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5-10-22(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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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피로 그은 국경선’, 78년의 증오: 인도-파키스탄 분쟁사
    1947년 8월, 대영제국의 가장 빛나는 보석으로 불렸던 인도는 200년에 걸친 식민 지배에서 벗어나 감격적인 독립을 맞이했다. 그러나 해방의 기쁨은 잠시, '파티션(Partition, 분할)'이라는 이름의 거대한 비극이 인도 아대륙을 덮쳤다. 힌두교 중심의 인도와 이슬람 국가 파키스탄이라는 두 개의 국가로 분리되는 과정에서 인류 역사상 최악의 유혈 사태와 난민 행렬이 발생했다. 하나의 문명권을 공유했던 형제들은 종교라는 이름 아래 서로에게 총칼을 겨눴고, 그날의 상처는 78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아물지 않은 채 남아시아의 평화를 위협하는 가장 위험한 화약고가 되었다. 특히 양국 모두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다는 사실은 ‘카슈미르’라는 분쟁의 핵이 언제든 인류 전체를 위협하는 핵전쟁으로 비화할 수 있다는 끔찍한 시나리오를 상정하게 한다. 1. 분할의 씨앗: 영국의 '분할 통치'와 종교 갈등의 격화 인도-파키스탄 분쟁의 근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영국 식민 통치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수백 년간 다양한 종교와 민족이 공존해왔던 인도 아대륙에서 종교적 정체성이 정치적 분열의 도구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영국의 식민 통치 전략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영국은 거대한 인도 아대륙을 효율적으로 통치하기 위해 ‘분할 통치(Divide and Rule)’ 정책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힌두교도와 무슬림 사이의 기존 사회적, 종교적 차이를 의도적으로 부각하고 갈등을 조장하여 인도인들의 단합된 저항을 막으려 했다. 1905년 벵골 분할령이 대표적인 예다. 영국은 행정 효율성을 명분으로 내세웠지만, 실제로는 힌두교도가 다수인 서벵골과 무슬림이 다수인 동벵골로 나누어 양측의 종교적 대립을 격화시키려는 의도였다. 이러한 영국의 정책은 인도 내 민족주의 운동의 방향에도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초기 독립운동을 주도한 **인도국민회의(Indian National Congress)**는 종교를 초월한 세속적이고 단일한 인도를 지향했다. 마하트마 간디, 자와할랄 네루 등 지도자들은 모든 인도인이 종교와 상관없이 하나로 뭉쳐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국민회의 내에서 힌두 민족주의 색채가 점차 강화되자, 무슬림 지도자들은 정치적 소외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자신들의 권익이 다수파인 힌두교도에 의해 침해될 것을 우려한 이들은 1906년 **전인도무슬림연맹(All-India Muslim League)**을 결성했다. 초기 무슬림연맹은 무슬림의 권익 보호를 목표로 했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분리주의 노선으로 기울었다. 변호사 출신의 냉철한 정치가 무함마드 알리 진나가 무슬림연맹의 지도자로 부상하면서 분리주의는 거스를 수 없는 대세가 되었다. 그는 힌두교와 이슬람은 단순히 종교가 아니라 서로 다른 사회 질서와 문화를 가진 '두 개의 민족(Two-Nation Theory)'이며, 따라서 무슬림은 자신들만의 독립적인 국가를 가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영국의 통치력이 급격히 약화되면서, 진나의 '파키스탄(순수한 자들의 땅)' 구상은 점차 현실화되기 시작했다. 2. 피로 그은 국경선: 1947년 '파티션'의 비극 1947년, 인도의 마지막 총독으로 부임한 루이 마운트배튼은 영국의 조속한 철수를 목표로 인도 분할을 기정사실화했다. 인도의 분할 방식과 국경선을 결정하는 임무는 영국의 변호사 시릴 래드클리프에게 맡겨졌다. 인도에 대한 사전 지식이 전무했던 그는 낡은 지도와 인구 통계 자료에만 의존해 불과 5주 만에 수천 킬로미터에 달하는 국경선(래드클리프 라인)을 급조했다. 이 국경선은 수백 년간 함께 살아온 마을과 공동체, 심지어 한 가족의 집까지 하루아침에 갈라놓았다. 특히 무슬림, 힌두교도, 시크교도가 섞여 살던 펀자브와 벵골 지역의 분할은 재앙적인 결과를 낳았다. 1947년 8월 14일 파키스탄이, 15일 인도가 각각 독립을 선포하자, 국경선 반대편에 살게 된 소수 종교 집단에 대한 광기 어린 폭력이 인도 아대륙 전역을 휩쓸었다. 힌두교도와 시크교도는 무슬림을, 무슬림은 힌두교도와 시크교도를 공격했다. 집단 학살, 방화, 약탈, 강간이 자행되었고, 마을 전체가 불타 사라졌다. 이 끔찍한 종교 폭동으로 인해 최소 100만 명 이상이 목숨을 잃은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약 1,500만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자신의 종교에 맞는 국가를 찾아 필사적인 피난길에 올랐다. 이는 인류 역사상 가장 거대하고 비극적인 강제 이주였다. 기차는 양측에서 학살당한 시신들을 싣고 국경을 넘나들었고, '유령 열차'라 불리며 분할의 참상을 증언했다. 이 '파티션'의 상처와 증오는 독립 이후 양국 관계를 규정하는 원죄가 되었다. 3. '지상의 낙원'에서 '세계의 화약고'로: 카슈미르 분쟁 분할 과정에서 대부분의 번왕국(토후국)들은 종교 인구 구성에 따라 인도 혹은 파키스탄으로 귀속되었다. 그러나 히말라야 산맥에 위치한 아름다운 계곡 잠무-카슈미르는 예외였다. 이곳은 주민의 다수가 무슬림이었지만, 통치자인 마하라자(번왕)는 힌두교도인 하리 싱이었다. 그는 독립 국가로 남기를 원하며 귀속 결정을 미뤘다. 상황이 급변한 것은 1947년 10월, 파키스탄의 지원을 받은 파슈툰족 무장 부족들이 카슈미르를 침공하면서부터다. 다급해진 하리 싱은 인도의 자와할랄 네루 총리에게 군사 지원을 요청했고, 인도는 카슈미르의 인도 귀속을 조건으로 군대를 파병했다. 이에 파키스탄 정규군이 개입하면서 양국 간의 **제1차 인도-파키스탄 전쟁(1947-1948)**이 발발했다. 전쟁은 유엔의 중재로 1949년 정전 협정이 맺어지며 일단락되었다. 이때 설정된 **정전 통제선(Line of Control, LoC)**을 기준으로 카슈미르는 인도령 잠무-카슈미르(전체의 약 2/3)와 파키스탄령 아자드-카슈미르(약 1/3)로 분할되었다. 유엔은 카슈미르의 최종 귀속을 주민투표로 결정하라고 권고했지만, 인도는 파키스탄군의 완전 철수를 선결 조건으로 내세우며 사실상 이를 거부했다. 이후 카슈미르는 양국 간 갈등의 핵심이자 세 차례의 전면전과 수많은 국지전의 무대가 되었다. 제2차 인도-파키스탄 전쟁 (1965): 파키스탄이 인도령 카슈미르에 무장 세력을 침투시켜 주민 봉기를 유도하려다 실패하면서 발발했다. 대규모 기갑전과 공중전이 벌어졌으나, 양측 모두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지 못한 채 소련의 중재로 전쟁 이전의 상태로 돌아갔다. 카르길 전쟁 (1999): 파키스탄군이 LoC를 넘어 인도 측 카르길 지역의 고지대를 점령하면서 발발했다. 험준한 산악 지대에서 벌어진 이 전쟁은 양국이 핵보유국이 된 이후 처음 벌어진 군사 충돌이라는 점에서 국제 사회의 큰 우려를 낳았다. 결국 파키스탄은 국제적 압력 속에 철수했고, 인도의 승리로 끝났다. 2019년, 인도의 나렌드라 모디 정부는 헌법 제370조를 폐지하여 70년간 잠무-카슈미르에 부여되었던 특별 자치 지위를 박탈하고 중앙 정부의 직접 통치하에 두었다. 이 조치는 카슈미르 지역의 이슬람 분리주의 운동을 더욱 자극하고 파키스탄의 거센 반발을 불러일으키며, 카슈미르의 긴장을 다시 한번 최고조로 끌어올렸다. 오늘날에도 LoC를 따라 양국 군의 총격전과 테러리스트의 침투 시도가 끊이지 않고 있다. 4. 방글라데시의 탄생과 핵무장: 확전되는 갈등 양국의 갈등은 카슈미르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1971년, 분쟁은 동파키스탄(현재의 방글라데시)에서 다시 한번 폭발했다. 독립 당시 파키스탄은 인도 아대륙을 사이에 두고 1,600km나 떨어진 서파키스탄과 동파키스탄으로 구성된 기이한 형태의 국가였다. 언어, 인종, 문화가 전혀 다른 두 지역은 이슬람이라는 종교 하나만으로 묶여 있었다. 정치와 경제의 중심이었던 서파키스탄은 벵골인이 대다수인 동파키스탄을 경제적으로 착취하고 정치적으로 억압했다. 1970년 총선에서 동파키스탄의 자치권을 주장하는 아와미 연맹이 압승을 거두자, 서파키스탄 군부는 선거 결과를 무시하고 무력 진압에 나섰다. 이 과정에서 수십만 명의 벵골인이 학살당하고, 천만 명에 가까운 난민이 인도로 유입되었다. 인도는 이를 파키스탄을 약화시킬 절호의 기회로 보고, 동파키스탄의 독립군을 지원하며 군사적으로 개입했다. 이것이 **제3차 인도-파키스탄 전쟁(1971)**이다. 전쟁은 단 13일 만에 인도의 압도적인 승리로 끝났다. 파키스탄군은 항복했고, 동파키스탄은 방글라데시라는 이름의 독립 국가로 탄생했다. 이 패배는 파키스탄에 씻을 수 없는 굴욕을 안겨주었고, 인도의 군사적 우위에 대한 깊은 불안감을 심어주었다. 이러한 군사적 열세를 만회하고 인도에 대항하기 위해 파키스탄은 비밀리에 핵 개발에 착수했다. 인도가 1974년 첫 핵실험에 성공하자 파키스탄은 더욱 박차를 가했다. 마침내 1998년 5월, 인도가 두 번째 핵실험을 단행하자 파키스탄 역시 며칠 간격으로 핵실험을 실시하며 공식적인 핵보유국이 되었다. 이로써 인도 아대륙은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핵 분쟁 지대로 변모했다. 양측의 재래식 군사 충돌이 언제든 상대방의 오판을 불러 핵전쟁으로 확대될 수 있다는 공포가 현실이 된 것이다. 5. 끝나지 않는 대결: 테러리즘과 위태로운 평화 카르길 전쟁 이후 양국은 전면전을 피하는 대신, 비대칭적인 방식으로 갈등을 이어가고 있다. 파키스탄, 특히 군부와 정보기관(ISI)은 카슈미르의 분리주의 무장 단체나 이슬람 극단주의 테러 조직을 은밀히 지원하여 인도를 공격하는 전략을 사용해왔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2008년 11월, 파키스탄에 기반을 둔 테러 조직 라슈카르에타이바가 인도의 경제 중심지 뭄바이에서 동시다발 테러를 자행하여 166명이 사망한 사건은 양국 관계를 최악으로 치닫게 했다. 이 외에도 인도 의회 테러(2001), 파탄코트 공군기지 테러(2016), 풀와마 자폭 테러(2019) 등 파키스탄과 연계된 것으로 추정되는 대규모 테러가 발생할 때마다 양국은 전쟁 직전의 상황까지 내몰렸다. 물론 양국 관계에 평화를 위한 노력이 전무했던 것은 아니다. 1972년 심라 협정, 1999년 라호르 선언 등을 통해 양국 정상은 대화와 협력을 통한 문제 해결을 약속했다. 크리켓 외교, 버스 노선 개통 등 다양한 신뢰 구축 조치들이 시도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평화의 시도는 번번이 대규모 테러나 국내 정치적 반대에 부딪혀 좌절되었다. 오늘날 인도와 파키스탄 관계는 여전히 살얼음판 위를 걷고 있다. 인도의 모디 정부는 강력한 힌두 민족주의를 기반으로 파키스탄에 대한 강경 노선을 고수하고 있으며, 파키스탄은 정치적 불안정과 경제난 속에서 군부의 영향력이 여전히 막강하다. 78년 전 '파티션'의 광기 속에서 태어난 두 나라는 여전히 서로를 향한 불신과 증오의 벽을 넘지 못하고 있다. 핵무기라는 비극적 공통점을 가진 두 형제 국가가 과거의 상처를 딛고 진정한 평화와 공존의 길을 찾을 수 있을지, 전 세계가 여전히 우려 섞인 시선으로 지켜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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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8-23
  • 끝나지 않는 비극,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 100년사
    지중해와 요르단강 사이에 자리한 좁고 긴 땅. 유대인에게는 2000년 디아스포라의 종착점이자 신이 약속한 땅(Eretz Yisrael)이며, 팔레스타인인에게는 수 세대에 걸쳐 삶의 터전이었던 고향(Filastin)이다. 이 하나의 땅을 둘러싼 두 민족의 열망은 20세기를 관통하며 가장 해결하기 어렵고 폭력적인 분쟁의 역사를 써 내려왔다. 종교, 민족, 영토, 자원이 복잡하게 얽힌 이 갈등은 단순한 지역 분쟁을 넘어 국제 정치의 대리전이자 인류의 양심을 시험하는 무대가 되었다. 오늘일보 기획특집 두 번째 편에서는 100년 넘게 이어져 온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의 역사적 씨앗부터 현재의 참상까지, 그 피와 눈물의 연대기를 알아본다. 1. 비극의 서막: 시오니즘과 영국의 이중 약속 오늘날 분쟁의 직접적인 뿌리는 19세기 말 유럽에서 태동한 시오니즘(Zionism) 운동에서 찾을 수 있다. 유럽 전역에 만연한 반유대주의에 직면한 유대인들은 박해를 피해 자신들의 민족 국가를 건설해야 한다는 열망을 키웠고, 그들의 시선은 성서에 기록된 고향, 팔레스타인을 향했다. 테오도르 헤르츨을 중심으로 조직화된 시오니즘 운동은 전 세계에 흩어져 있던 유대인들의 팔레스타인 이주(알리야, Aliyah)를 촉진했다. 당시 오스만 제국의 지배하에 있던 팔레스타인에는 아랍인들이 다수를 이루며 살고 있었다. 제1차 세계대전은 이 미묘한 균형을 깨뜨리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오스만 제국과 전쟁을 벌이던 영국은 승리를 위해 서로 모순되는 두 개의 약속을 남발하며 훗날 닥쳐올 재앙의 씨앗을 뿌렸다. 1915년, 영국은 아랍의 지도자 후세인 빈 알리와의 서신 교환(맥마흔 서한)을 통해 오스만 제국에 대항해 봉기하면 전후 아랍의 독립을 지원하겠다고 암시했다. 아랍인들은 이 약속을 믿고 영국을 도와 오스만 제국에 맞서 싸웠다. 그러나 불과 2년 뒤인 1917년, 영국은 전쟁 자금 지원을 위해 유대인 금융 자본의 환심을 살 필요가 있었다. 아서 밸푸어 외무장관은 시오니즘 지도자였던 로스차일드 경에게 서한(밸푸어 선언)을 보내 팔레스타인에 '유대인을 위한 민족적 고향(National Home)' 건설을 지지한다고 약속했다. 이 선언에는 "기존 비(非)유대인 공동체의 시민적, 종교적 권리를 침해해서는 안 된다"는 단서가 붙었지만, 이미 팔레스타인 인구의 90%를 차지하던 아랍인들의 정치적 권리는 철저히 무시되었다. 전쟁이 끝나고 오스만 제국이 해체되자, 팔레스타인은 영국의 위임통치령이 되었다. 영국의 비호 아래 유대인 이주는 급증했고, 이들은 아랍인들의 토지를 사들이며 정착촌을 확장해 나갔다. 아랍인들은 자신들의 땅에서 소외되고 있음을 느끼며 저항하기 시작했고, 유대인 이민자들과 아랍 주민 간의 충돌은 점차 격화되었다. 영국은 어느 한쪽의 편도 들지 못하는 모호한 정책으로 일관하며 갈등을 더욱 증폭시켰다. 2. '나크바'와 국가의 탄생: 1948년 전쟁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홀로코스트의 참상이 알려지자, 유대인 국가 수립에 대한 국제적 동정 여론이 비등했다. 더 이상 갈등을 중재할 능력이 없다고 판단한 영국은 팔레스타인 문제를 신생 국제기구인 **유엔(UN)**에 떠넘겼다. 1947년 11월 29일, 유엔 총회는 팔레스타인을 아랍 국가와 유대 국가로 분할하고 예루살렘은 국제 공동 관리하에 둔다는 **결의안 181호(분할안)**를 채택했다. 당시 인구의 약 3분의 1에 불과했던 유대인에게 전체 영토의 56%를 할당하는 이 안은 아랍 세계의 격렬한 반발을 샀다. 아랍인들은 자신들의 땅을 외부 세력이 멋대로 나누는 것을 결코 받아들일 수 없었다. 유대인들은 분할안을 수용했다. 1948년 5월 14일, 영국군이 철수를 완료하자마자 다비드 벤구리온은 텔아비브에서 이스라엘 국가 수립을 선포했다. 바로 다음 날, 이집트, 요르단, 시리아, 레바논, 이라크 등 아랍 연맹 5개국은 이를 저지하기 위해 이스라엘을 침공하며 제1차 중동전쟁이 발발했다. 전쟁은 신생 이스라엘의 압도적인 승리로 끝났다. 전쟁 기간과 그 전후, 75만 명 이상의 팔레스타인인들이 자신들이 살던 마을과 도시에서 쫓겨나거나 학살의 공포를 피해 떠나야 했다. 이스라엘은 유엔 분할안이 아랍 측에 할당했던 영토 상당 부분까지 점령했다. 팔레스타인인들은 이 사건을 **'나크바(Al-Nakba, 대재앙)'**라고 부르며 민족사 최대의 비극으로 기억한다. 이 때 발생한 수많은 난민과 그 후손들은 오늘날까지 요르단, 레바논, 시리아 및 가자지구와 서안지구의 난민촌에서 고향으로 돌아갈 날을 기다리고 있다. 팔레스타인 영토는 요르단강 서안지구(요르단 합병)와 가자지구(이집트 통제)로 나뉘어 지도상에서 사라졌다. 3. 6일 전쟁과 점령의 시대: 끝나지 않는 갈등의 심화 이후 중동은 두 차례의 큰 전쟁을 더 겪었다. 1967년 6월, 이스라엘은 이집트, 요르단, 시리아를 선제공격하여 불과 6일 만에 압승을 거두었다. 이 **제3차 중동전쟁(6일 전쟁)**의 결과는 분쟁의 양상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았다. 이스라엘은 이집트로부터 가자지구와 시나이반도를, 요르단으로부터 서안지구와 동예루살렘을, 시리아로부터 골란고원을 빼앗았다. 특히 동예루살렘을 점령한 이스라엘은 도시 전체를 '분리될 수 없는 영원한 수도'로 선포했다. 국제법상 명백한 불법 점령이었지만, 이스라엘은 점령지에 군정을 실시하고 유대인 정착촌을 건설하기 시작했다. 이 정착촌은 '두 국가 해법'의 가장 큰 물리적 장애물이자 팔레스타인인들의 분노를 자아내는 핵심 원인이 되었다. 1973년, 이집트와 시리아가 잃어버린 영토를 되찾기 위해 기습 공격을 감행하며 **제4차 중동전쟁(욤 키푸르 전쟁)**이 발발했지만, 전쟁은 교착 상태로 끝나고 이스라엘의 점령은 더욱 공고해졌다. 전쟁에서의 연패를 통해 군사력만으로는 이스라엘을 이길 수 없음을 깨달은 팔레스타인인들은 새로운 저항의 길을 모색했다. 1964년 창설된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는 야세르 아라파트의 지도 아래 무장 투쟁을 통해 국제 사회에 팔레스타인 문제를 각인시켰다. 4. 인티파다와 오슬로 협정: 희망과 좌절의 교차 1987년, 이스라엘의 20년에 걸친 점령에 대한 팔레스타인 민중의 분노가 폭발했다. 가자지구에서 이스라엘 군용 트럭이 팔레스타인 노동자를 치어 숨지게 한 사건을 계기로, 팔레스타인 청년들은 돌멩이를 들고 이스라엘 군인들의 총에 맞섰다. **제1차 인티파다(Intifada, 민중봉기)**로 불리는 이 저항은 전 세계에 큰 충격을 주었고, 이스라엘에 대한 국제적 비난 여론을 환기시켰다. 인티파다는 PLO의 위상을 높였고, 마침내 이스라엘과 PLO를 협상 테이블로 이끌었다. 1993년, 노르웨이의 중재로 양측은 비밀 협상 끝에 역사적인 오슬로 협정에 서명했다. 이 협정은 이스라엘이 점령지에서 단계적으로 철수하고 팔레스타인 자치정부(PA)를 수립하여 5년간의 자치 기간을 거친 뒤 영구적 지위에 관한 협상을 개시한다는 내용을 골자로 했다. '두 국가 해법'의 첫걸음으로 여겨진 이 협정으로 이츠하크 라빈 이스라엘 총리, 시몬 페레스 외무장관, 야세르 아라파트 PLO 의장은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그러나 희망은 짧았다. 협정 이후에도 이스라엘은 정착촌 건설을 멈추지 않았고, 예루살렘, 난민 귀환권 등 핵심 쟁점에 대한 협상은 지지부진했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양측 극단주의자들의 테러가 끊이지 않았고, 1995년 평화의 주역이었던 라빈 총리가 이스라엘 극우파 청년에게 암살당하면서 평화 프로세스는 돌이킬 수 없는 타격을 입었다. 2000년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의 중재로 열린 캠프 데이비드 정상회담이 최종 합의에 실패하자, 팔레스타인인들의 좌절감은 극에 달했다. 얼마 뒤, 이스라엘 야당 지도자였던 아리엘 샤론이 무장 경호원들을 대동하고 이슬람의 3대 성지인 동예루살렘의 알아크사 사원을 방문했다. 이는 팔레스타인인들의 분노에 불을 붙였고, 자살 폭탄 테러와 이스라엘의 무자비한 군사 보복이 뒤엉키는 제2차 인티파다로 번졌다. 폭력의 악순환 속에서 오슬로 협정의 꿈은 완전히 산산조각 났다. 이스라엘은 서안지구 곳곳에 거대한 분리 장벽을 건설하며 팔레스타인 영토를 더욱 고립시켰다. 5. 하마스의 부상과 가자지구: '천장 없는 감옥'의 비극 오슬로 협정의 실패는 팔레스타인 내부에 또 다른 균열을 낳았다. 협상을 통한 평화 노선에 회의를 느낀 많은 팔레스타인인들은 이스라엘과의 타협을 거부하고 무장 투쟁을 주장하는 이슬람 저항 운동 **하마스(Hamas)**를 지지하기 시작했다. 2005년, 이스라엘은 가자지구에서 자국 정착촌과 군대를 일방적으로 철수했다. 그러나 이듬해 치러진 팔레스타인 총선에서 하마스가 예상을 깨고 압승을 거두자, 이스라엘과 서방 세계는 하마스 정부를 인정하지 않고 경제 원조를 중단했다. 결국 2007년, 하마스는 온건파 파타(Fatah)와의 내전 끝에 가자지구를 무력으로 장악했다. 이에 이스라엘은 가자지구에 대한 전면적인 봉쇄를 단행했다. 육상, 해상, 공중 모든 경로를 통제하며 사람과 물자의 이동을 극도로 제한했다. 이 봉쇄로 인해 가자지구의 경제는 붕괴했고, 200만 명이 넘는 주민들은 실업과 빈곤, 깨끗한 물과 전기 부족에 시달리는 '천장 없는 거대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이후 하마스와 이스라엘은 수차례에 걸쳐 대규모 군사 충돌을 벌였고, 그때마다 수많은 민간인, 특히 어린이와 여성들이 희생되었다. 6. 현재와 미래: 벼랑 끝에 선 '두 국가 해법' 21세기 들어 평화 협상은 사실상 중단된 상태다. 이스라엘에서는 갈수록 강경한 우파 정권이 득세하며 정착촌 확장에 박차를 가하고 있고, 팔레스타인은 서안지구를 통치하는 파타와 가자지구를 장악한 하마스로 분열되어 통일된 리더십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핵심 쟁점은 100년 전과 마찬가지로 여전히 해결되지 않고 있다. 국경: 팔레스타인은 1967년 6일 전쟁 이전의 경계선을 기준으로 독립 국가를 요구하지만, 이스라엘은 주요 정착촌 블록을 자국 영토에 포함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예루살렘: 팔레스타인은 동예루살렘을 미래 국가의 수도로 삼기를 원하지만, 이스라엘은 예루살렘 전체가 자국의 수도라고 주장한다. 정착촌: 서안지구와 동예루살렘에 건설된 정착촌에는 70만 명 이상의 유대인이 거주하고 있으며, 이는 팔레스타인 국가의 영토적 연속성을 심각하게 훼손한다. 난민: 팔레스타인은 '나크바' 때 쫓겨난 난민과 그 후손들의 '귀환권'을 요구하지만, 이스라엘은 이는 국가의 유대적 정체성을 위협한다며 거부한다. 최근 몇 년간 분쟁은 더욱 격화되는 양상이다. 가자지구에서는 주기적인 무력 충돌이 반복되며 인도주의적 위기가 심화되고 있고, 서안지구에서는 정착민들의 폭력과 이스라엘군의 강경 진압으로 팔레스타인인들의 희생이 끊이지 않고 있다. 국제 사회의 해법으로 여겨졌던 **'두 국가 해법'**은 계속되는 정착촌 확장과 정치적 리더십의 부재로 실현 가능성이 거의 사라졌다는 비관론이 팽배하다. '성스러운 땅'에서 시작된 100년의 분쟁은 두 민족 모두에게 깊은 상처만을 남겼다. 끝없는 보복의 악순환 속에서 평화는 신기루처럼 멀어지고 있다. 국제 사회가 정의와 공존의 원칙에 입각한 강력하고 일관된 해법을 제시하지 못하는 한, '약속의 땅'은 계속해서 절망과 비극의 땅으로 남을 것이다. 이 땅에 진정한 평화가 깃들기 위해서는 총성이 멎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고, 과거의 상처를 치유하며, 정의에 기반한 미래를 함께 그려나가는 고통스러운 과정이 반드시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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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8-23
  • 발칸의 피바람, 유고 인종청소
    냉전의 견고한 장벽이 무너지고 평화와 화합의 서사가 전 세계를 뒤덮던 1990년대, 발칸반도는 역사의 퇴보를 증명하듯 끔찍한 야만의 시대로 회귀했다. '인종청소(Ethnic Cleansing)'. 특정 민족과 문화를 이 땅에서 완전히 지워버리려는 이 섬뜩한 목표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에서 다시는 없을 것이라 믿었던 집단 학살, 강간, 추방의 광풍을 불러왔다. '남슬라브인의 땅'이라는 이상적 이름으로 탄생했던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은 어째서 이토록 참혹하게 무너져 내렸는가. 오늘일보 기획특집 '5분 세계사 이슈 100선' 첫 편에서는 유고슬라비아 인종청소라는 비극의 뿌리 깊은 역사적 배경부터 피로 얼룩진 진행 과정, 그리고 21세기인 오늘날까지도 발칸반도에 깊은 상흔으로 남은 결과와 과제를 알아본다. 1. 불안한 공존: 봉합되었으나 아물지 않은 상처 유고슬라비아의 비극을 단지 한 독재자의 광기나 순간의 정치적 격변으로 설명하는 것은 사건의 본질을 왜곡하는 것이다. 그 뿌리는 수백 년에 걸쳐 형성된 민족, 종교, 이념의 복잡한 갈등에 맞닿아 있다. 본래 발칸반도는 동로마와 서로마, 가톨릭과 동방정교, 이슬람 오스만 제국과 기독교 유럽이 충돌하는 문명의 교차로였다. 이러한 지정학적 특성은 이 지역에 다양한 민족과 종교가 모자이크처럼 공존하는 결과를 낳았다. 세르비아인(세르비아 정교), 크로아티아인(가톨릭), 보스니아인(이슬람), 슬로베니아인(가톨릭), 몬테네그로인(세르비아 정교), 마케도니아인(마케도니아 정교) 등은 같은 남슬라브계라는 언어적 공통점을 가졌지만, 각기 다른 종교와 역사적 경험을 통해 뚜렷한 개별 정체성을 형성해왔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하나의 국가, 세 개의 종교, 네 개의 언어, 다섯 개의 민족, 여섯 개의 공화국'이라는 복잡한 구조의 유고슬라비아 왕국이 탄생했지만, 이는 세르비아 중심주의에 대한 타 민족의 불만을 낳으며 불안한 출발을 알렸다. 제2차 세계대전은 이 갈등의 골을 회복 불가능한 수준으로 벌려놓았다. 나치 독일이 유고슬라비아를 침공하자, 크로아티아의 극우 민족주의 단체 '우스타샤'는 나치의 괴뢰 정권인 크로아티아 독립국을 세우고 수십만 명의 세르비아인, 유대인, 집시를 잔혹하게 학살했다. 이에 맞서 세르비아 민족주의자들인 '체트니크' 역시 크로아티아인과 보스니아인에 대한 보복 학살을 자행했다. 이 피비린내 나는 내전의 혼란 속에서 요시프 브로즈 티토가 이끄는 다민족 연합의 파르티잔은 최종 승리를 거두었다. 전후 사회주의 연방을 수립한 티토는 강력한 카리스마와 권위를 바탕으로 '형제애와 통일(Bratstvo i jedinstvo)'이라는 구호 아래 모든 민족주의를 철저히 억눌렀다. 그는 각 민족에게 자치권을 부여하는 공화국 체제를 도입하여 균형을 맞추는 한편, 민족주의적 발언이나 활동을 엄격히 처벌하며 갈등을 수면 아래로 잠재웠다. 그의 통치 아래 유고슬라비아는 수십 년간 외형적인 평화와 안정을 누렸다. 그러나 이는 문제의 해결이 아닌, 강력한 힘에 의한 '억압된 평화'였다. 2. 판도라의 상자: 민족주의의 망령이 깨어나다 1980년, 유고슬라비아를 35년간 통치했던 '구심점' 티토가 사망하자 억눌려 있던 판도라의 상자가 열렸다. 1980년대 내내 유고슬라비아는 심각한 경제 위기에 시달렸고, 이는 각 공화국 간의 경제적 불평등을 부각하며 민족 갈등을 재점화하는 기폭제가 되었다. 상대적으로 부유했던 북부의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는 가난한 남부 공화국, 특히 세르비아에 대한 경제적 지원에 불만을 품기 시작했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 세르비아 공산당 지도자였던 슬로보단 밀로셰비치는 민족주의라는 위험한 불꽃에 기름을 부었다. 그는 1989년 코소보 자치주에서 열린 '가지메스탄 전투 600주년 기념식' 연설에서 "세르비아인들은 다시 전투와 마주하고 있다"고 선언하며 노골적으로 '대세르비아주의'를 선동했다. 과거 오스만 제국에 맞서 싸웠던 세르비아 민족의 영광을 상기시키고, 타 민족(특히 알바니아계와 크로아티아계)에 대한 적개심을 부추기며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다져나갔다. 밀로셰비치의 선동은 연쇄 반응을 일으켰다. 세르비아 민족주의의 팽창에 위협을 느낀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에서도 민족주의 정서가 급격히 확산되었다. 1990년 각 공화국에서 실시된 다당제 선거에서 민족주의 정당들이 압승을 거두면서 유고슬라비아 연방의 붕괴는 시간문제가 되었다. 1991년 6월 25일,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가 연방으로부터의 독립을 공식 선언하자, 세르비아가 장악하고 있던 유고슬라비아 인민군(JNA)이 이를 저지하기 위해 군사적으로 개입하면서 발칸반도는 기나긴 전쟁의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들었다. 3. 지옥의 연대기: '인종청소'의 참혹한 전개 유고 내전은 단순한 영토 분쟁이 아니었다. 특정 지역에서 다른 민족을 완전히 제거하여 민족적으로 단일한 공간을 만들려는 '인종청소'가 전쟁의 핵심 전략으로 자행되었다. 이 과정에서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잔혹 행위가 벌어졌다. - 크로아티아 전쟁 (1991-1995): 크로아티아 내 세르비아계 주민들은 유고 인민군의 지원을 받아 '세르비아 크라이나 공화국' 수립을 선포하고 크로아티아 정부군과 격렬한 전투를 벌였다. 이 과정에서 부코바르, 두브로브니크 등 역사적인 도시들이 무차별 포격으로 파괴되었고, 양측 모두 민간인 학살과 추방을 자행했다. - 보스니아 전쟁 (1992-1995): 인종청소가 가장 체계적이고 잔혹하게 자행된 곳은 '작은 유고슬라비아'라 불릴 만큼 다민족이 섞여 살던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였다. 보스니아가 독립을 선언하자, 보스니아 내 세르비아계는 라도반 카라지치를 중심으로 '스르프스카 공화국'을 세우고 유고 인민군의 지원 하에 대대적인 공격을 개시했다. 그들의 목표는 명확했다. 보스니아인(무슬림)과 크로아티아인을 학살, 강간, 추방하여 세르비아인만의 영토를 확보하는 것이었다. 수도 사라예보는 1,425일간 세르비아계 군대에 의해 포위되어 시민들은 저격과 포격의 공포 속에서 살아야 했다. 포차, 비셰그라드 등 동부 보스니아 지역에서는 세르비아계 군인과 준군사조직이 보스니아인 마을을 습격하여 남성들을 학살하고 여성들을 '강간 수용소'로 끌고 가 조직적으로 유린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 비극의 정점은 1995년 7월 스레브레니차에서 벌어졌다. 유엔이 '안전지대'로 선포했음에도 불구하고, 라트코 믈라디치가 이끄는 세르비아계 군대는 이곳에 피신해 있던 8,000명 이상의 보스니아 남성과 소년들을 불과 며칠 만에 조직적으로 학살했다. 이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 땅에서 벌어진 최악의 집단 학살로 기록되었다. - 코소보 전쟁 (1998-1999): 보스니아 전쟁이 데이턴 협정으로 봉합된 후, 갈등의 무대는 세르비아 남부의 코소보 자치주로 옮겨갔다. 주민의 90%가 알바니아계였던 코소보에서 분리독립을 요구하는 코소보 해방군(KLA)의 무장 투쟁이 격화되자, 밀로셰비치 정권은 '테러리스트 소탕'을 명분으로 군대와 경찰을 투입하여 알바니아계 주민에 대한 대규모 인종청소를 자행했다. '말발굽 작전'으로 명명된 이 계획 아래 수십만 명의 알바니아계 주민들이 학살당하거나 국외로 추방되었다. 이 참상은 결국 NATO의 78일간의 유고슬라비아 공습을 불러왔고, 전쟁은 밀로셰비치 정권의 패배로 막을 내렸다. 4. 상흔과 과제: 끝나지 않은 비극 10년에 걸친 전쟁과 인종청소는 발칸반도에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수십만 명이 목숨을 잃었고, 수백만 명이 집을 잃고 난민이 되었다. 사회 기반 시설은 완전히 파괴되었고, 경제는 파탄에 이르렀다. 그러나 물리적인 피해보다 더 깊은 상처는 사람들의 마음에 새겨진 증오와 불신이었다. 한때 이웃으로 살았던 이들이 서로에게 총부리를 겨눴던 끔찍한 기억은 공동체의 완전한 회복을 가로막는 거대한 장벽이 되었다. 국제 사회는 구유고슬라비아 국제형사재판소(ICTY)를 설립하여 밀로셰비치, 카라지치, 믈라디치 등 전쟁 범죄의 핵심 책임자들을 단죄했다. 이는 국가 지도자라 할지라도 반인도적 범죄에 대한 책임을 피할 수 없다는 중요한 선례를 남겼다. 그러나 법적인 청산이 역사의 완전한 화해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오늘날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는 여전히 세르비아계, 크로아티아계, 보스니아계의 복잡한 연방 체제 속에서 불안한 공존을 이어가고 있다. 코소보는 독립을 선언했지만 세르비아와 국제 사회의 일부는 여전히 이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각 민족은 자신들을 '피해자'로 규정하는 역사관을 고수하며, 과거사에 대한 진정한 성찰과 화해는 요원한 과제로 남아있다. 유고슬라비아의 비극은 경제적 위기와 정치적 리더십의 부재가 민족주의라는 망령과 결합했을 때, 인류가 얼마나 쉽게 야만으로 퇴행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뼈아픈 교훈이다. 이 역사를 기억하고 성찰하는 것만이 발칸반도가, 그리고 인류가 같은 비극을 되풀이하지 않는 유일한 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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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8-23
  • '글로벌 팝 아이콘' 케데헌, 그 독보적 인기 비결은?
    최근 글로벌 음악 시장을 뒤흔들고 있는 이름, 바로 '케데헌(Kedehon)'이다. 그의 최신 싱글 '골든(Golden)'이 영국 오피셜 싱글 차트에서 2주 연속 정상에 오르며 통산 3주째 1위를 기록하는 기염을 토했다. 이는 단순한 흥행을 넘어, 한 아티스트가 국경과 문화를 초월하여 전 세계적인 팬덤을 구축했음을 증명하는 사건으로 평가받고 있다. 케데헌의 성공은 비단 영국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미국 빌보드 차트를 비롯해 유럽, 아시아 등 주요 음악 시장에서 '골든'은 상위권을 유지하며 '케데헌 신드롬'을 일으키고 있다. 이러한 폭발적인 인기는 단순한 '운'이나 '일시적 현상'으로 치부하기 어렵다. 전문가들은 케데헌의 성공 배경에 대해 그의 음악적 역량, 진솔한 메시지, 그리고 팬들과의 소통 방식 등 다양한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고 분석한다. #1. 장르의 경계를 허무는 '케데헌 스타일' 케데헌의 음악은 특정 장르에 국한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독특한 매력을 발산한다. 팝을 기반으로 R&B, 힙합, 일렉트로닉, 심지어 재즈와 클래식 요소까지 절묘하게 결합하여 자신만의 독보적인 음악 세계를 구축했다. 이번에 큰 성공을 거둔 '골든' 역시 이러한 '케데헌 스타일'의 정수를 보여준다. 경쾌한 리듬 위에 서정적인 멜로디와 희망적인 가사가 어우러져 듣는 이들에게 위로와 긍정적인 에너지를 전달한다. 음악 평론가 김현수(45)씨는 "케데헌의 음악은 '퓨전'이라는 단어로는 부족하다"며 "각기 다른 장르의 요소들이 충돌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조화롭게 융합되어 새로운 장르를 창조하고 있다. 이는 과거의 음악적 유산을 이해하고 미래를 내다보는 그의 통찰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평했다. 이러한 음악적 실험과 도전은 기존 팝 팬들뿐만 아니라 다양한 장르의 음악을 선호하는 리스너들을 모두 흡수하는 강력한 원동력이 되고 있다. #2. '공감'을 자아내는 진솔한 메시지 케데헌의 노래 가사는 그의 인기 비결 중 하나로 꼽힌다. 화려하고 자극적인 가사 대신, 삶의 희로애락, 사랑과 이별, 자기 성찰 등 보편적인 감정을 솔직하게 담아내고 있다. 특히, '골든'의 가사는 역경 속에서도 빛을 잃지 않는 희망과 용기에 대해 이야기하며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지친 현대인들에게 깊은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한 외신과의 인터뷰에서 케데헌은 "음악은 저 자신을 치유하는 과정이자, 팬들과 소통하는 가장 중요한 통로"라며 "제 노래를 듣는 모든 분들이 삶의 어려움 속에서도 자신의 '황금빛 순간(Golden Moment)'을 발견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곡을 썼다"고 밝힌 바 있다. 이처럼 진정성 있는 메시지는 단순한 '노래'를 넘어 '위로'와 '공감'의 도구로 작용하며 팬들과의 정서적 유대감을 강화하고 있다. #3. 디지털 시대를 활용한 팬덤 확장 전략 케데헌은 틱톡, 유튜브, 인스타그램 등 다양한 디지털 플랫폼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팬들과 소통하고 있다. 그는 신곡 발표 전 티저 영상을 공개하거나, 팬들과 실시간으로 소통하는 라이브 방송을 진행하며 '참여형 팬덤'을 구축했다. 특히 '골든'의 챌린지 댄스가 틱톡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끌면서, 팬들은 단순한 소비자에 그치지 않고 콘텐츠 생산자이자 홍보대사 역할을 자처하며 '케데헌 신드롬' 확산에 일조했다. 디지털 마케팅 전문가 박지훈(38)씨는 "케데헌은 단순히 자신의 음악을 홍보하는 데 그치지 않고, 팬들이 직접 참여하고 즐길 수 있는 '놀이의 장'을 마련했다"며 "이는 팬덤의 결집력을 높일 뿐만 아니라, 바이럴 마케팅 효과를 극대화하여 새로운 팬 유입을 촉진하는 선순환 구조를 만들었다"고 분석했다. 이처럼 케데헌은 디지털 시대에 최적화된 팬덤 전략으로 '글로벌 팝 아이콘'의 입지를 굳건히 하고 있다. #4. 문화적 배경을 넘어선 '글로벌 아티스트'의 탄생 케데헌의 인기는 특정 국가나 문화권에 국한되지 않는다. 그는 동양적인 미학과 서양적인 감성을 절묘하게 융합한 독특한 비주얼과 퍼포먼스로 전 세계 팬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안겨주고 있다. 특히, 뮤직비디오에 한국 전통 의상이나 소품을 활용하거나 동양 철학적 메시지를 담아내는 등 자신의 문화적 정체성을 드러내면서도 보편적인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그의 행보는 '글로벌 아티스트'의 새로운 모델을 제시하고 있다. 케데헌은 단순히 히트곡을 만드는 가수를 넘어, 음악으로 전 세계를 연결하고 소통하는 '문화 아이콘'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그의 성공은 장르와 국경, 문화를 초월한 음악의 힘을 다시 한번 증명하며, 앞으로의 행보에 대한 기대감을 높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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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8-23
  • 시진핑, 티베트 전격 방문...27일 만에 공개행사 나와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21일 중국 티베트 자치구 수도 라사시 포탈라 궁 앞 광장에서 열린 자치구 수립 60주년 경축대회에 참석했다. 시 주석이 공개행사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지난달 25일 신임 주중 대사들의 신임장을 제정받은 이후 27일 만이다. 2011년 부주석 시절 이후 14년 만에 이뤄진 이번 방문은 시 주석의 장기 집권과 맞물려 티베트 지역에 대한 통제와 개발을 동시에 강화하겠다는 중국 정부의 강력한 의지를 대내외에 천명한 것으로 해석된다. 시 주석은 이번 방문에서 티베트의 빈곤 퇴치 성과를 치하하고, '중화민족 공동체 의식'을 강조하며 티베트 문제 해결에 새로운 접근법을 제시했다. 시 주석의 이번 티베트 방문은 단순히 지역 지도자들을 격려하는 차원을 넘어선다. 중국 공산당은 그동안 티베트를 '안정과 통제'라는 틀에서 관리해왔지만, 시 주석은 여기에 '경제 개발'과 '민족 동질성 강화'라는 새로운 키워드를 추가했다. 신화통신에 따르면, 시 주석은 라싸의 포탈라궁 광장과 종교 시설을 방문해 현지 주민들과 만났다. 그는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을 이루기 위해 티베트는 중요한 부분"이라며, "티베트의 모든 민족은 중국이라는 대가족의 일원"임을 강조했다. 이는 서방 세계가 제기하는 티베트의 인권 및 종교 자유 문제에 대한 정면 반박이자, 중국 정부의 통치 정당성을 공고히 하려는 의도로 풀이된다. 특히, 시 주석은 티베트 철도와 같은 인프라 건설을 통해 티베트의 경제 발전을 가속화하고, 외부 세계와의 연결을 강화할 것을 주문했다. 이는 경제적 번영을 통해 티베트 주민들의 불만을 잠재우고, 중국 본토와의 유대감을 강화하려는 전략이다. 중국은 지난 수십 년간 티베트의 경제 발전을 위해 막대한 투자를 해왔으며, 시 주석은 이러한 노력이 결실을 맺고 있음을 보여주려 했다. 시 주석의 방문 소식이 전해지자 국제사회는 엇갈린 반응을 보였다. 미국과 유럽연합(EU) 등 서방 국가들은 중국 정부가 티베트의 종교와 문화적 정체성을 말살하려 한다고 비판하며 우려를 표명했다. 국제 인권 단체들은 "중국의 티베트 정책은 표면적으로는 경제 발전과 민족 화합을 내세우지만, 실질적으로는 티베트인들의 자치권을 박탈하고 사상 통제를 강화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반면, 티베트 내부의 일부 주민들은 경제적 혜택에 대한 기대감을 내비치기도 했다. 중국 정부의 투자로 티베트의 도로는 잘 정비되었고, 전력과 통신망이 확충되는 등 생활 수준이 향상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동시에 티베트인들은 전통 문화와 종교의 자유가 억압받고, 한족과의 문화적 충돌이 심화되는 현실에 대한 깊은 고민을 안고 있다. 이는 경제적 풍요와 문화적 정체성 보존이라는 딜레마 속에서 티베트인들이 처한 복잡한 상황을 잘 보여준다. 이번 시 주석의 방문은 단순한 시찰을 넘어, 향후 티베트 정책의 방향을 제시하는 중요한 신호탄이다. 중국 정부는 경제적 지원과 함께 티베트 분리주의 세력을 철저히 봉쇄하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했다. 시 주석은 "국가 안보를 최우선으로 삼고, 모든 분리주의 활동을 단호히 진압해야 한다"고 지시하며 공안 조직의 역할을 강화할 것을 주문했다. 이는 중국 정부가 홍콩의 '일국양제'를 사실상 무력화시킨 것처럼, 티베트에 대한 통제도 더욱 강화해 나갈 것임을 시사한다. 달라이 라마의 후계자 문제 등 종교적 리더십에 대한 통제도 심화될 것으로 예상된다. 전문가들은 "시 주석의 이번 방문은 티베트 문제를 '통일과 안보'라는 대전제 아래에서 관리하겠다는 최종 선언"이라고 평가했다. 중국 정부는 시 주석의 이번 방문을 성공적인 '민족 화합'의 사례로 선전하려 할 것이다. 그러나 티베트의 미래는 여전히 불확실하다. 경제적 발전이 티베트인들의 문화적 정체성과 조화롭게 공존할 수 있을지는 여전히 미지수다. 티베트의 역사는 중국과 복잡하게 얽혀 있다. 1950년 10월, 중국 인민해방군은 ‘티베트 평화 해방’을 명분으로 티베트를 침공했다. 중국 정부는 티베트가 과거부터 중국 영토의 일부였으며, 중앙 정부의 통치를 회복하고 서양 제국주의 세력의 영향으로부터 티베트를 해방시키기 위한 정당한 군사 작전이었다고 주장한다. 반면, 티베트 망명 정부와 국제사회는 이를 주권을 가진 독립국가에 대한 무력 침략으로 규정한다. 당시 티베트 정부는 항복을 선언하고 1951년 5월 중국과 ‘티베트 평화 해방에 관한 협정’을 체결하면서 중국의 통치권을 인정했다. 이 협정은 티베트의 자치를 보장한다고 명시했지만, 실질적으로는 티베트의 독립이 종식되고 중국에 복속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이후 티베트는 1959년 대규모 봉기가 발생했으나 중국군에 의해 진압되었고, 달라이 라마 14세는 인도로 망명하게 된다. 중국 정부는 이 사건 이후 티베트에 대한 통치를 더욱 강화하며 현재에 이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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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8-23
  • 실거주 안한 외국인 수도권 주택 매입 제한, 집쇼핑 못해
    실거주하지 않는 외국인은 서울과 경기, 인천의 주택 매입이 불가능해진다. 국토교통부는 21일 이 같은 내용의 외국인 토지거래허가구역을 지정했다. 국토교통부는 이날 국세청·금융정보분석원(FIU)과 합동으로 서울시 전역, 경기도 23개 시·군, 인천 7개 구를 외국인 토허구역으로 지정하는 내용의 대책을 발표했다. 외국인이 이들 지역 내 토지 면적 6㎡ 이상의 주택(단독·다가구·연립·다세대주택 및 아파트)을 매수하려면 관할 지방자치단체로부터 허가받아야 하고, 허가일로부터 4개월 이내 입주 및 2년 실거주를 해야 한다. 국토부에 따르면 수도권의 외국인 주택 거래는 2022년 4천568건, 2023년 6천363건, 지난해 7천296건으로 2022년 이래 연평균 약 26%의 증가율을 보였다. 올해 들어서도 지난달까지 4천431건으로 집계돼 3년 연속 증가세를 이어갈 것으로 예상됐다. 서울시의 경우 지난 3월 19일 강남권 3구(강남·서초·송파구)와 용산구의 아파트가 토허구역으로 지정된 이후 해당 지역 외국인 주택 거래는 감소세를 나타냈다. 그러나 서울시 전체적으로는 지난 5월 107건, 6월 124건, 7월 135건 등으로 다시 외국인 주택 거래량이 증가하는 양상을 보였다. 외국인의 수도권 주택 거래는 경기 62%, 인천 20%, 서울 18%의 순으로 서울뿐 아니라 경기·인천의 거래량도 상당한 수준이다. 국적별로는 중국인과 미국인이 각각 73%, 14%를 차지했고, 주택 유형별로는 아파트와 다세대주택이 각각 59%, 33%였다. 아울러 수도권에서 위탁관리지정 주택 거래도 지난해 295건에 달했다. 국내에 거소·주소를 두지 않는 비거주 외국인은 국내 주택을 매입하는 경우 위탁관리인을 지정해 신고해야 한다. 2023년 8월에 이 제도가 도입된 이래 위탁관리인을 지정한 수도권 거래는 497건으로 미국인과 중국인이 각각 64%(316건), 22%(110건)를 차지했다. 정부가 이날 수도권 대부분을 외국인 토허구역으로 지정한 것은 초강력 부동산 금융 규제로 꼽히는 6·27대책 이후 내국인에 대한 역차별 논란이 더욱 커졌기 때문이다. 다주택자 중과세 등 여러 규제를 받는 내국인과 달리, 외국인은 이런 장벽 없이 국내 부동산을 취득하고 있다는 문제 제기는 이전부터 꾸준히 제기돼왔다. 그러나 수도권 주택담보대출 한도를 6억원 이내로 제한한 6·27 대책 이후 역차별 논란은 더욱 커졌다. 6·27 대책으로 수도권의 주택 거래가 급감했지만, 외국인은 규제 대상에서 빠져 외려 거래가 늘었기 때문이다. 외국인은 자국의 금융기관에서 대출받을 때 주택담보대출 비율(LTV), 총부채원리금 상환 비율(DSR) 등을 적용받지 않는다. 6·27대책에서 정한 한도 6억원 역시 적용받지 않았다. 또 외국인의 경우 해외 부동산 소유 여부를 알 수 없어 다주택자에게 부과하는 취득세·양도소득세 중과도 피할 수 있다. 투기과열지구나 토허구역으로 지정되지 않은 지역에서는 주택담보대출에 따른 실거주 의무도 지지 않는다. 그러나 이날 정부의 대책 발표로 외국인 투기 수요 유입과 시장 교란 행위가 대부분 차단될 것으로 전문가들은 예측했다. 외국인의 주택 매입은 그 자체로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최근 들어 일부 외국인, 특히 중국인들의 국내 아파트 매입이 급증하면서 투기성 매입에 대한 우려가 커졌다.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2024년 외국인의 국내 아파트 매입 건수는 2020년 대비 2배 이상 증가했으며, 그중 70% 이상이 중국 국적자로 나타났다. 특히 중국인 매수자들은 서울 강남구, 용산구 등 고가 아파트와 함께 경기도 수원, 부천 등 수도권 외곽 지역의 신축 아파트에 대한 매입 비중이 높은 것으로 분석된다. 이는 서울의 핵심 지역 아파트는 투자 가치가 높다고 판단하고, 수도권 외곽의 신축 아파트는 비교적 낮은 가격으로 매입하여 시세 차익을 노리는 전략으로 풀이된다. 부동산 전문가들은 이번 조치가 외국인의 투기 수요를 차단하고 실수요자 중심의 주택 시장을 만드는 데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고 있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외화 유입 감소 등 부작용을 우려하며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다는 의견도 나오고 있다. 이와같은 외국인의 부동산 투자에 대해서 첫째, 다수의 외국인 주택 소유자들이 실제로 국내에 거주하지 않으면서 주택을 보유하고 있어, 실수요자들의 주택난을 가중시킨다는 비판이 제기되었다. 둘째, 일부 지역에서는 외국인 매수자들이 국내 시세보다 높은 가격을 제시하며 가격을 끌어올려, '묻지마 투자'식 투기가 성행한다는 지적도 나왔다. 셋째, 국내 거주자들은 다주택자 규제, 대출 규제 등 강력한 부동산 정책을 적용받는 반면, 외국인들은 이러한 규제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로워 형평성 논란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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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8-23
  • 광복 80주년의 빛을 세계에 알린다…미래 100년 향한 도약 다짐
    (서울=오늘일보) 광복 80주년을 맞아 15일 전국 각지에서 순국선열과 애국지사의 숭고한 뜻을 기리는 경축·추모 행사가 열렸다. 2025년 8월 15일은 대한민국이 일제의 식민 통치에서 벗어나 빛을 되찾은 지 80년이 되는 뜻깊은 해다. 정부는 "국민 통합과 국제 교류의 장"을 목표로, 광복의 역사적 의미를 되새기고 미래 100년의 새로운 길을 모색하는 다채로운 기념사업과 행사를 마련했다. 특히 이번 광복절은 중앙정부 주도하의 경축식뿐만 아니라 전국 각지의 지자체와 민간단체, 기업들이 참여하는 축제형 행사들이 눈에 띄게 늘어난 것이 특징이다. 정부는 광복 80주년 기념사업추진위원회를 출범시키고, 김민석 국무총리와 이종찬 광복회장이 공동위원장을 맡아 본격적인 준비를 진행해왔다. 이 위원회는 전국 순회 기념식, 독립운동 유적 디지털 아카이브 구축, 국내외 청년 역사교류 프로그램 등 다양한 기획을 추진하며 국민 참여를 독려하고 있다. 특히, 기존 수도권 중심의 기념식에서 벗어나 서울, 호남, 영남, 강원 등 전국 권역별로 기념식을 개최하여 전 국민이 함께 광복의 의미를 되새길 수 있도록 했다. 이러한 노력의 일환으로 광복 80주년의 상징 브랜드와 슬로건을 활용한 영상이 제작되었으며, AI 기술로 구현된 독립운동가들의 모습이 담겨 현대적 감각으로 역사를 재해석했다는 평을 받고 있다. 또한, 광복 80주년을 기념하는 특별사면도 단행되어 서민 생계형 형사범 및 특별배려 수형자, 경제인 등 2천여 명이 사면 및 복권되었다. 더불어 소액 연체자 등에 대한 신용회복 지원 등 민생경제에 활력을 불어넣기 위한 조치들도 함께 시행됐다. 전국 각지에서는 80주년을 기념하는 특별한 행사들이 펼쳐졌다.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는 2500여 명의 독립유공자 후손과 국가 주요 인사 등이 참석한 가운데 경축식이 열렸으며, 이재명 대통령은 경축사를 통해 "보훈 선진국으로 도약할 것"이라는 의지를 표명했다. 광화문광장에서는 "국민주권 대축제"가 개최되어 시민들이 직접 참여하는 축제의 장이 마련되었다. 지방에서도 다채로운 행사들이 이어졌다. 부산시민회관에서는 경축식과 함께 부산시립예술단의 공연이 열렸고, 인천 아트센터인천에서는 기념식 외에 태극기 만들기, 무궁화 묘목 배부 등 부대행사가 진행됐다. 충남에서는 독립운동 유적지를 중심으로 한 학술강연과 사진전이 열려 지역의 역사적 의미를 되새겼다. 이 외에도 천안 독립기념관에서는 블랙이글스 에어쇼와 C-47 비행기 탑승 체험 등 특별한 행사가 진행되어 가족 단위 방문객들의 발길을 이끌었다. 서울 보훈부는 광화문광장에서 '광복 80주년 빛축제'를 개최, 팝아트와 AI 기술을 활용한 미디어아트를 선보이며 광복의 기쁨을 현대적으로 표현했다. 민간 분야에서도 광복 80주년의 의미를 기리는 움직임이 활발했다. KBO는 프로야구 5개 구장에서 독립유공자 후손들이 시구·시타에 나서는 등 기념 행사를 펼쳤다. 또한, 서울시립교향악단의 기념 음악회, 독립운동가 후손들의 이야기를 다룬 웹툰 '환쟁이'와 '고래별' 등 문화 콘텐츠들도 주목받으며 광복의 의미를 다양한 방식으로 전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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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8-15
  • 손흥민, MLS LAFC 전격 이적…2029년 6월까지 연장 옵션
    대한민국 축구의 '아이콘' 손흥민(33)이 10년간 활약했던 잉글랜드 프로축구 프리미어리그(EPL) 토트넘 홋스퍼를 떠나 미국 메이저리그사커(MLS)의 로스앤젤레스FC(LAFC)로 전격 이적한다. 7일(한국시간) 새벽 토트넘과 LAFC 양 구단은 손흥민의 이적을 공식 발표했다. LAFC는 구단 공식 소셜미디어(SNS) 계정을 통해 "월드클래스 윙어 손흥민이 LAFC의 새로운 멤버가 됐다"며 손흥민의 사진과 함께 환영의 메시지를 올렸다. 토트넘 역시 "10년간 우리와 함께했던 손흥민의 헌신에 감사한다"며 "그의 새로운 출발을 응원한다"는 내용의 작별 인사를 전했다. 이번 이적은 대한민국 축구 역사상 가장 큰 관심을 끈 이적 중 하나로 평가받고 있다. LA 구단은 "손흥민은 2027년까지 지정 선수(Designated Player·샐러리캡을 적용받지 않는 선수)로 등록되며, 2028년까지 연장 옵션이 있다. 추가로 2029년 6월까지의 옵션도 포함돼있다"고 밝혔다. 구체적인 계약 내용은 공개되지 않았지만, 복수의 현지 언론 보도에 따르면 손흥민의 이적료는 2천만 달러(한화 약 280억 원) 이상으로 추정된다. 이는 2024년 6월 바르셀로나에서 인터 마이애미로 이적한 리오넬 메시의 이적료를 뛰어넘는 금액으로, MLS 역사상 최고 이적료 기록을 갈아치운 것이다. 또한 손흥민의 연봉 역시 MLS 최고 수준인 1천500만 달러(한화 약 210억 원)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져, 그에 대한 LAFC의 기대감을 엿볼 수 있다. 토트넘은 "33세의 쏘니는 10년 전인 2015년 8월 토트넘에 입단한 이후 구단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수 중 하나로 자리 잡았다"며 "454경기에서 173골을 넣어 우리 구단 역사상 역대 5번째로 높은 기록을 세웠다"고 썼다. 또한 "그의 가장 큰 업적은 2025년 5월 (스페인) 빌바오에서 유럽축구연맹(UEFA) 유로파리그 승리로 구단을 이끈 것"이라며 "그는 우리 역사상 주요 트로피를 들어 올린 주장 13명 중 하나가 됐다"고도 짚었다. 이번 손흥민의 MLS 이적은 단순한 선수 이적을 넘어선 의미를 지닌다. 미국 축구 시장의 성장세와 맞물려 월드클래스 선수가 미국으로 향하는 사례가 늘고 있는 가운데, 손흥민의 이적은 아시아 축구 스타가 미국 시장에 진출하는 중요한 계기가 될 것으로 보인다. 손흥민은 조만간 LAFC에 합류해 메디컬 테스트를 마치고 공식 입단식을 가질 예정이다. 등번호는 토트넘에서 사용했던 7번을 그대로 사용할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새로운 팀 동료들과 호흡을 맞추며 팀의 MLS 우승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는 각오를 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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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8-07
  • 캄차카반도에 8.7 초강진…환태평양 '불의 고리'의 경고인가
    30일(현지시간) 러시아 동부 캄차카반도 인근 해안에서 규모 8.7 강력한 지진이 발생했다. 이 지진의 영향으로 러시아 동부 해안도시의 일부 건물이 손상되고 부상자가 발생했지만 사망자는 보고되지 않았다. 러시아 당국은 피해가 심한 지역에 비상사태를 선언했다. 30일 오전 8시 25분(현지시간) 러시아 캄차카반도 동쪽 해상에서 발생한 지진은 초기 규모 8.0으로 알려졌으나, 이후 미국 지질조사국(USGS)과 일본 기상청 등에 의해 규모 8.7로 상향 조정됐다. 진앙은 러시아 캄차카반도 남동쪽 126~136km 떨어진 해역으로, 진원의 깊이는 19km로 비교적 얕게 관측되어 큰 피해가 우려됐다. 러시아 해안은 물론 일본 전역, 나아가 하와이와 한반도 동해안까지 쓰나미 경보를 발령하며 태평양 연안 국가들을 긴장시켰다. 이번 지진으로 인해 미국 태평양쓰나미경보센터(PTWC)는 러시아와 일본에 최대 3m에 달하는 '위험한 쓰나미' 경보를 발령했다. 일본 기상청은 즉각 홋카이도부터 규슈에 이르는 태평양 연안 전역에 쓰나미 경보 및 주의보를 내렸으며, 해안 지역 주민들에게 긴급 대피를 명령했다. 특히 홋카이도 해안에서는 이미 쓰나미가 관측되기 시작했으며, 높이는 지역에 따라 0.5m에서 최대 1m 이상을 기록했다. 하와이 호놀룰루에서도 파괴적인 쓰나미가 예상된다며 해안 지역에 대피령을 내리는 등 광범위한 지역에 비상이 걸렸다. 다행히 일본 정부는 현재까지 이번 지진으로 인한 인명 피해는 발생하지 않았다고 발표했으나, 일부 해안 도로가 폐쇄되는 등 재산 피해 조사는 진행 중이다. 한반도 동해안에는 0.3m 미만의 쓰나미가 예상되었으며, 오후 3시경 울릉도 주변 수위가 소폭 상승할 것으로 예보됐다. 이번 캄차카반도 강진은 지구의 가장 활발한 지진대이자 화산대인 '환태평양 조대(Ring of Fire)'에 위치한 캄차카반도의 특성상 예견된 지각 활동으로 볼 수 있다. 캄차카반도는 태평양판이 오호츠크판(또는 북아메리카판의 일부로 간주되기도 함) 아래로 섭입하는 경계면에 위치하며, 이 섭입대에서는 거대한 지진 에너지가 축적되고 방출되는 과정이 반복된다. 특히 캄차카반도 남동쪽 해안과 쿠릴 열도를 따라 뻗어 있는 '쿠릴-캄차카 해구'는 태평양판이 오호츠크판 아래로 침강하는 대표적인 섭입대이다. 이러한 판의 움직임은 강력한 지진 활동과 화산 활동을 유발하며, 캄차카반도가 '불의 고리'의 일부로 불리는 이유이다. 지각판의 움직임으로 인한 응력 축적과 해소 과정에서 규모 8.0 이상의 강진이 발생하는 것은 이 지역의 일반적인 지질학적 특징이다. 20세기에도 캄차카 해역에서는 여러 차례 규모 8.0 이상의 강진이 발생한 바 있으며, 1952년에는 규모 9.0의 초강진이 발생하기도 했다. 이번 지진 역시 이와 같은 판 경계에서의 에너지 방출로 인한 것으로 분석된다. 진원의 깊이가 얕아 발생한 지진파의 에너지가 지표면과 해수면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며 쓰나미 발생 가능성을 높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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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7-30
  • 서울 38도...다음주도 '체감온도 33도 내외' 무더운 열대야 지속
    이번 주에 이어서 다음 주(7월 28일∼8월 1일)도 전국 대부분 지역의 최고 체감온도가 33도 내외로 무더운 날 지속될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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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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