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형제애와 통일'은 어떻게 증오와 학살의 동의어가 되었나
- 티토의 유산 위에 피어난 민족주의의 광기, 20세기 말 유럽의 심장을 겨눈 비극의 전말
냉전의 견고한 장벽이 무너지고 평화와 화합의 서사가 전 세계를 뒤덮던 1990년대, 발칸반도는 역사의 퇴보를 증명하듯 끔찍한 야만의 시대로 회귀했다. '인종청소(Ethnic Cleansing)'. 특정 민족과 문화를 이 땅에서 완전히 지워버리려는 이 섬뜩한 목표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에서 다시는 없을 것이라 믿었던 집단 학살, 강간, 추방의 광풍을 불러왔다. '남슬라브인의 땅'이라는 이상적 이름으로 탄생했던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은 어째서 이토록 참혹하게 무너져 내렸는가. 오늘일보 기획특집 '5분 세계사 이슈 100선' 첫 편에서는 유고슬라비아 인종청소라는 비극의 뿌리 깊은 역사적 배경부터 피로 얼룩진 진행 과정, 그리고 21세기인 오늘날까지도 발칸반도에 깊은 상흔으로 남은 결과와 과제를 알아본다.
1. 불안한 공존: 봉합되었으나 아물지 않은 상처
유고슬라비아의 비극을 단지 한 독재자의 광기나 순간의 정치적 격변으로 설명하는 것은 사건의 본질을 왜곡하는 것이다. 그 뿌리는 수백 년에 걸쳐 형성된 민족, 종교, 이념의 복잡한 갈등에 맞닿아 있다.
본래 발칸반도는 동로마와 서로마, 가톨릭과 동방정교, 이슬람 오스만 제국과 기독교 유럽이 충돌하는 문명의 교차로였다. 이러한 지정학적 특성은 이 지역에 다양한 민족과 종교가 모자이크처럼 공존하는 결과를 낳았다. 세르비아인(세르비아 정교), 크로아티아인(가톨릭), 보스니아인(이슬람), 슬로베니아인(가톨릭), 몬테네그로인(세르비아 정교), 마케도니아인(마케도니아 정교) 등은 같은 남슬라브계라는 언어적 공통점을 가졌지만, 각기 다른 종교와 역사적 경험을 통해 뚜렷한 개별 정체성을 형성해왔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하나의 국가, 세 개의 종교, 네 개의 언어, 다섯 개의 민족, 여섯 개의 공화국'이라는 복잡한 구조의 유고슬라비아 왕국이 탄생했지만, 이는 세르비아 중심주의에 대한 타 민족의 불만을 낳으며 불안한 출발을 알렸다. 제2차 세계대전은 이 갈등의 골을 회복 불가능한 수준으로 벌려놓았다. 나치 독일이 유고슬라비아를 침공하자, 크로아티아의 극우 민족주의 단체 '우스타샤'는 나치의 괴뢰 정권인 크로아티아 독립국을 세우고 수십만 명의 세르비아인, 유대인, 집시를 잔혹하게 학살했다. 이에 맞서 세르비아 민족주의자들인 '체트니크' 역시 크로아티아인과 보스니아인에 대한 보복 학살을 자행했다.
이 피비린내 나는 내전의 혼란 속에서 요시프 브로즈 티토가 이끄는 다민족 연합의 파르티잔은 최종 승리를 거두었다. 전후 사회주의 연방을 수립한 티토는 강력한 카리스마와 권위를 바탕으로 '형제애와 통일(Bratstvo i jedinstvo)'이라는 구호 아래 모든 민족주의를 철저히 억눌렀다. 그는 각 민족에게 자치권을 부여하는 공화국 체제를 도입하여 균형을 맞추는 한편, 민족주의적 발언이나 활동을 엄격히 처벌하며 갈등을 수면 아래로 잠재웠다. 그의 통치 아래 유고슬라비아는 수십 년간 외형적인 평화와 안정을 누렸다. 그러나 이는 문제의 해결이 아닌, 강력한 힘에 의한 '억압된 평화'였다.
2. 판도라의 상자: 민족주의의 망령이 깨어나다
1980년, 유고슬라비아를 35년간 통치했던 '구심점' 티토가 사망하자 억눌려 있던 판도라의 상자가 열렸다. 1980년대 내내 유고슬라비아는 심각한 경제 위기에 시달렸고, 이는 각 공화국 간의 경제적 불평등을 부각하며 민족 갈등을 재점화하는 기폭제가 되었다. 상대적으로 부유했던 북부의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는 가난한 남부 공화국, 특히 세르비아에 대한 경제적 지원에 불만을 품기 시작했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 세르비아 공산당 지도자였던 슬로보단 밀로셰비치는 민족주의라는 위험한 불꽃에 기름을 부었다. 그는 1989년 코소보 자치주에서 열린 '가지메스탄 전투 600주년 기념식' 연설에서 "세르비아인들은 다시 전투와 마주하고 있다"고 선언하며 노골적으로 '대세르비아주의'를 선동했다. 과거 오스만 제국에 맞서 싸웠던 세르비아 민족의 영광을 상기시키고, 타 민족(특히 알바니아계와 크로아티아계)에 대한 적개심을 부추기며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다져나갔다.
밀로셰비치의 선동은 연쇄 반응을 일으켰다. 세르비아 민족주의의 팽창에 위협을 느낀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에서도 민족주의 정서가 급격히 확산되었다. 1990년 각 공화국에서 실시된 다당제 선거에서 민족주의 정당들이 압승을 거두면서 유고슬라비아 연방의 붕괴는 시간문제가 되었다. 1991년 6월 25일,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가 연방으로부터의 독립을 공식 선언하자, 세르비아가 장악하고 있던 유고슬라비아 인민군(JNA)이 이를 저지하기 위해 군사적으로 개입하면서 발칸반도는 기나긴 전쟁의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들었다.
3. 지옥의 연대기: '인종청소'의 참혹한 전개
유고 내전은 단순한 영토 분쟁이 아니었다. 특정 지역에서 다른 민족을 완전히 제거하여 민족적으로 단일한 공간을 만들려는 '인종청소'가 전쟁의 핵심 전략으로 자행되었다. 이 과정에서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잔혹 행위가 벌어졌다.
- 크로아티아 전쟁 (1991-1995): 크로아티아 내 세르비아계 주민들은 유고 인민군의 지원을 받아 '세르비아 크라이나 공화국' 수립을 선포하고 크로아티아 정부군과 격렬한 전투를 벌였다. 이 과정에서 부코바르, 두브로브니크 등 역사적인 도시들이 무차별 포격으로 파괴되었고, 양측 모두 민간인 학살과 추방을 자행했다.
- 보스니아 전쟁 (1992-1995): 인종청소가 가장 체계적이고 잔혹하게 자행된 곳은 '작은 유고슬라비아'라 불릴 만큼 다민족이 섞여 살던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였다. 보스니아가 독립을 선언하자, 보스니아 내 세르비아계는 라도반 카라지치를 중심으로 '스르프스카 공화국'을 세우고 유고 인민군의 지원 하에 대대적인 공격을 개시했다. 그들의 목표는 명확했다. 보스니아인(무슬림)과 크로아티아인을 학살, 강간, 추방하여 세르비아인만의 영토를 확보하는 것이었다.
수도 사라예보는 1,425일간 세르비아계 군대에 의해 포위되어 시민들은 저격과 포격의 공포 속에서 살아야 했다. 포차, 비셰그라드 등 동부 보스니아 지역에서는 세르비아계 군인과 준군사조직이 보스니아인 마을을 습격하여 남성들을 학살하고 여성들을 '강간 수용소'로 끌고 가 조직적으로 유린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 비극의 정점은 1995년 7월 스레브레니차에서 벌어졌다. 유엔이 '안전지대'로 선포했음에도 불구하고, 라트코 믈라디치가 이끄는 세르비아계 군대는 이곳에 피신해 있던 8,000명 이상의 보스니아 남성과 소년들을 불과 며칠 만에 조직적으로 학살했다. 이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 땅에서 벌어진 최악의 집단 학살로 기록되었다.
- 코소보 전쟁 (1998-1999): 보스니아 전쟁이 데이턴 협정으로 봉합된 후, 갈등의 무대는 세르비아 남부의 코소보 자치주로 옮겨갔다. 주민의 90%가 알바니아계였던 코소보에서 분리독립을 요구하는 코소보 해방군(KLA)의 무장 투쟁이 격화되자, 밀로셰비치 정권은 '테러리스트 소탕'을 명분으로 군대와 경찰을 투입하여 알바니아계 주민에 대한 대규모 인종청소를 자행했다. '말발굽 작전'으로 명명된 이 계획 아래 수십만 명의 알바니아계 주민들이 학살당하거나 국외로 추방되었다. 이 참상은 결국 NATO의 78일간의 유고슬라비아 공습을 불러왔고, 전쟁은 밀로셰비치 정권의 패배로 막을 내렸다.
4. 상흔과 과제: 끝나지 않은 비극
10년에 걸친 전쟁과 인종청소는 발칸반도에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수십만 명이 목숨을 잃었고, 수백만 명이 집을 잃고 난민이 되었다. 사회 기반 시설은 완전히 파괴되었고, 경제는 파탄에 이르렀다. 그러나 물리적인 피해보다 더 깊은 상처는 사람들의 마음에 새겨진 증오와 불신이었다. 한때 이웃으로 살았던 이들이 서로에게 총부리를 겨눴던 끔찍한 기억은 공동체의 완전한 회복을 가로막는 거대한 장벽이 되었다.
국제 사회는 구유고슬라비아 국제형사재판소(ICTY)를 설립하여 밀로셰비치, 카라지치, 믈라디치 등 전쟁 범죄의 핵심 책임자들을 단죄했다. 이는 국가 지도자라 할지라도 반인도적 범죄에 대한 책임을 피할 수 없다는 중요한 선례를 남겼다.
그러나 법적인 청산이 역사의 완전한 화해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오늘날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는 여전히 세르비아계, 크로아티아계, 보스니아계의 복잡한 연방 체제 속에서 불안한 공존을 이어가고 있다. 코소보는 독립을 선언했지만 세르비아와 국제 사회의 일부는 여전히 이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각 민족은 자신들을 '피해자'로 규정하는 역사관을 고수하며, 과거사에 대한 진정한 성찰과 화해는 요원한 과제로 남아있다.
유고슬라비아의 비극은 경제적 위기와 정치적 리더십의 부재가 민족주의라는 망령과 결합했을 때, 인류가 얼마나 쉽게 야만으로 퇴행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뼈아픈 교훈이다. 이 역사를 기억하고 성찰하는 것만이 발칸반도가, 그리고 인류가 같은 비극을 되풀이하지 않는 유일한 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