 달러는 지난 수십 년간 전 세계에 촘촘한 네트워크를 구축했다. 전 세계 중앙은행의 외환보유고 중 달러 비중은 여전히 ‘60%’에 육박하는 반면, 위안화는 3% 미만에 불과하다. 모두가 사용하는 화폐를 바꾸는 데에는 엄청난 전환 비용이 따르기에, 달러의 '현직 프리미엄'은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
결론적으로, 디지털 위안화는 당장 달러를 왕좌에서 끌어내릴 '게임 체인저'라기보다는, 달러 중심의 단극 체제에 다극화를 유도하는 '조용한 균열'에 가깝다. 중국은 전면전이 아닌, 자국의 영향력이 미치는 영역에서부터 차근차근 위안화 사용을 늘려가는 장기적인 전략을 택하고 있다. 이 조용한 도전이 30년 뒤 국제 금융 지도를 어떻게 바꿀지, 세계는 이제 막 그 서막을 지켜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