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5-10-22(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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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닫힌 지갑, 멈춰선 성장: 14억 소비 대국의 침묵
    한때 세계의 모든 명품 매장은 중국인 관광객(유커)들로 가득 찼다. 그들의 손에는 명품 쇼핑백이 들려 있었고, 그들의 씀씀이는 글로벌 기업들의 실적을 좌우했다. '14억 인구의 중산층이 지갑을 열기 시작하면 세계 경제는 새로운 성장 엔진을 얻을 것'이라는 장밋빛 전망이 지배했다. 중국 정부 역시 ‘수출·투자’ 중심의 성장 모델에서 ‘내수·소비’ 중심으로 전환하는 ‘쌍순환(雙循環)’ 전략을 국가의 최우선 과제로 내걸었다. 그러나 2025년 8월 현재, 그 거대한 소비 엔진은 차갑게 식어버렸다. 상하이의 화려한 쇼핑몰은 한산하고, 젊은이들은 값비싼 신상 대신 중고 거래 앱을 탐색한다. 은행 금리가 사상 최저 수준으로 떨어져도 사람들은 대출을 받아 집이나 차를 사는 대신, 기록적인 속도로 저축 예금을 늘리고 있다. 이른바 **‘소비 절벽(Consumption Cliff)’**의 도래다. 이는 단순한 경기 둔화를 넘어, 중국 사회의 구조적 문제와 미래에 대한 깊은 불안감이 응축된 결과물이다. 중국 소비자들이 왜 지갑을 닫게 되었는지, 그들의 소비 패턴이 어떻게 변하고 있는지, 그리고 이 거대한 침묵이 중국과 세계 경제에 보내는 경고음은 무엇인지 심층 취재했다. 제1부: 신화의 종언 - 무엇이 소비의 불을 껐나? 중국인들의 소비 심리가 급격하게 얼어붙은 데에는 복합적인 원인이 있지만, 전문가들은 크게 세 가지 ‘충격’을 핵심 요인으로 꼽는다. 1. 부동산 불패 신화의 붕괴: 자산 쇼크 지난 20년간 중국 중산층의 부(富)는 사실상 ‘부동산’과 동의어였다. ‘오늘 산 아파트 가격이 내일이면 오른다’는 믿음은 사람들을 과감하게 소비하게 만드는 강력한 ‘자산 효과(Wealth Effect)’를 낳았다. 내 자산이 불어나고 있다는 착각은 미래에 대한 낙관론으로 이어졌고, 이는 자동차, 가전, 사치품 소비를 견인했다. 그러나 2021년 헝다 사태로 시작된 부동산 시장의 장기 침체는 이 모든 것을 바꿔놓았다. 수십 년 만에 처음으로 ‘자산 가치 하락’을 경험한 중국인들은 패닉에 빠졌다. 자산이 줄어들고 있다는 공포는 미래를 대비해야 한다는 강박으로 이어져, 소비를 극단적으로 줄이고 현금을 확보하려는 움직임으로 나타났다. 즉, 부동산 쇼크가 소비 심리의 근간을 무너뜨린 첫 번째 도미노였다. 2. 고용 한파와 소득 불안: 미래 쇼크 지갑을 여는 가장 중요한 조건은 ‘미래 소득에 대한 안정적인 기대’다. 그러나 2025년 현재 중국, 특히 젊은 세대에게 이는 사치가 되었다. 1)사상 최악의 청년 실업 : 빅테크와 부동산, 사교육 등 과거 양질의 일자리를 제공하던 산업들이 정부의 규제 철퇴를 맞고 구조조정에 들어가면서 청년 실업률은 감당하기 어려운 수준으로 치솟았다. 2)기존 직장인의 임금 삭감 : 경기 둔화는 기업과 지방 정부의 재정 악화로 이어져, 민간 기업은 물론 공무원 사회에서조차 임금 삭감과 보너스 취소 바람이 불고 있다. ‘오늘의 직장이 내일도 보장된다’는 믿음이 깨지면서, 사람들은 불확실한 미래에 대비하기 위해 허리띠를 졸라매기 시작했다. 특히 결혼, 출산, 내 집 마련 등 막대한 돈이 들어가는 생애주기적 소비를 포기하거나 무기한 연기하는 젊은 층이 늘어나면서 내수 시장의 근간이 흔들리고 있다. 3. '제로 코로나'가 남긴 심리적 상처: 신뢰 쇼크 3년간 이어진 고강도의 ‘제로 코로나’ 정책은 중국인들의 마음에 깊은 상처를 남겼다. 도시 전체가 예고 없이 봉쇄되고, 하루아침에 직장과 수입을 잃을 수 있다는 공포를 집단적으로 체험했다. 이 경험은 중국인들에게 두 가지 교훈을 남겼다. 첫째, 국가가 개인의 삶을 언제든 통제할 수 있다는 불신. 둘째, 예상치 못한 위기에 대비하기 위해서는 막대한 ‘예방적 저축(Precautionary Savings)’이 필수적이라는 깨달음이다. 제로 코로나 해제 이후 ‘보복 소비’가 터질 것이라는 기대와 달리, 오히려 가계 저축률이 폭증한 것은 이러한 심리적 트라우마가 얼마나 깊은지를 방증한다. 제2부: '소비 강급(消费降级)' 시대의 풍경 지갑을 닫은 중국인들은 단순히 소비를 줄이는 것을 넘어, 소비의 방식 자체를 바꾸고 있다. 이른바 **‘소비 강급’**이라 불리는 새로운 트렌드가 사회 전반을 지배하고 있다. 1)"가성비를 숭배하라" : 과거 브랜드와 과시를 중시하던 소비 문화는 이제 ‘가성비(性价比)’를 최우선으로 따지는 문화로 바뀌었다. 알리바바의 타오바오 대신 저가 공동구매 플랫폼인 ‘핀둬둬(拼多多)’가 폭발적으로 성장하고, 화려한 플래그십 스토어 대신 창고형 할인 매장이 인기를 끈다. 스타벅스 대신 1/3 가격의 ‘루이싱 커피(瑞幸咖啡)’를 마시는 것이 합리적인 소비로 여겨진다. 2)"체험은 하되, 사치는 금물" : 소비 욕구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다만 그 방향이 ‘소유’에서 ‘경험’으로, ‘고가’에서 ‘저가’로 바뀌었을 뿐이다. 대표적인 현상이 **‘특종병사식 여행(特种兵式旅游)’**이다. 이는 주말 등을 이용해 최소한의 경비로 잠을 줄여가며 최대한 많은 관광지를 둘러보는 초저가 여행 방식을 뜻한다. 비싼 해외여행 대신 저렴한 국내 소도시 여행이 각광받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3)"중고 거래와 알뜰 소비의 일상화" : 명품을 새로 사는 대신 중고 명품을 찾고, 최신 스마트폰 대신 중고폰을 구매하는 것이 더 이상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어떻게 하면 더 적은 돈으로 만족을 얻을 수 있는가’가 모든 소비의 기준이 되고 있다. 제3부: 정부의 고민 - 왜 부양책은 효과가 없는가? 내수 부진이 장기화되자 중국 정부도 칼을 빼 들었다. 기준금리를 인하하고, 자동차와 가전제품에 대한 보조금을 지급하며, 일부 도시에서는 소비 쿠폰을 발행하는 등 안간힘을 쓰고 있다. 하지만 시장의 반응은 냉담하다. 왜일까? 근본적인 원인은 ‘신뢰’의 부재에 있다. 정부가 아무리 돈을 풀고 대출을 장려해도, 가계가 미래에 대한 확신을 갖지 못하면 그 돈은 소비로 흐르지 않고 은행 계좌에 쌓일 뿐이다. 경제학에서 말하는 **‘유동성 함정(Liquidity Trap)’**과 유사한 상황이다. 또한, 중국 정부는 서구 국가들처럼 국민에게 직접 현금을 지원하는 대규모 재정 부양책을 꺼리는 경향이 있다. 이는 ‘복지주의는 나태를 낳는다’는 공산당의 전통적인 통치 철학과, 부채가 심각한 지방 정부에 더 큰 재정 부담을 지울 수 없다는 현실적 고민이 맞물려 있기 때문이다. 결국, 소비 부진의 원인은 ‘수요’ 측면의 심리 위축에 있는데, 정부의 정책은 여전히 ‘공급’ 측면의 인프라 투자에 머무는 미스매치가 발생하고 있는 것이다. 제4부: 결론 및 제언 중국의 소비 절벽은 ‘성장에 대한 믿음’이 사라진 시대의 필연적 귀결이다. 이는 중국 경제가 투자와 수출이라는 두 바퀴만으로는 더 이상 달릴 수 없는 임계점에 도달했음을 의미한다. 닫힌 소비자의 지갑을 다시 열기 위해서는 금리를 낮추고 보조금을 주는 단기 처방을 넘어, 사회안전망을 확충하고, 공정한 분배 시스템을 만들며, 예측 가능한 정책으로 시장의 신뢰를 회복하는 근본적인 수술이 필요하다. 중국 소비자의 침묵은 단순히 중국만의 문제가 아니다. ‘세계의 시장’ 중국이 수요를 창출하지 못하면, 독일의 자동차 공장도, 프랑스의 와이너리도, 한국의 반도체 기업도 함께 위기에 처할 수밖에 없다. 시진핑 지도부가 이 거대한 ‘수요의 실종’ 사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는 21세기 세계 경제의 향방을 결정할 가장 중요한 변수가 될 것이다. 14억 인구의 기나긴 침묵은 이미 시작되었다.
    • 기획특집
    • 중국이슈
    2025-08-24
  • 회색 코뿔소의 돌진. 중국 지방정부 '부채 폭탄'
    중국의 도시들을 방문하면 세계를 압도하는 인프라에 감탄하게 된다. 하늘을 찌르는 마천루, 대륙을 거미줄처럼 연결하는 고속철도, 최첨단 설비의 공항과 항만. 지난 30년간 중국이 이룩한 눈부신 성장의 상징이다. 그러나 이 화려한 경관은 거대한 신기루일지 모른다. 그 기반을 떠받치고 있는 것은 바로 ‘부채’라는 이름의 모래성이기 때문이다. 2025년 8월 현재, 중국 경제를 위협하는 가장 큰 위험을 꼽으라면 단연 ‘지방 정부 부채’ 문제다. 비공식 통계까지 합하면 그 규모가 90조 위안(약 1경 7000조 원)을 넘어 중국 GDP의 70%에 육박하는 것으로 추산된다. 이는 이미 예견된 위험이었으나 모두가 애써 외면해 온 **‘회색 코뿔소(Gray Rhino)’**다. 이제 부동산 시장의 붕괴라는 방아쇠가 당겨지면서, 육중한 몸을 일으킨 코뿔소가 중국 경제의 심장을 향해 돌진하기 시작했다. 부동산 시장의 침체는 지방 정부의 재정에 직격탄이 되었다. 과거 지방 정부는 토지사용권 매각 수입에 재정의 상당 부분을 의존해왔다. 이 수입원이 막히자, 사회기반시설 투자 등을 위해 무리하게 빌려 쓴 막대한 규모의 '숨겨진 부채(LGFV)'가 시한폭탄으로 떠올랐다. 부채 문제 해결을 위해 중앙정부에 손을 벌리고 있지만, 이는 결국 국가 전체의 재정 건전성을 뒤흔들 수 있는 '회색 코뿔소(예견 가능하지만 간과되는 위험)'로 지목되고 있다. 제1부: 괴물의 탄생 - LGFV와 '토지 재정(土地财政)'의 기원 중국의 지방 부채 문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LGFV(Local Government Financing Vehicle, 地方政府融资平台)’**라는 독특한 존재를 알아야 한다. LGFV는 지방 정부가 사회기반시설 투자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설립한 특수목적법인, 즉 ‘숨겨진 주머니’다. 1. 중앙과 지방의 비대칭적 재정 구조 모든 문제의 뿌리는 1994년의 분세제(分税制) 개혁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중앙정부는 재정 통제력을 강화하기 위해 국세 수입의 비중을 대폭 늘렸다. 반면, 도로 건설, 학교 설립, 공공 서비스 등 돈 쓸 일은 대부분 지방 정부의 몫으로 남겨뒀다. 수입은 줄고 지출은 늘어나는 재정 구조의 모순이 발생한 것이다. 더욱이 예산법상 지방 정부가 직접 은행 대출을 받거나 채권을 발행하는 길은 엄격히 막혀 있었다. 2. '숨겨진 주머니' LGFV의 등장 궁지에 몰린 지방 정부는 법망을 우회할 기발한 방법을 찾아냈다. 바로 지방 정부 소유의 국유기업 형태인 LGFV를 설립하는 것이었다. LGFV는 명목상 독립된 기업이기에 은행 대출과 채권 발행이 자유로웠다. 지방 정부는 보유한 토지의 사용권을 LGFV에 담보로 제공했고, LGFV는 이를 바탕으로 금융시장에서 막대한 자금을 빌려 인프라 건설에 쏟아부었다. 3. '토지 재정'이라는 마약 이 기형적인 시스템을 가능하게 한 마법의 연료는 바로 **‘토지 재정(土地财政)’**이었다. 중국의 토지는 국가 소유이므로, 지방 정부는 토지사용권(보통 40~70년)을 부동산 개발업체에 팔아 막대한 수입을 올렸다. 부동산 시장이 활황일 때 이 모델은 완벽하게 작동했다. 1)지방 정부 : 토지 판매로 재정을 확충하고, 인프라 건설로 GDP 성장률(핵심 고과 지표)을 높여 관리들은 승승장구했다. 2)은행 : 정부가 뒤를 봐주는 LGFV에 안심하고 돈을 빌려주며 막대한 이자 수익을 올렸다. 3)개발업체 : LGFV가 닦아놓은 신도시의 땅을 사서 아파트를 지어 분양하며 천문학적인 돈을 벌었다. 이 ‘부채와 토지에 기반한 성장 모델’은 지난 20년간 중국의 압축 성장을 이끈 핵심 동력이었지만, 동시에 언젠가는 터질 수밖에 없는 폭탄을 키우는 과정이기도 했다. 제2부: 멈춰버린 성장 엔진 - 무엇이 위기를 촉발했나 영원할 것 같던 ‘부채의 축제’는 몇 가지 결정적인 사건을 계기로 종말을 맞이했다. 1. 방아쇠가 된 부동산 시장의 붕괴 가장 결정적인 원인은 부동산 시장의 경착륙이다. 과열된 부동산 시장의 부채 리스크를 우려한 중앙정부가 2020년 강력한 대출 규제인 '세 개의 레드라인(三道红线)' 정책을 도입했다. 이는 헝다, 비구이위안과 같은 거대 개발업체들의 연쇄 디폴트(채무불이행) 사태를 촉발하며 부동산 시장 전체를 얼어붙게 만들었다. 개발업체들이 도산하고 아파트가 팔리지 않자, 더 이상 지방 정부로부터 토지를 사들일 주체가 사라졌다. ‘토지 재정’이라는 핵심 돈줄이 막히면서, 지방 정부와 LGFV는 빌린 돈의 이자조차 갚기 어려운 유동성 위기에 직면했다. 2. 재정을 고갈시킨 '제로 코로나' 정책 엎친 데 덮친 격으로, 3년간 이어진 고강도의 '제로 코로나' 정책은 지방 정부의 재정을 완전히 고갈시켰다. 전 주민 PCR 검사, 대규모 격리 시설 건설, 봉쇄에 따른 경제 활동 중단 등 막대한 방역 비용을 모두 지방 정부가 떠안았다. 이는 가뜩이나 위태롭던 지방 재정에 결정타를 날렸다. 3. 수익성 없는 투자와 부채의 악순환 위기의 근본적인 원인은 부채로 건설한 수많은 인프라가 수익을 내지 못한다는 점이다. GDP 실적을 위해 경쟁적으로 지어진 유령 도시, 이용객이 거의 없는 공항과 고속철도는 유지비만 잡아먹는 애물단지로 전락했다. 빚을 내서 지은 자산이 새로운 현금을 창출하지 못하니, 기존의 빚을 갚기 위해 더 큰 빚을 내야 하는 전형적인 ‘부채의 덫’에 빠진 것이다. 제3부: 위기의 현주소 - 버스 중단에서 월급 체불까지 부채 폭탄의 여파는 이제 중국 인민들의 일상생활을 직접적으로 위협하고 있다. 1)공공 서비스의 마비 : 허난성의 일부 도시에서는 재정난으로 시내버스 운행이 중단되는 사태가 발생했다. 윈난성, 구이저우성 등 부채가 심각한 지역에서는 공무원과 교사의 월급, 퇴직 연금이 몇 달씩 체불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2)금융 시스템으로의 전이 : LGFV가 발행한 채권(성투채, 城投债)은 주로 지방의 중소 은행들이 대거 보유하고 있다. 만약 LGFV의 디폴트가 연쇄적으로 발생할 경우, 부실 채권을 떠안은 지방 은행들의 건전성이 악화되며 국지적 금융위기로 번질 수 있다는 경고가 나온다. 3)'반쪽짜리' 도시들 : 자금난으로 공사가 중단된 도로, 짓다 만 아파트와 상업 시설들이 중국 전역에 흉물처럼 방치되고 있다. 이는 도시의 활력을 떨어뜨리고 국민들의 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증폭시키고 있다. 제4부: 중앙정부의 딜레마 - '구제금융'이냐 '구조조정'이냐 상황이 이 지경에 이르자, 모든 시선은 베이징의 중앙정부로 쏠리고 있다. 시진핑 지도부는 이 회색 코뿔소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를 두고 깊은 딜레마에 빠져있다. 1. 옵션 1 : 전면적 구제금융(Bailout): 중앙정부가 직접 나서 지방의 부채를 갚아주는 방식이다. 1)장점: 대규모 디폴트를 막아 금융 시스템 붕괴와 사회 불안을 막을 수 있다. 2)단점: 지방 정부에 ‘빚을 아무리 져도 결국 중앙이 해결해준다’는 잘못된 신호(도덕적 해이)를 줄 수 있다. 또한 중앙정부의 재정 부담을 폭발적으로 증가시킨다. 2. 옵션 2: 고통 분담과 구조조정(Restructuring): 일부 LGFV의 파산을 용인하고, 지방 정부 스스로 허리띠를 졸라매게 하는 방식이다. 1)장점: 시장 원리에 따라 부실을 정리하고, 지방 정부의 무분별한 부채 증가에 경종을 울릴 수 있다. 2)단점: 과정이 매우 고통스럽다. 파산 과정에서 금융시장이 큰 충격을 받을 수 있으며, 공공 서비스 축소로 인한 민심 이반과 사회 불안을 감수해야 한다. 현재 중국 정부는 **‘시간 벌기’와 ‘책임 떠넘기기’**라는 절충안에 가까운 태도를 보이고 있다. 중앙정부가 직접 구제에 나서기보다는, 부채가 비교적 덜 심각한 성(省) 정부가 재정난에 빠진 시(市) 정부를 지원하게 하는 ‘성급 책임제’를 강조하고 있다. 또한, LGFV 채권의 만기를 연장해주거나 저금리 대출로 갈아타게 해주는 방식으로 급한 불만 끄고 있다. 하지만 이는 근본적인 해결책이 아니라 문제를 미래로 떠넘기는 ‘폭탄 돌리기’에 불과하다는 비판이 지배적이다. 3. 결론 및 제언 중국의 지방 정부 부채 문제는 단순한 경제 문제를 넘어, 중앙집권적 정치 시스템과 지방분권적 경제 개발 사이의 구조적 모순이 빚어낸 필연적 산물이다. 이는 ‘부채 주도 성장’이라는 과거의 성공 방정식이 마침내 한계에 도달했음을 알리는 가장 강력한 경고등이다. 돌진하는 회색 코뿔소 앞에서 시진핑 지도부가 어떤 선택을 내리느냐에 따라 중국의 미래가 결정될 것이다. 과감한 수술로 체질 개선에 성공한다면 지속 가능한 성장 기반을 마련할 수 있겠지만, 수술의 고통을 감내하지 못하고 미봉책으로 시간을 끌다가는 일본의 ‘잃어버린 20년’을 넘어선 장기 침체의 늪에 빠질 수 있다. 분명한 것은, 이 거대한 부채의 청구서는 언젠가 누군가는 반드시 지불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중국 경제의 가장 약한 고리가 터져 나올 때, 그 충격파는 결코 중국 국경 안에만 머물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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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국이슈
    2025-08-24
  • 혐한(嫌韓)과 반중(反中) 루비콘 강을 건넜나
    외교 관계에서 ‘국민 감정’은 종종 수면 아래에 머문다. 정상 간의 악수, 수십억 달러의 무역액, 화려한 문화 교류라는 거대한 빙산의 아래에 가려져 그 중요성을 간과하기 쉽다. 그러나 2025년 현재, 한중 관계라는 거대한 배는 바로 이 ‘국민 감정’이라는 보이지 않는 암초에 부딪혀 좌초될 위기에 처해있다. 최근 몇 년간 발표된 각종 여론조사는 충격적인 현실을 일관되게 가리킨다. 한국인의 중국에 대한 비호감도는 80%를 상회하며, 이는 전통적인 라이벌인 일본을 넘어선 지 오래다. 중국 역시 젊은 층을 중심으로 한국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급격히 확산되고 있다. 한때 ‘한류’에 열광하고 ‘꽌시(關係)’를 외치며 서로를 가장 중요한 파트너라 여겼던 양국 국민은 이제 온라인 공간에서 서로를 향해 ‘짱깨(蔑称)’와 ‘빵즈(棒子)’라는 멸칭을 서슴없이 던지는 사이가 되었다. 정치·경제적 갈등은 시간이 지나면 봉합될 수 있지만, 한번 깊어진 감정의 골은 쉽게 메워지지 않는다. 양국 관계의 미래를 이끌어갈 젊은 세대의 마음속에 자리 잡은 이 깊은 불신과 적대감은 어디에서 시작되었으며, 왜 점점 더 악화되고 있는가. 한중 관계의 가장 연약하고 아픈 속살인 ‘국민 감정’의 실체를 해부하고, 양국이 건너고 있는 이 ‘돌아올 수 없는 강’의 의미를 진단한다. 제1부: 한국의 ‘반중(反中)’ - 분노는 어디에서 오는가 한국 사회의 반중 정서는 하루아침에 생겨난 것이 아니다. 과거 고구려사 왜곡(동북공정) 등 역사 문제에서 비롯된 불씨가 잠재되어 있었지만, 이것이 전 세대에 걸친 거대한 분노로 폭발하게 된 데에는 몇 가지 결정적인 계기가 있었다. 1. 사드 사태: ‘경제 파트너’의 배신과 ‘굴욕’의 기억 모든 전문가들은 2017년 사드 사태를 한국 내 반중 감정의 ‘결정적 분기점’으로 꼽는다. 이전까지 중국은 ‘기회의 땅’이자 ‘함께 성장하는 파트너’라는 인식이 강했다. 그러나 사드 배치를 빌미로 가해진 전방위적 경제 보복(한한령)은 이러한 인식을 산산조각 냈다. 1)힘의 논리에 대한 각성 : 중국은 한국의 안보 주권을 존중하기는커녕, 자국의 이익을 위해 언제든 경제를 ‘무기화’할 수 있는 위협적인 존재임을 스스로 증명했다. 이는 한국 사회에 ‘중국은 믿을 수 없는 나라’라는 깊은 불신을 심었다. 2)국가적 자존심의 상처 : 롯데에 대한 표적 보복, 한국행 단체관광 금지 등 노골적인 방식의 압박은 단순한 경제적 피해를 넘어 국민적 자존심에 깊은 상처를 남겼다. ‘대국’이라던 중국의 ‘소인배’ 같은 행태에 대한 실망과 분노가 광범위하게 확산됐다. 사드 사태는 많은 한국인에게 ‘중국몽(中國夢)’의 실체가 패권주의에 불과하다는 인식을 심어준 트라우마로 남았다. 2. 일상을 파고든 위협: 미세먼지와 코로나19 사드 사태가 ‘국가 대 국가’의 문제였다면, 미세먼지와 코로나19는 국민 개개인의 삶과 건강을 직접적으로 위협하며 반중 감정을 일상화, 체감화시켰다. 1)뿌연 하늘, 답답한 마음 (미세먼지) : 매년 봄철이면 한반도를 뒤덮는 최악의 미세먼지. 상당 부분이 중국에서 발원했다는 과학적 증거에도 불구하고, 중국 정부는 책임을 부인하거나 ‘서울의 미세먼지는 서울에서 배출된 것’이라는 식의 무책임한 태도로 일관했다. 이는 한국인들에게 숨 쉴 권리마저 침해당하고 있다는 무력감과 분노를 안겨주었다. 2)팬데믹의 공포와 책임론 (코로나19) : 2020년 초 중국 우한에서 시작된 코로나19 팬데믹은 전 세계를 공포로 몰아넣었다. 바이러스의 기원, 초기 대응 과정에서의 정보 통제 및 은폐 의혹은 중국에 대한 국제적 불신을 키웠고, 이는 한국도 예외가 아니었다. 감염병이라는 실존적 위협 앞에서 중국의 폐쇄적이고 권위주의적인 체제에 대한 반감이 극대화되었다. 3. 정체성을 향한 공격: 문화·역사 공정 최근 몇 년간 격화된 김치, 한복, 갓 등 한국 고유문화에 대한 ‘원조’ 주장은 불타는 반중 감정에 기름을 부었다. 이는 단순한 해프닝이 아니라, 한국의 역사와 문화적 정체성 자체를 부정하고 중국의 아류로 폄하하려는 ‘문화 동북공정’이라는 인식을 낳았다. 특히 K-팝, K-드라마 등 한류의 세계적 성공에 자부심을 느끼는 젊은 MZ세대에게 이러한 ‘문화 약탈’ 시도는 용납할 수 없는 도발로 받아들여졌다. 이들은 온라인 공간에서 적극적으로 중국의 주장을 반박하고 국제 여론에 호소하며 ‘사이버 외교관’을 자처했다. 이는 기성세대와는 다른 방식으로, ‘공정’과 ‘정의’의 가치를 침해하는 것에 대한 강력한 저항이었다. 이처럼, 한국의 반중 정서는 **안보(사드) → 일상(미세먼지/코로나19) → 정체성(문화 공정)**의 순서로 전방위적으로 심화, 확산되어 왔다. 이는 더 이상 일부 보수층의 이념적 반공주의가 아닌, 세대와 이념을 초월한 보편적인 국민 정서로 자리 잡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제2부: 중국의 ‘혐한(嫌韓)’ - 그들은 왜 한국을 적대하는가 반면, 중국 내에서 확산되는 혐한 감정의 기저에는 한국의 반중 정서와는 또 다른 복합적인 심리가 깔려있다. 1. 사드, ‘믿었던 동생’의 배신감 중국인들에게 사드 배치는 ‘안보 위협’ 이전에 ‘배신감’으로 먼저 다가왔다. 특히 박근혜 정부가 중국의 전승절 열병식에 참석하는 등 친중 행보를 보였기에, 그 직후 이어진 사드 배치 결정은 ‘뒤통수를 맞았다’는 인식으로 이어졌다. 미국과 패권 경쟁을 벌이는 상황에서, 바로 옆집의 ‘동생’이라 여겼던 한국이 자신의 심장에 칼(레이더)을 꽂는 미국의 편에 섰다는 인식이 팽배해졌다. 중국 관영매체들은 이러한 여론에 불을 지폈고, 일반 대중에게 한국은 ‘미국의 앞잡이’, ‘주권 없는 나라’라는 부정적인 이미지가 각인되었다. 2. 문화적 우월감과 ‘한류’에 대한 복잡한 감정 역사적으로 중국은 한국을 중화 문화권의 일부이자 문화적 영향력 아래 있는 나라로 여겨왔다. 그러나 21세기 들어 K-팝과 K-드라마로 대표되는 ‘한류’가 아시아를 넘어 전 세계를 휩쓰는 현상은 이러한 전통적인 위계질서에 균열을 냈다. 1)시기와 질투 : 한때 자신들의 ‘학생’이었던 한국이 세계적인 ‘문화 강국’으로 부상한 현실에 대한 일부 중국인들의 시기와 질투심이 혐한 감정의 밑바탕에 깔려있다. 이는 ‘한국 문화는 뿌리가 없다’, ‘전부 중국 것을 베껴간 것’이라는 식의 폄하와 ‘원조’ 주장으로 이어진다. 2)문화적 자신감의 발로 : 시진핑 시대에 강조되는 ‘문화 자신감’과 애국주의는, 한류의 성공을 자극제로 삼아 ‘중화 문화의 위대함’을 다시금 과시하려는 욕구로 나타났다. 한국 문화를 중국 문화의 하위 범주로 편입시키려는 시도는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3. ‘샤오펀훙(小粉红)’으로 대표되는 온라인 민족주의 중국의 혐한 여론을 주도하는 것은 강력한 애국주의와 중화사상으로 무장한 젊은 세대, 이른바 ‘샤오펀훙(소분홍)’이다. 이들은 중국의 성장을 보고 자라 국가에 대한 자부심이 매우 높으며, 온라인 공간에서 국가의 명예를 훼손하는 어떠한 행위도 용납하지 않는 ‘사이버 전사’ 역할을 한다. 이들에게 한국은 ▲미국에 빌붙어 중국을 위협하고, ▲자국의 문화를 훔쳐 제 것인 양 행세하며, ▲스포츠 경기 등에서 비신사적인 행동을 일삼는 ‘괘씸한 나라’로 인식된다. 한국 연예인이 SNS에서 ‘하나의 중국’ 원칙에 반하는 듯한 뉘앙스를 풍기기만 해도 좌표를 찍고 몰려가 악플 테러를 가하는 것이 이들의 행동 패턴이다. 이러한 극단적인 온라인 민족주의는 양국 젊은 세대 간의 감정의 골을 회복 불가능한 수준으로 만들고 있다. 제3부: 결론 -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는가? 한중 양국의 국민 감정 악화는 단순한 오해나 일시적인 갈등이 아니다. 이는 미중 패권 경쟁이라는 거대한 지정학적 변화, 각국의 국내 정치적 필요성, 그리고 온라인 플랫폼이 만들어낸 증오의 확산 구조가 맞물려 만들어진 구조적인 문제다. 과거에는 ‘정경분리(政經分離)’ 원칙에 따라 정치적 갈등이 있더라도 경제·문화 교류는 이어진다는 믿음이 있었다. 그러나 사드 사태를 거치며 이러한 믿음은 깨졌다. 이제는 정치·안보 갈등이 곧바로 경제와 문화, 그리고 국민 감정에 직격탄을 날리는 ‘정경일치(政經一致)’의 시대가 되었다. 더욱 암울한 것은, 이러한 감정의 골이 미래 세대로 갈수록 더욱 깊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과거 교류의 경험이 없는 양국의 젊은 세대는 온라인이라는 왜곡된 창을 통해 서로를 배우고 혐오를 학습한다. 이들이 양국 관계의 주역이 될 10~20년 뒤의 미래를 낙관하기 어려운 이유다. 그렇다면 해법은 없는가? 정부 차원의 외교적 노력만으로는 얼어붙은 국민의 마음을 녹일 수 없다. 지금 필요한 것은 갈등을 부추기는 자극적인 언어를 경계하는 미디어의 자성, 상대에 대한 최소한의 존중을 가르치는 교육, 그리고 왜곡된 정보의 확산을 막고 건전한 공론을 만들어 나갈 시민사회의 노력이다. 하지만 현재로서는 그 어떤 노력도 거대한 증오의 흐름을 되돌리기에는 역부족으로 보인다. 한중 양국은 지금, 서로를 향한 불신과 적대감이라는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 뒤, 각자의 강둑에 서서 멀어지는 상대를 바라보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 강을 다시 건널 교량을 놓는 것, 그것이 우리 세대에게 주어진 가장 어렵고도 절박한 과제일 것이다.
    • 기획특집
    • 한중이슈
    2025-08-24
  • 사드 배치와 한한령(限韓令), 안보 딜레마
    사드 사태는 단순한 외교 마찰을 넘어, 안보, 경제, 외교, 국민 정서 등 모든 영역에 걸쳐 현재의 한중 관계를 규정짓는 분수령이 된 사건이다. 2017년의 대한민국은 둘로 나뉘었다. 경상북도 성주군 초전면 소성리에서는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발사대 반입을 막으려는 주민들의 절규와 경찰의 방패가 뒤엉켰다. 서울 명동의 화장품 가게들은 중국인 단체 관광객(유커)의 발길이 뚝 끊겨 유령 도시처럼 변해갔다. TV에서는 한국 연예인들이 사라졌고, 중국에 진출했던 수많은 기업은 하루아침에 ‘적’이 되어 불매운동과 영업정지의 칼날 위에 섰다. ‘사드 사태’는 이 모든 풍경을 관통하는 하나의 거대한 이름이었다. 북한의 핵미사일 위협에 맞서기 위한 ‘주권적 방어 조치’라는 한국의 외침은, 자국의 ‘전략적 안보 이익’을 침해당했다는 중국의 거대한 분노 앞에 힘을 잃었다. 그 분노는 ‘한한령(限韓令)’이라는 이름의 전방위적 경제 보복으로 구체화되었고, 1992년 수교 이래 낙관론이 지배했던 한중 관계는 근본부터 흔들렸다. 한반도의 운명을 바꾼 사드 배치 결정의 순간부터 현재까지, 그 격동의 시간을 복기하며 우리 사회와 한중 관계에 남겨진 깊은 흔적을 추적했다. 제1부: 결정의 서막 - 왜 ‘사드’였나? 1. 고도화되는 북한의 위협, 방패가 필요했다 2010년대 중반, 한반도의 안보 환경은 그 어느 때보다 위태로웠다. 북한은 김정은 정권 수립 이후 핵실험과 장거리 미사일 발사를 노골적으로 감행하며 대남 위협 수위를 연일 끌어올렸다. 특히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 시험 발사 성공 등 미사일 기술이 비약적으로 발전하면서, 기존의 패트리엇(PAC-2/3) 미사일 방어 체계로는 요격 고도와 범위에 한계가 있다는 우려가 커졌다. ‘킬 체인(Kill Chain)’, ‘한국형 미사일방어체계(KAMD)’ 등 우리 군의 자체적인 방어 능력 구축에는 시간이 필요했다. 당장 발등에 떨어진 불을 끌 현실적인 대안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힘을 얻기 시작했다. 이때 미국의 ‘사드’가 수면 위로 급부상했다. 사드는 요격 고도가 40~150km에 달해, 하강하는 적의 탄도미사일을 높은 고도에서 직접 요격할 수 있는 현존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어 시스템 중 하나로 꼽혔다. 2. ‘안미경중(安美經中)’의 딜레마, 선택의 기로에 서다 사드 카드가 등장하자 한국은 외교적 딜레마에 빠졌다. ‘안보는 미국, 경제는 중국’이라는 노선으로 양대 강국 사이에서 균형을 유지해 온 한국에게 사드는 양자택일을 강요하는 시험대와 같았다. 미국은 동맹국 보호와 자국 MD(미사일 방어) 체계의 확장이라는 틀 안에서 주한미군의 사드 배치를 지속적으로 요구했다. 반면, 중국은 사드 배치를 자국을 겨냥한 ‘군사적 위협’으로 규정하며 일찌감치부터 강력한 경고 메시지를 보내왔다. 박근혜 정부는 초기 ‘전략적 모호성’을 유지하며 시간을 벌고자 했다. “미국의 요청도, 협의도, 결정도 없었다”는 이른바 ‘3NO’ 입장을 견지하며 중국을 달랬다. 2015년 중국의 전승절 열병식에 참석하며 과시했던 양국의 우호 관계가 이러한 기류의 정점이었다. 그러나 2016년 1월, 북한이 4차 핵실험을 감행하면서 모든 것이 바뀌었다. 북한의 폭주를 제어하는 데 중국이 소극적이라는 인식이 확산되면서, 정부 내 기류는 급격히 ‘사드 배치 용인’으로 기울었다. 결국 2016년 7월 8일, 한미 양국은 주한미군에 사드 체계를 배치하기로 최종 결정했다고 공식 발표했다. ‘안보’가 ‘경제’를 압도한 순간이었다. 제2부: 보복의 칼날 - ‘한한령’, 한국의 모든 것을 겨누다 중국의 보복은 공식 발표가 나자마자 즉각적이고, 전방위적이며, 집요하게 시작됐다. 중국 정부는 단 한 번도 ‘한한령’의 존재를 공식 인정한 적이 없다. 하지만 그들이 동원한 방식은 공식적인 제재보다 훨씬 더 고통스러웠다. 행정 규제, 언론을 통한 여론전, 민간의 불매 운동이 결합된 ‘보이지 않는 보복’은 한국 경제의 가장 약한 고리를 정밀하게 타격했다. 1. 유커(遊客)의 증발: 관광·유통업의 궤멸 가장 먼저 칼날이 향한 곳은 관광 산업이었다. 2017년 3월, 중국 국가여유국은 베이징과 산둥성 등 주요 여행사에 한국행 단체관광 상품 판매를 전면 중단하라는 구두 지시를 내렸다. 연간 800만 명에 달하던 중국인 관광객의 발길이 하루아침에 끊겼다. 1)명동과 제주도의 몰락 : 유커들로 북적이던 서울 명동과 제주는 직격탄을 맞았다. 화장품 가게, 식당, 면세점들은 줄줄이 폐업하거나 개점휴업 상태에 빠졌다. 2017년 방한 중국인 관광객 수는 전년 대비 48.3% 급감하며 반 토막이 났다. 2)면세점 업계의 위기 : 전체 매출의 70% 이상을 중국인에게 의존하던 국내 면세점들은 창사 이래 최악의 위기를 맞았다. 재고는 쌓이고 매출은 급락하며 수조 원대의 손실을 감수해야 했다. 2. 롯데, 표적이 되다 사드 부지를 제공했다는 이유로 ‘롯데그룹’은 중국의 ‘공공의 적’이 되었다. 중국 당국은 롯데의 현지 사업장에 대해 소방, 위생, 환경 등 모든 분야에 걸쳐 전방위적인 세무조사와 행정 조사를 벌였다. 1)마트 영업 중단 사태 : 중국 내 99개에 달하던 롯데마트 점포 중 87곳이 소방 점검 등을 이유로 영업정지 처분을 받았다. 관영매체가 주도하는 불매 운동까지 겹치면서 롯데마트의 중국 사업은 사실상 마비 상태에 빠졌다. 2)천문학적 손실과 사업 철수 : 롯데는 결국 버티지 못하고 2018년 중국 시장에서 마트 사업의 전면 철수를 결정했다. 이 과정에서 입은 손실액만 수조 원에 달하는 것으로 추산된다. 롯데의 사례는 중국이 정치적 이유로 외국 기업의 운명을 어떻게 좌우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 상징적인 사건으로 남았다. 3. 문화의 빗장: K-콘텐츠의 실종 ‘한한령’이라는 용어 자체가 처음 등장한 문화·엔터테인먼트 분야의 피해도 막심했다. 1)출연 금지 및 수입 중단 : 중국 방송에서 한국 연예인들의 모습이 사라졌고, 한국 드라마와 영화의 신규 수입이 전면 금지됐다. 이미 촬영을 마친 한중 합작 드라마들은 방영이 무기한 연기되며 막대한 제작비 손실을 입었다. 2)K-팝 콘서트 취소 : 중국에서 예정되었던 K-팝 아이돌 그룹들의 콘서트와 팬 미팅이 줄줄이 취소되었다. 이는 한류의 가장 큰 시장이었던 중국의 문이 닫혔음을 의미했다. 3)게임 판호 발급 중단 : 중국 시장 진출의 필수 조건인 ‘판호’(서비스 허가권) 발급이 한국 게임사들에게는 중단되었다. 이로 인해 국내 게임업계는 수년간 중국 시장에 신작을 출시하지 못하는 고통을 겪었다. 이 외에도 현대·기아차의 판매량 급감, 한국산 배터리를 탑재한 전기차에 대한 보조금 미지급 등 보복의 칼날은 한국의 주력 산업 거의 모든 분야를 향했다. 제3부: 중국의 논리 - 그들은 왜 ‘전략적 이익’을 외쳤나? 중국이 이토록 극렬하게 반발한 이유는 무엇일까? 표면적으로는 ‘북한 방어용’이라는 사드가 실제로는 자국을 겨냥하고 있다는 안보적 불신이 그 핵심에 있다. 1. X-밴드 레이더, 중국의 심장을 겨누다 중국이 문제 삼은 것은 사드 미사일 자체가 아니라, 그 구성 요소인 ‘AN/TPY-2’ X-밴드 레이더였다. 이 레이더의 탐지 거리는 최대 1,800km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한반도에 배치될 경우 베이징을 포함한 중국 동북부 지역 대부분의 군사 동향을 손금 보듯 들여다볼 수 있다는 것이 중국의 주장이었다. 즉, 중국은 사드 레이더가 자국의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기지를 감시하고, 이 정보를 미국 MD 체계와 공유함으로써 자국의 ‘핵 보복 능력’을 무력화시킬 것을 우려했다. 이는 미중 간의 ‘전략적 균형’을 깨뜨리는 심각한 안보 위협이라는 인식이었다. 한국의 ‘생존권’이 중국의 ‘전략적 이익’과 정면으로 충돌한 것이다. 2. ‘닭을 죽여 원숭이를 겁준다(杀鸡儆猴)’ 중국의 거친 보복에는 또 다른 전략적 의도가 숨어있었다. 바로 ‘살계儆猴’, 즉 닭(한국)을 죽여 원숭이(미국과 주변국)를 겁준다는 계산이다. 중국은 한국을 본보기로 삼아, 향후 미국의 MD 체계에 편입하려는 다른 아시아 국가들(일본, 필리핀 등)에게 강력한 경고 메시지를 보내려 했다. 자국의 핵심 이익을 건드리는 국가는 동맹 관계나 경제적 교류와 무관하게 언제든 가혹한 대가를 치를 것이라는 점을 명확히 보여준 것이다. 이는 동아시아의 패권국으로서 자국의 ‘레드 라인’을 설정하고, 이를 넘는 행위를 결코 용납하지 않겠다는 의지의 과시였다. 제4부: 봉합과 남겨진 상처 - ‘3불 1한’과 그 이후 1. 3불(不)1한(限) 극단으로 치닫던 갈등은 2017년 10월 31일, 양국이 ‘한중 관계 개선 관련 협의 결과’를 발표하며 외교적으로 봉합 국면에 들어섰다. 이 과정에서 한국 정부가 중국 측에 전달한 이른바 ‘3불(不) 1한(限)’ 입장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3불(不): ▲사드를 추가 배치하지 않고, ▲미국의 미사일방어체계(MD)에 참여하지 않으며, ▲한미일 군사동맹으로 발전시키지 않는다. 1한(限): 이미 배치된 사드 운용을 제한하여 중국의 전략적 안보 이익을 침해하지 않도록 한다. 이 합의로 단체 관광이 일부 재개되는 등 급한 불은 껐지만, 이는 한국의 안보 주권에 스스로 족쇄를 채운 ‘굴욕 외교’라는 비판을 동시에 낳았다. 2. 사드가 남긴 깊은 상처와 교훈 1)깨져버린 신뢰, 돌아선 민심 : 사태 이전까지 ‘기회의 땅’으로 여겨졌던 중국은 ‘언제든 돌변할 수 있는 위협적인 존재’로 각인되었다. 한국 국민의 반중(反中) 정서는 이 시기를 기점으로 폭발적으로 증가했으며, 이는 양국 관계의 가장 큰 걸림돌이 되고 있다. 2)‘차이나 리스크’의 학습과 공급망 재편 : 한국 기업들은 특정 국가에 대한 과도한 경제 의존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뼈저리게 체감했다. 사드 사태는 이후 코로나19, 요소수 사태 등을 거치며 ‘탈(脫)중국’ 및 공급망 다변화 논의를 가속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3)돌아오지 않는 한류 : 한한령이 공식적으로 해제되지 않은 상황에서, K-콘텐츠는 여전히 중국 시장에서 예전의 위상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 대신 한류는 동남아, 유럽, 북미 등지로 시장을 다변화하며 새로운 활로를 모색하는 계기를 맞았다. 4. 결론 및 제언 사드 사태는 1992년 수교 이후 25년간 이어진 한중 관계의 1막이 끝나고, 갈등과 경쟁이 새로운 상수가 된 2막이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서곡이었다. ‘안보는 미국, 경제는 중국’이라는 안일한 공식이 더 이상 통하지 않는 미중 신냉전 시대의 냉혹한 현실을 우리에게 가르쳐주었다. 성주 기지에 임시 배치된 사드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인 안보 현안이다. ‘3불 1한’의 족쇄는 여전히 우리 외교의 선택지를 제약하고 있다. 사드 사태가 남긴 가장 중요한 교훈은, 우리의 생존과 직결된 안보 주권을 그 어떤 경제적 이익이나 외교적 관계로도 타협할 수 없다는 사실일 것이다. 동시에, 강대국들의 힘이 충돌하는 지정학적 현실 속에서 국익을 극대화하기 위한 더욱 정교하고 냉철한 외교 전략이 절실하다는 과제를 남겼다. 사드의 먼지는 가라앉았지만, 그로 인해 드러난 한중 관계의 민낯과 동북아의 지정학적 균열은 여전히 우리 앞에 놓여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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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중이슈
    2025-08-24
  • 끝나지 않은 총성, 김치·한복 논쟁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한중 관계를 설명하는 키워드는 ‘한류(韓流)’와 ‘치맥(치킨과 맥주)’이었다. 드라마 ‘별에서 온 그대’가 중국 대륙을 휩쓸고, 한국의 화장품과 패션은 선망의 대상이었다. 문화는 양국 국민의 마음을 잇는 가장 부드럽고 강력한 다리처럼 보였다. 그러나 2020년대를 기점으로 그 다리는 곳곳이 끊어지고 파괴되기 시작했다. 이제 온라인 공간에서 양국의 젊은 세대는 서로를 향해 ‘문화 도둑’, ‘역사 왜곡’이라며 날 선 비난을 퍼붓고 있다. 그 중심에 ‘김치’와 ‘한복’이 있다. 우리에게는 너무나 당연한 일상이자 민족의 정체성이 담긴 문화유산이 어느 날 갑자기 ‘중국 것’이라는 주장의 대상이 된 것이다. 이른바 ‘김치·한복 공정(工程)’. 이는 단순한 해프닝이나 일부 네티즌의 설전을 넘어, 시진핑 시대 중국의 팽창하는 문화 민족주의와 한국 사회의 불안감이 정면으로 충돌하는 거대한 전선(戰線)이 되었다. 이 문화 전쟁의 시작과 전개, 그리고 그 이면에 숨겨진 양국의 정치·사회적 욕망을 심층적으로 추적했다. 이것은 음식과 옷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정체성과 자존심, 그리고 미래 세대의 인식을 둘러싼 총성 없는 전쟁에 대한 이야기다. 제1부: 김치의 눈물, ‘파오차이’라는 이름의 멍에 1. 발단: ISO 인증과 환구시보의 불씨 2020년 11월, 모든 논쟁의 시작점이 된 사건이 발생했다. 중국 쓰촨성의 염장채소인 ‘파오차이(泡菜)’가 국제표준화기구(ISO)로부터 국제 표준 인증을 획득한 것이다. 문제의 본질은 파오차이의 인증 그 자체가 아니었다. ISO 문서 스스로도 “이 문서는 김치(Kimchi)에 적용되지 않는다”고 명시하며 선을 그었다. 그러나 중국의 관영매체 환구시보(環球時報)는 이를 의도적으로 왜곡, “중국 김치 산업이 국제 김치 시장의 기준이 됐다”, “한국은 굴욕을 당했다”는 식의 선동적인 기사를 쏟아냈다. 이는 곧바로 중국 최대 소셜미디어인 웨이보를 통해 확산됐고, ‘한국의 김치는 사실 중국 파오차이의 아류’라는 인식이 기정사실처럼 퍼져나갔다. 한국 언론이 팩트체크를 통해 반박에 나섰지만, 이미 불은 걷잡을 수 없이 번진 뒤였다. 2. 중국의 논리: ‘문화 동북공정’과 중화 패권주의 중국의 주장은 크게 두 가지 논리로 요약된다. 첫째, 역사적 연관성이다. 한국의 채소 절임 문화가 고대 중국에서 전래되었으며, 따라서 김치는 큰 틀에서 중국의 파오차이 문화권에 속한다는 것이다. 둘째, ‘조선족’을 고리로 한 편입 논리다. 중국의 55개 소수민족 중 하나인 조선족이 김치를 먹으니, 김치는 자연스럽게 중국 문화의 일부라는 주장이다. 이는 과거 고구려사를 중국의 지방사로 편입하려 했던 ‘동북공정’의 논리와 정확히 일치한다. 자국의 경계 안에 존재하는 모든 역사와 문화를 ‘중화(中華)’라는 거대한 용광로에 녹여 넣으려는 시도, 이른바 ‘문화 동북공정’의 서막이었다. 전문가들은 이를 시진핑 주석 집권 이후 강화된 ‘문화 자신감(文化自信)’과 애국주의 교육의 산물로 분석한다.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을 꿈꾸는 ‘중국몽(中國夢)’ 아래, 주변국의 고유문화까지 자국의 역사로 포섭하려는 문화 제국주의적 발상이라는 비판이 제기되는 이유다. 3. 한국의 반박: 과학과 역사가 증명하는 김치의 독자성 이에 대한 한국의 반박은 명료하다. 김치와 파오차이는 기원, 재료, 발효 방식에서 완전히 다른 음식이다. 1)기원과 역사 : 한국의 김치는 삼국시대부터 채소를 소금에 절여 먹던 ‘저(菹)’ 문화에서 출발, 고려 시대를 거치며 다양한 향신료가 추가되었고, 조선시대 임진왜란 이후 고추가 전래되면서 오늘날과 같은 붉은 김치의 형태로 발전했다. 반면, 파오차이는 채소를 소금물에 절여 단기간에 발효시키는 쓰촨 지역의 염장채소다. 2)발효 방식의 차이 : 김치는 젓갈과 고춧가루, 마늘, 생강 등 다양한 양념을 버무려 저온에서 유산균으로 서서히 발효시키는 ‘발효 과학’의 정수다. 이에 반해 파오차이는 소금물에 채소를 담가 젖산 발효를 유도하는 방식으로, 김치와는 발효에 관여하는 미생물군부터 다르다. 3)문화적 상징성 : 한국에서 김치는 단순한 음식을 넘어 공동체 문화의 상징이다. 이웃과 함께 김치를 담그고 나누는 ‘김장 문화’는 2013년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되며 그 독창성과 공동체적 가치를 세계적으로 인정받았다. 이처럼 명백한 역사적, 과학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중국이 억지 주장을 굽히지 않는 것은, 사실 관계의 증명보다는 ‘문화적 종주국’이라는 이미지를 선점하려는 정치적 의도가 깔려있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제2부: 한복의 수난, ‘한푸’라는 이름의 그림자 1. 발단: 베이징 동계올림픽 개막식의 충격 김치 논쟁의 불씨가 채 꺼지기도 전인 2022년 2월, 더 큰 충격이 전 세계를 덮쳤다. 베이징 동계올림픽 개막식, 중국의 국기인 오성홍기를 전달하는 퍼포먼스에 분홍색 저고리와 푸른색 치마, 즉 누가 봐도 명백한 ‘한복’을 입은 여성이 중국 내 소수민족 대표 중 한 명으로 등장한 것이다. 전 세계 수십억 명이 지켜보는 가운데, 중국은 한복이 자국의 55개 소수민족 중 하나인 ‘조선족’의 의상이므로, 이는 곧 중국 문화의 일부라는 메시지를 시각적으로 각인시켰다. 한국 사회는 들끓었다. 이는 단순히 옷 한 벌의 문제가 아니라, 한국의 고유한 민족 복식을 자국의 다문화주의를 선전하는 도구로 전락시키고 그 정체성을 희석시키려는 명백한 ‘문화 찬탈’ 행위라는 분노가 폭발했다. 2. 중국의 논리: ‘영향’을 ‘기원’으로 둔갑시키다 한복을 둘러싼 중국의 주장은 더욱 교묘하다. 그들은 역사적으로 한국이 중국 왕조(특히 명나라)의 의복 양식에 영향을 받았으므로, 한복은 중국 ‘한푸(漢服)’의 아류이거나 그 영향을 받은 복식이라는 논리를 편다. 온라인에서는 한복과 명나라 시대 한푸를 비교하며 유사성을 부각하는 콘텐츠가 대량으로 유포된다. 하지만 이는 문화의 ‘상호 교류’와 ‘종속’을 의도적으로 혼동하는 전형적인 논리 왜곡이다. 역사적으로 동아시아 국가들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문화를 발전시킨 것은 상식에 속한다. 이탈리아의 파스타가 중국의 면 요리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있다고 해서 파스타를 중국 음식이라 부르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다. 중국의 논리는 이러한 보편적 문화 교류의 역사를 무시하고, 모든 영향 관계를 ‘중화’로의 일방적 편입 관계로 재단하려는 패권적 시각을 드러낸다. 3. 한국의 반박: 독자적 발전 계보를 지닌 민족의 옷 한복은 고구려 고분벽화에서부터 그 원형을 찾아볼 수 있을 정도로 유구한 역사를 지녔다. 중국의 당나라, 원나라, 명나라와 교류하며 일부 유행을 받아들이기도 했으나, ‘짧은 상의(저고리)와 풍성한 하의(치마/바지)’라는 기본 구조를 유지하며 우리 고유의 미감과 생활양식에 맞게 독자적으로 발전해왔다. 특히 조선 시대에 이르러서는 넉넉하고 우아한 실루엣의 한푸와 달리, 상의는 짧아지고 하의는 풍성해지는 ‘상박하후(上薄下厚)’의 독창적인 미학을 완성했다. 저고리의 ‘고름’, 치마의 ‘허리끈’ 등 세부적인 구조와 착장 방식 역시 한푸와는 명백히 구분되는 고유한 특징이다. 한복은 단순한 옷이 아니라, 수천 년간 한민족의 희로애락과 함께해 온 살아있는 역사이자 정체성 그 자체다. 제3부: 심층 분석 - 왜 지금, ‘문화 전쟁’인가? 이러한 문화 논쟁이 2020년대 들어 유독 격화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는 단순히 양국 네티즌 간의 감정싸움으로 치부할 수 없는 복합적인 정치·사회적 배경을 담고 있다. 1. 내부 결속을 위한 ‘외부의 적’: 중국의 신(新) 애국주의 시진핑 시대의 중국은 강력한 국력을 바탕으로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을 외치고 있다. 이 과정에서 역사와 문화를 국가 중심의 서사로 재편하고, 젊은 세대에게 극단적인 애국주의와 중화사상을 주입하고 있다. 특히 코로나19 팬데믹, 미중 패권 경쟁 등으로 내부적 불만이 고조될 때마다, 외부의 ‘적’을 설정해 내부 결속을 다지는 것은 중국 공산당의 전통적인 통치 방식이다. 이 과정에서 지리적으로 가깝고, 문화적으로도 얽혀 있으며, 미국의 동맹국인 한국은 ‘공격하기 좋은’ 표적이 되었다는 분석이다. 한류의 세계적 성공에 대한 시기와 견제 심리 또한 이러한 흐름에 불을 지폈다. 2. 악화된 상호 인식과 ‘MZ세대의 반격’ 사드(THAAD) 사태와 한한령, 홍콩 민주화 시위, 코로나19 책임론 등을 거치며 한국 사회의 대중(對中) 인식은 역대 최악의 수준으로 떨어졌다. 특히 공정과 정의에 민감한 한국의 MZ세대는 중국의 불합리한 주장과 역사 왜곡에 대해 과거 세대보다 훨씬 더 공격적이고 직설적으로 반격에 나서고 있다. 이들은 온라인 플랫폼을 통해 논쟁을 주도하고, ‘#hanbok_is_korean_traditional_clothes’와 같은 해시태그 운동을 벌이며 국제 여론에 호소한다. 이는 더 이상 당하고만 있지 않겠다는 문화적 자존감의 발현이자, 기성세대의 외교적 수사(레토릭)를 넘어선 새로운 방식의 저항이다. 3. 알고리즘이 증폭시키는 ‘디지털 민족주의’ 유튜브, 틱톡, 웨이보 등 소셜미디어 플랫폼은 이러한 갈등을 증폭시키는 확성기 역할을 한다. 양국의 사용자들은 각자의 플랫폼 안에서 자신들의 주장을 강화하는 정보만을 선택적으로 소비하며 ‘확증 편향’에 빠지기 쉽다. 알고리즘은 비슷한 성향의 콘텐츠를 끊임없이 추천하며 사용자를 ‘필터 버블’ 안에 가두고, 이는 상대국에 대한 혐오와 적개심을 극대화하는 결과를 낳는다. 온라인상의 ‘사이버 전사’들은 사실 관계의 확인보다는 감정적인 비난에 몰두하며, 이는 합리적인 토론의 가능성을 원천적으로 차단하고 있다. 제4부: 파장과 전망 - 상처뿐인 싸움, 해법은 없는가? 1. 깊어지는 감정의 골, 미래 관계의 암초 김치와 한복 논쟁은 양국 관계에 깊은 생채기를 남겼다. 무엇보다 심각한 것은 양국 미래를 이끌어갈 젊은 세대 간의 감정의 골이 회복하기 어려운 수준으로 깊어졌다는 점이다. 정치적, 경제적 갈등은 이해관계에 따라 봉합될 수 있지만, 역사와 정체성을 건드리는 문화 갈등은 마음속 깊은 곳에 앙금으로 남아 장기적인 관계 발전에 심각한 암초로 작용할 수밖에 없다. 한때 한류의 최대 소비 시장이었던 중국 시장의 문은 점점 좁아지고 있으며, 문화 교류는 단절의 위기로 치닫고 있다. 2. 정부의 딜레마와 미디어의 역할 양국 정부는 이러한 갈등이 외교 문제로 비화하는 것을 경계하며 신중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그러나 국민적 분노가 들끓는 상황에서 정부의 ‘전략적 모호성’은 때로 ‘저자세 외교’, ‘굴욕 외교’라는 비판에 직면하기도 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미디어의 역할은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 자극적인 보도로 민족주의 감정을 부추기기보다는, 사실관계를 명확히 하고, 갈등의 배경을 심층적으로 분석하며, 장기적인 해법을 모색하는 공론의 장을 열어야 할 책임이 있다. 3. 전망과 제언: 존중 없는 교류는 불가능하다 김치와 한복 논쟁은 단기간에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이는 미중 패권 경쟁이라는 거대한 지정학적 구도와 중국 내부의 정치적 변화와 맞물려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단기적인 대응과 함께 장기적인 전략 마련이 시급하다. 첫째, 학술적·논리적 대응 강화가 필요하다. 감정적 대응을 넘어, 김치와 한복의 역사적 독자성을 명확한 근거와 데이터로 정리하고, 이를 다양한 언어로 번역해 국제 사회에 적극적으로 알리는 체계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둘째, 문화 교류의 패러다임 전환이 요구된다. 일방적인 한류 전파를 넘어, 상대 문화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와 존중을 바탕으로 한 쌍방향 교류를 모색해야 한다. 문화는 우열을 가리는 경쟁의 대상이 아니라, 다름을 인정하고 공유하며 풍성해지는 인류의 자산이기 때문이다. 셋째, 우리 문화에 대한 자부심과 성찰이 동반되어야 한다. 외부의 도발에 흔들리지 않기 위해서는 우리 스스로가 우리 문화의 가치와 역사를 제대로 알고 사랑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결국 김치와 한복 논쟁은 우리에게 ‘중국을 어떻게 볼 것인가’라는 질문과 함께, ‘우리는 누구인가’라는 근원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다. 이 총성 없는 전쟁의 끝에서 우리가 얻어야 할 것은 상처뿐인 승리가 아니라, 우리 문화에 대한 확고한 자부심과 이웃을 대하는 성숙한 지혜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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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8-24
  • 中, '드러눕는 청년' 탕핑족의 경고…미래를 거부하는 세대
    중국의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탕핑(躺平)'이라는 새로운 삶의 방식이 거대한 파문을 일으키고 있다. '탕핑'은 문자 그대로 '평평하게 눕는다'는 뜻이다. 이는 사회가 강요하는 끝없는 경쟁과 성공 신화에서 벗어나, 자발적으로 최소한의 삶을 선택하겠다는 젊은이들의 소리 없는 아우성이자, 중국의 미래에 대한 강력한 경고음이다. 중국 정부는 공식적인 청년 실업률 발표를 중단했지만, 비공식적인 통계와 시장의 체감은 사상 최악의 수준을 가리키고 있다. 매년 1천만 명이 넘는 대졸자가 쏟아져 나오지만, 빅테크 규제와 경기 둔화로 양질의 일자리는 급감했다. 극심한 경쟁(내권, 内卷)에 지친 청년들은 최소한의 노력으로 생계를 유지하려는 '탕핑(躺平, 드러눕기)'을 택하고 있으며, 이는 사회 전체의 활력을 떨어뜨리고 잠재적 사회 불안 요소로 작용하고 있다. 1. '탕핑주의'의 등장: 우리는 왜 드러눕는가 '탕핑'이라는 단어가 중국 사회에 본격적으로 등장한 것은 2021년 4월, 중국의 한 인터넷 커뮤니티에 올라온 글 한 편에서 시작됐다. '탕핑이 바로 정의다(躺平即是正义)'라는 제목의 이 글에서 작성자는 2년 넘게 안정적인 직업 없이, 한 달에 200위안(약 3만 8천 원)으로 생활하는 자신의 경험담을 공유했다. 그는 하루 두 끼만 먹고, 돈이 들지 않는 낚시나 산책으로 소일하며, 돈이 떨어지면 엑스트라 아르바이트로 최소한의 생계비만 벌었다. 그는 "열심히 일해봤자 자본가의 노예가 되어 '996 근무'(오전 9시부터 오후 9시까지 주 6일 근무)에 시달리다 병만 얻을 뿐"이라며, "치솟는 집값과 물가를 감당하며 아등바등 살기보다는, 차라리 아무것도 하지 않는 편이 낫다"고 주장했다. 이 글은 순식간에 젊은 층의 폭발적인 공감을 얻으며 '탕핑주의'라는 하나의 사회 현상으로 번져나갔다. 탕핑족은 단순히 게으름이나 나태함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는 사회 구조적인 문제에 대한 개인의 적극적인 '비폭력·비협조 저항' 운동의 성격을 띤다. 결혼, 출산, 내 집 마련, 자동차 구매, 심지어는 과도한 소비까지 포기하며, 사회가 제시하는 성공의 기준을 따르기를 거부한다. 이는 과거 일본의 '사토리 세대(さとり世代·득도 세대)', 한국의 'N포 세대'와도 맥을 같이 하지만, 중국의 탕핑족은 국가 주도의 성장 신화에 대한 정면 도전이라는 점에서 더욱 폭발력이 크다. 2. 절망의 늪: 무엇이 청년들을 눕게 만들었나 그렇다면 무엇이 중국의 젊은이들을 '드러눕게' 만들었을까? 탕핑 현상의 배경에는 복합적인 사회·경제적 요인들이 자리하고 있다. 1) 살인적인 경쟁 문화, '네이쥐안(内卷)' 탕핑을 이해하기 위한 핵심 키워드는 '네이쥐안'이다. '안으로 말려 들어간다'는 뜻의 이 단어는, 성장은 정체된 상태에서 내부의 소모적인 경쟁만 극심해지는 현상을 의미한다. 중국의 젊은이들은 유치원 때부터 대입 시험 '가오카오(高考)'를 거쳐 취업 시장에 이르기까지, 인생의 모든 단계에서 무한 경쟁에 내몰린다. 특히 '996 근무'로 대표되는 비인간적인 노동 환경은 젊은이들의 심신을 지치게 만들었다. 알리바바의 마윈 전 회장이 "996은 젊은 시절의 축복"이라고 말해 논란이 됐듯, 일부 기성세대는 이러한 과도한 노동을 당연시했다. 하지만 청년들은 "아무리 노력해도 돌아오는 것은 번아웃과 건강 악화뿐"이라며, 이러한 '노력 강요 사회'에 환멸을 느끼게 된 것이다. 2) 하늘 높은 줄 모르는 집값과 생활비 개혁개방 이후 급속한 경제 성장을 이룬 중국이지만, 그 과실은 공평하게 분배되지 않았다. 특히 베이징, 상하이 등 대도시의 집값은 평범한 월급쟁이가 수십 년을 꼬박 모아도 감당할 수 없는 수준으로 치솟았다. 2021년 기준, 선전의 소득 대비 주택가격비율(PIR)은 43.5배에 달했다. 이는 43.5년 동안 한 푼도 쓰지 않고 월급을 모아야 겨우 집 한 채를 살 수 있다는 의미다. 결혼과 출산, 육아에 들어가는 막대한 비용 역시 청년들의 어깨를 짓누른다. 교육열이 높은 중국 사회에서 자녀 한 명을 키우는 데 드는 비용은 상상을 초월한다. 이처럼 노력으로 넘을 수 없는 현실의 벽 앞에서 청년들은 희망을 품는 것 자체를 포기하고, 최소한의 비용으로 살아가는 '탕핑'을 선택하게 되는 것이다. 3) 좁아지는 취업문과 '중국몽'의 배신 시진핑 주석이 내세운 '중국몽(中国梦)'은 모든 인민이 행복한 삶을 누리는 부강한 중국을 약속했다. 그러나 청년들이 체감하는 현실은 '중국몽'과는 거리가 멀었다. 매년 1천만 명이 넘는 대졸자가 쏟아져 나오지만, 양질의 일자리는 한정되어 있어 취업난은 갈수록 심화되고 있다. 2023년 6월, 중국의 청년 실업률(16~24세)은 21.3%로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으며, 이후 중국 당국은 청년 실업률 발표를 돌연 중단하기까지 했다. 이는 실제 상황이 통계 수치보다 훨씬 심각하다는 방증으로 해석된다. 여기에 더해 '꽌시(关系)'로 대표되는 배경과 인맥 중심의 채용 문화는 평범한 청년들에게 깊은 좌절감을 안겨준다. 국가가 제시한 빛나는 미래와 암울한 현실 사이의 괴리 속에서 청년들은 무력감을 느끼고 '탕핑'으로 침잠하고 있다. 4) 코로나19 팬데믹과 사회적 통제 강화 2020년부터 이어진 코로나19 팬데믹과 중국 정부의 강력한 '제로 코로나' 봉쇄 정책은 탕핑 현상을 더욱 가속화했다. 장기간의 도시 봉쇄는 경제에 큰 타격을 주었고, 이는 곧 기업의 채용 축소와 대규모 해고로 이어졌다. 또한, 개인의 삶에 대한 국가의 강력한 통제와 감시는 청년 세대에게 깊은 무력감과 회의감을 심어주었다. 불확실한 미래와 억압적인 사회 분위기 속에서 개인의 행복과 자유를 추구하려는 욕구가 '탕핑'이라는 소극적 저항의 형태로 분출된 것이다. 3. '탕핑'이 던지는 경고: 사회적 파장과 중국의 미래 단순한 개인의 라이프스타일 선택을 넘어, 탕핑 현상은 중국 사회 전반에 걸쳐 상당한 파장을 일으키고 있다. 1) 노동력 감소와 소비 위축 탕핑족의 확산은 중국 경제의 근간을 흔들 수 있는 심각한 위협이다. 국가의 미래를 짊어져야 할 청년들이 노동 시장 참여를 거부하고 최소한의 생존만 추구하게 되면, 장기적으로 노동 인구 감소와 생산성 저하를 초래할 수밖에 없다. 또한, 소비를 극단적으로 줄이는 탕핑족의 생활 방식은 내수 시장 활성화를 통해 성장을 꾀하려는 중국 정부의 정책 기조와 정면으로 배치된다. 중국 공산당이 "인구 감소보다 탕핑족의 확산이 더 무섭다"고 우려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2) 결혼율·출산율 급락과 인구 문제 심화 탕핑은 결혼과 출산을 포기하는 삶의 태도와 직결된다. 이는 세계 최저 수준의 출산율로 고민하는 중국의 인구 문제를 더욱 악화시키는 요인이다. 중국 정부는 뒤늦게 '세 자녀 정책'을 도입하는 등 출산 장려에 나섰지만, 젊은이들의 반응은 냉담하다. "내 한 몸 건사하기도 힘든데, 아이를 낳아 똑같은 고통을 물려줄 수 없다"는 것이 이들의 솔직한 심정이다. 탕핑족의 확산은 중국 사회의 지속가능성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다. 3) 체제에 대한 무언의 저항 중국 공산당은 '분투'와 '노력'을 통해 '중국몽'을 실현해야 한다는 이데올로기를 끊임없이 주입해왔다. 그러나 탕핑은 이러한 국가 주도의 거대 서사에 동참하기를 거부하는, 가장 조용하면서도 가장 강력한 저항의 방식이다. "내가 누우면 자본이 나를 착취할 수 없다"는 탕핑족의 구호는, 현 체제에 대한 젊은 세대의 불신과 냉소를 명확히 보여준다. 중국 정부가 '탕핑' 관련 게시물을 검열하고, 관영 매체를 동원해 "탕핑은 부끄러운 일"이라고 비판하는 것은 이러한 '조용한 반란'이 체제 안정에 미칠 위협을 심각하게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4. 출구는 있는가: '탕핑'을 넘어선 사회를 향하여 탕핑 현상은 중국 사회가 고도성장의 그늘에 가려져 있던 구조적 모순에 직면했음을 보여주는 명백한 신호다. 과도한 경쟁, 심각한 불평등, 경직된 사회 구조 속에서 미래를 박탈당한 청년들의 절망이 '드러눕는' 행위로 표출된 것이다. 중국 정부는 탕핑을 개인의 나약함이나 비뚤어진 가치관의 문제로 치부하며 비판의 날을 세우고 있지만, 이는 문제의 본질을 외면하는 미봉책에 불과하다. 탕핑 현상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청년들이 다시 일어서서 미래를 꿈꿀 수 있는 사회적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 무엇보다 시급하다. 살인적인 노동 환경을 개선하고, 부동산 가격을 안정시키며, 공정한 기회를 보장하는 사회 안전망을 확충하는 근본적인 개혁이 필요하다. 청년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그들의 좌절에 공감하며, 실질적인 희망의 사다리를 놓아주는 노력이 절실하다. '드러누운' 청년들의 외침은 비단 중국만의 문제가 아니다. 무한 경쟁과 불평등 심화라는 전 지구적 과제 앞에서 우리 사회는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지, 탕핑족의 등장은 우리에게도 무거운 질문을 던지고 있다. 중국의 미래는 드러누운 청년들을 어떻게 다시 일으켜 세울 수 있느냐에 달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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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8-24
  • 중국 '부동산 불패' 신화의 종언
    과거 중국 경제 성장의 30%를 견인했던 부동산 신화는 이제 끝없는 악몽이 되었다. 2021년 헝다(Evergrande) 사태로 시작된 위기는 비구이위안(Country Garden) 등 대형 개발업체들의 연쇄 부실로 이어지며 금융 시스템 전체를 위협하는 뇌관으로 작용하고 있다. 미완공 아파트(烂尾楼) 문제로 평생 모은 돈을 날린 수분양자들의 시위가 끊이지 않고 있으며, 부동산 시장의 장기 침체는 소비 심리 위축과 내수 부진의 핵심 원인이 되고 있다. 한때 14억 대륙의 부(富)를 견인하며 '불패 신화'로 불렸던 중국의 부동산 시장이 거대한 모래성처럼 무너져 내리고 있다. 2021년 세계를 떠들썩하게 했던 헝다(恒大) 그룹의 파산을 시작으로, 업계 1위였던 비구이위안(碧桂園)마저 채무 불이행 늪에 빠지면서 위기는 중국 경제 전체를 뒤흔드는 시스템 리스크로 번지고 있다. 화려한 마천루 아래, 완공됐지만 아무도 살지 않는 **'유령도시(鬼城)'**가 스산한 모습을 드러내고, 공사가 중단된 채 흉물로 방치된 **'란웨이러우(烂尾楼)'**에 갇힌 서민들의 분노는 마침내 **'주택담보대출 상환 거부'**라는 집단행동으로 폭발했다. 중국 부동산 위기의 세 가지 핵심 키워드, '유령도시', '부동산 그룹 도산', '서민들의 반발'을 통해 그 실태를 심층적으로 진단하고, 중국 사회가 마주한 거대한 도전을 조명한다. 제1부: 텅 빈 도시의 신기루, '유령도시(鬼城)' 중국 부동산 버블의 가장 기괴하고 상징적인 장면은 바로 '유령도시'다. 사람이 살지 않는 아파트 단지, 불 꺼진 사무용 빌딩, 텅 빈 쇼핑몰이 끝없이 펼쳐진 도시. 이는 중국식 개발 모델의 탐욕과 광기가 빚어낸 필연적인 결과물이었다. 원인 1: 지방정부의 'GDP 숭배'와 토지재정 모든 문제의 근원은 중국 지방정부의 왜곡된 재정 구조에 있다. 중국 지방정부 관리들의 인사고과에 가장 중요한 지표는 관할 지역의 GDP 성장률이었다. 단기간에 GDP 수치를 끌어올리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대규모 건설 투자를 유치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지방정부들은 '토지재정(土地财政)'이라는 비정상적인 수입 모델에 의존했다. 농민들로부터 싼값에 수용한 토지를 기반 시설을 갖춘 개발용지로 바꿔 부동산 개발업체에 비싸게 팔아넘기는 방식이다. 이 토지 매각 수입은 지방정부 재정의 40% 이상을 차지할 정도로 절대적이었다. 개발업체는 비싸게 산 땅값을 분양가에 전가했고, 이는 고스란히 부동산 가격 폭등으로 이어졌다. 실제 수요와 무관하게 '일단 짓고 팔면 된다'는 생각으로 도시 외곽에 거대한 신도시들이 경쟁적으로 건설되었고, 이는 유령도시의 탄생을 예고했다. 원인 2: 투기 수요가 만들어낸 거품 중국 서민들에게 부동산은 가장 확실한 부의 축적 수단이었다. 불안정한 주식 시장과 엄격한 외환 통제로 마땅한 투자처를 찾지 못한 가계 자금이 부동산 시장으로 쏠렸다. '오늘 사는 게 가장 싸다'는 인식이 퍼지면서 가격은 천정부지로 치솟았고, 사람들은 실제 거주 목적이 아닌, 시세 차익을 노린 투기적 목적으로 여러 채의 집을 사들였다. 개발업체는 이런 투기 심리를 이용해 미래 수요를 과장하며 계속해서 아파트를 지어 올렸다. 이렇게 공급된 수많은 아파트는 실제 거주자가 채우지 못한 채 빈집으로 남아 유령도시를 구성하는 핵심 요소가 되었다. <대표적 사례: 오르도스 캉바스 신구> '유령도시'의 대명사로 불리는 곳은 네이멍구 자치구의 오르도스 캉바스 신구다. 풍부한 석탄 자원을 바탕으로 100만 명 규모의 최첨단 도시를 꿈꿨지만, 무리한 개발과 자원 경기 하락이 겹치면서 도시는 유령처럼 변했다. 잘 닦인 8차선 도로 위에는 자동차보다 모래바람이 더 자주 보이고, 현대적인 건축물들은 주인을 찾지 못한 채 텅 비어 있다. 이는 수요를 무시한 공급 위주의 개발이 어떤 비극적 결과를 낳는지 똑똑히 보여주는 사례다. 제2부: '거인의 몰락', 부동산 그룹의 연쇄 도산 유령도시라는 거대한 버블을 만들어낸 주역인 부동산 개발업체들은 스스로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차례로 쓰러지고 있다. 그 시작은 헝다 그룹이었다. 1)'헝다 쇼크': 빚으로 쌓아 올린 제국의 붕괴 헝다 그룹은 '세 개의 허리띠'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공격적인 부채 경영으로 성장한 기업이다. 즉, 정부(토지), 은행(대출), 구매자(선분양 자금)라는 세 개의 허리띠에서 돈을 빌려 사업을 확장하는 방식이다. 헝다는 부동산으로 번 돈을 다시 부동산에 투자하는 것을 넘어, 전기차, 프로 축구단, 생수, 금융업 등 관련 없는 분야까지 무차별적으로 확장했다. 이러한 폭주에 제동을 건 것은 중국 정부였다. 부동산 시장 과열이 금융 시스템 전체를 위협할 수 있다고 판단한 정부는 2020년, 개발업체의 부채를 강력하게 규제하는 '3대 레드라인(三道红线)' 정책을 발표했다. 이는 사실상 부채 의존도가 높은 기업들의 돈줄을 막아버리는 조치였다. 새로운 대출이 막히자 헝다는 순식간에 유동성 위기에 빠졌고, 결국 3,000억 달러(약 400조 원)가 넘는 빚을 감당하지 못하고 2021년 공식적인 채무 불이행을 선언했다. 2)도미노처럼 번지는 위기: 비구이위안의 디폴트 헝다의 붕괴는 시작에 불과했다. 한때 업계 1위이자 가장 안전하다고 평가받던 비구이위안마저 2023년 달러 채권 이자를 갚지 못하며 채무 불이행 위기에 빠졌다. 헝다가 대도시 중심의 무리한 사업 다각화로 무너졌다면, 비구이위안은 주로 3, 4선 중소도시를 중심으로 사업을 펼치다 부동산 경기 침체의 직격탄을 맞았다. 이는 부동산 위기가 일부 부실 기업의 문제가 아닌, 업계 전반에 퍼진 구조적 문제임을 드러낸 사건이었다. 현재 수십 개의 대형 부동산 개발업체들이 채무 불이행 상태에 빠져 있으며, 중국 부동산 시장은 신뢰를 완전히 상실한 상태다. 제3부: 서민들의 반발, '란웨이러우'와 '대출 상환 거부' 부동산 그룹의 도산은 그들만의 문제로 끝나지 않았다. 그 피해는 평생 모은 돈으로 내 집 마련의 꿈을 꾸었던 수많은 서민에게 고스란히 전가되었다. 1)꿈이 멈춘 곳: 란웨이러우(烂尾楼) '썩은 꼬리 건물'이라는 뜻의 **'란웨이러우'**는 개발업체의 자금난이나 부도로 공사가 중단된 건물을 말한다. 중국의 독특한 '선분양' 제도는 란웨이러우를 양산하는 주범이 되었다. 중국에서는 아파트 골조만 올라가도 분양 대금의 대부분을 미리 내야 한다. 개발업체들은 이 돈으로 건물을 완공하는 대신, 다른 사업에 투자하거나 빚을 갚는 데 유용했다. 그러다 자금줄이 막히자 공사는 기약 없이 중단되었고, 아파트는 앙상한 뼈대만 남은 채 도시의 흉물로 방치되었다. 수분양자들은 평생 모은 돈을 날리고, 입주도 못한 채 매달 수백만 원의 주택담보대출 이자를 갚아야 하는 절망적인 상황에 내몰렸다. 일부는 전기와 수도도 없는 란웨이러우에 직접 들어가 살며 처절한 저항을 하기도 했다. 2)최후의 저항: 주택담보대출 상환 거부 운동(停贷潮) 더 이상 희망이 없다고 판단한 수분양자들은 마침내 최후의 수단을 선택했다. 2022년 여름, 장시성의 한 아파트 단지에서 시작된 **'주택담보대출 상환 거부 운동'**은 SNS를 통해 들불처럼 번져나갔다. "공사를 재개하지 않으면, 대출 상환도 재개하지 않겠다"는 이들의 집단행동은 순식간에 중국 전역 100여 개 도시, 300여 개 아파트 단지로 확산되었다. 이는 중국 공산당 정권에 심각한 경고였다. 개인의 저항을 용납하지 않는 사회에서 수십만 명이 참여하는 집단행동이 벌어졌다는 것 자체가 체제를 위협하는 매우 이례적인 사건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 운동이 금융 시스템 부실로 이어질 경우, 부동산 위기가 금융 위기로 전이되는 최악의 시나리오를 촉발할 수도 있었다. 중국 정부가 서둘러 란웨이러우 문제 해결을 위한 자금 지원에 나선 것도 이러한 사회적, 경제적 파장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제4부: 기로에 선 중국, 고통스러운 전환의 시작 중국의 부동산 위기는 단순한 경기 순환의 문제가 아니다. 이는 지난 40년간 중국의 고속 성장을 이끌어 온 '부채 주도 성장 모델'이 한계에 부딪혔음을 알리는 명백한 신호다. 시진핑 정부 역시 "집은 거주하는 곳이지 투기 대상이 아니다(房住不炒)"라고 선언하며 과거와의 단절을 시도하고 있다. 하지만 그 전환의 과정은 매우 고통스러울 것이다. 부동산 시장의 경착륙을 막기 위해 정부가 각종 부양책을 쏟아내고 있지만, 이미 신뢰를 잃고 수요가 얼어붙은 시장을 되살리기엔 역부족이다. 수많은 유령도시와 란웨이러우, 그리고 부동산 개발업체들이 남긴 천문학적인 부채는 앞으로 수십 년간 중국 경제의 발목을 잡는 족쇄가 될 것이다. 중국 부동산 위기는 더 이상 강 건너 불이 아니다. G2 경제의 심장부에서 발생한 균열은 세계 경제에 거대한 불확실성을 드리우고 있다. '만들면 팔린다'는 성공 방정식에 취해 있던 중국은 이제 그 대가를 치르고 있다. 텅 빈 도시의 신기루가 걷히고, 부채의 파티가 끝난 자리에서 중국이 어떤 새로운 길을 찾아 나설지, 전 세계가 숨죽이며 지켜보고 있다.
    • 기획특집
    • 중국이슈
    2025-08-23
  • 동북공정, 역사 침탈, 문화 도용: 21세기 중국의 거대 프로젝트
    ‘동북변강역사여현상계열연구공정’의 줄임말인 동북공정은 고구려, 발해 등 한국 고대사를 중국의 지방 정권 역사로 편입하려는 중국의 국가적 프로젝트다. 이는 한국의 역사적 정체성을 흔드는 심각한 ‘역사 침탈’ 행위로, 학술적 논쟁을 넘어 국민적 감정 대립으로 비화했다. 따라서 21세기 대한민국과 중국의 관계를 논할 때, ‘동북공정(東北工程)’이라는 네 글자를 빼놓고는 이야기할 수 없다. 2002년 공식적으로 시작되어 2007년 막을 내린 것으로 알려진 이 거대한 역사 프로젝트는 단순한 학술 연구가 아니었다. 그것은 중국의 국가적 필요에 의해 기획되고, 치밀한 논리 아래 실행되었으며, 양국의 국민 감정을 최악으로 치닫게 한 ‘역사 전쟁’의 서막이었다. 프로젝트가 공식 종료된 지 18년이 훌쩍 넘었지만, 그 망령은 ‘김치공정’, ‘한복공정’과 같은 ‘문화공정’의 형태로 되살아나 오늘날까지도 양국 관계에 깊은 상흔을 남기고 있다. 동북공정이라는 거대한 프로젝트가 왜 시작되었고, 어떤 논리로 우리의 역사를 침탈했으며, 한국 사회는 어떻게 대응했는지, 그리고 그 유산이 현재 우리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를 23여 년의 시간을 해부한다. 제1부: 동북공정의 서막 - 용은 왜 역사를 탐하기 시작했는가? 2002년, 중국 사회과학원 산하 중국변강사지연구중심(中國邊疆史地硏究中心)이 주도하는 대규모 국가 프로젝트가 조용히 시작되었다. 공식 명칭은 ‘동북변강역사여현상계열연구공정(東北邊疆歷史與現狀系列研究工程)’. 중국 동북 지역의 역사와 현상에 관한 체계적 연구 프로젝트라는 뜻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아는 ‘동북공정’이다. 겉으로는 학술 연구의 형태를 띠었지만, 그 이면에는 냉철한 정치·전략적 계산이 깔려 있었다. 1) 전략적 불안감: 한반도 통일과 국경 안정 문제 동북공정의 가장 핵심적인 배경은 1990년대 이후 중국이 느끼기 시작한 전략적 불안감이다. 1992년 한중 수교가 이루어지고 남북한이 UN에 동시 가입하면서 한반도 정세는 급변했다. 중국의 지도부는 머지않은 미래에 한반도가 통일될 가능성을 심각하게 고려하기 시작했다. 특히 북한의 체제 불안정성이 가시화되면서, 북한 붕괴 시나리오와 그에 따른 후폭풍은 중국의 핵심 안보 현안으로 떠올랐다. 중국이 우려한 것은 두 가지였다. 첫째, 통일 한국이 친미(親美) 성향을 띠게 될 경우, 막강한 경제력과 군사력을 갖춘 통일 국가가 미군과 함께 압록강·두만강 국경을 맞대게 되는 상황이다. 둘째는 더욱 근본적인 문제, 바로 영토 분쟁의 가능성이었다. 현재 중국의 동북 3성(랴오닝성, 지린성, 헤이룽장성)은 고구려와 발해의 옛 터전이다. 이 지역에는 200만 명에 가까운 조선족(朝鮮族)이 거주하고 있다. 만약 한반도가 통일되고, 통일 한국이 민족주의를 바탕으로 옛 고구려 영토에 대한 역사적 연고권을 주장할 경우, 이는 중국 동북 지역의 안정과 ‘중화민족’의 통합을 심각하게 위협할 수 있는 불씨가 될 수 있었다. 중국은 이러한 잠재적 위협의 싹을 사전에 제거할 필요성을 절감했다. 역사를 바로잡는다는 명분 아래, 미래에 제기될 수 있는 모든 영토 분쟁의 가능성을 원천 차단하는 것, 그것이 동북공정의 가장 중요한 전략적 목표였다. 2) 이데올로기적 토대: '통일적 다민족국가론' 이러한 정치적 목적을 학술적으로 뒷받침한 것이 바로 **‘통일적 다민족국가론(統一的 多民族國家論)’**이다. 이는 현대 중국의 역사관을 지배하는 핵심 이데올로기다. 그 골자는 다음과 같다. "현재 중국 국경 안에서 과거에 존재했던 모든 민족과 그들이 세운 국가는 모두 중국 역사의 일부이다." 이 논리에 따르면, 한족(漢族)이 세운 국가뿐만 아니라 만주족의 청나라, 몽골족의 원나라 역시 모두 중국사다. 문제는 이 논리를 한반도와 직접 관련된 고대사, 즉 고구려와 발해의 역사에 적용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고구려와 발해의 영토 대부분이 현재 중국 국경 안에 위치하므로, 이들 역시 중국의 역사, 구체적으로는 중화민족을 구성하는 56개 소수민족 중 하나의 역사가 되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른다. 이는 과거 왕조 중심의 역사관에서 벗어나, 현재의 국경을 기준으로 과거를 재단하는 전형적인 ‘역사공학’이다. 독립적인 국가였던 고구려와 발해를 중국 중앙 왕조의 ‘지방 정권’으로 격하시키고, 그 역사를 중국사라는 거대한 용광로에 녹여버리려는 시도였다. 이러한 이론적 토대 위에서, 동북공정은 고구려사와 발해사를 중국사의 일부로 편입시키는 작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제2부: 동북공정의 논리 - 어떻게 역사를 왜곡하는가? 동북공정은 고구려와 발해를 중국사로 만들기 위해 기존의 학술적 성과를 무시하고, 사료를 아전인수 격으로 해석하며, 때로는 의도적으로 사실관계를 왜곡하는 방식을 취했다. 그들의 핵심 논리와 그에 대한 한국 학계의 반박은 다음과 같다. 1. 고구려(Goguryeo) 왜곡 1)동북공정의 주장: "고구려는 고대 중국의 소수민족이 세운 지방정권이다." 근거 ① - 조공(朝貢) 관계: 고구려가 중국의 여러 왕조에 조공을 바쳤으므로, 이는 종속 관계의 증거라고 주장한다. 근거 ② - 책봉(冊封) 관계: 중국 황제가 고구려 왕을 ‘요동군공 고구려왕(遼東郡公 高句麗王)’ 등으로 책봉했으므로, 고구려는 중국의 제후국이었다고 주장한다. 근거 ③ - 영토 문제: 고구려의 초기 중심지가 한사군(漢四郡) 중 하나인 현도군(玄菟郡) 관할 내에 있었으므로, 시작부터 중국의 영토 안에서 출발했다는 논리를 편다. 2)한국 학계의 반박: "고구려는 독자적 천하관을 가진 독립 주권 국가였다." 조공에 대한 반박: 전근대 동아시아에서 조공-책봉은 일종의 외교 형식이었으며, 정치적 종속 관계와는 거리가 멀었다. 조공은 선진 문물 습득과 안정적인 무역 관계 유지를 위한 실리 외교의 수단이었다. 고구려는 중국과 전쟁을 벌이면서도 필요에 따라 조공을 보내는 등, 국제 관계를 주체적으로 운영했다. 책봉에 대한 반박: 책봉 역시 마찬가지다. 고구려는 중국으로부터 왕의 지위를 인정받는 책봉을 받으면서도, 내부적으로는 ‘태왕(太王)’이라는 황제급 칭호를 사용하고 ‘영락(永樂)’과 같은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했다. 이는 고구려가 중국 중심의 세계관과는 다른, 자신들이 세상의 중심이라는 **독자적 천하관(天下觀)**을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명백한 증거다. 영토 문제에 대한 반박: 한사군의 위치와 영역에 대해서는 학계의 논란이 있으며, 설령 초기 영토가 일부 겹친다 하더라도 그것이 국가의 정체성을 규정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고구려는 수(隋)·당(唐)과 같은 통일 제국과 수십 년간 대규모 전쟁을 치르며 동아시아의 패권을 다툰 강력한 독립 국가였다. 만약 고구려가 중국의 지방정권이었다면, 수 양제가 113만 대군을 동원하고 당 태종이 직접 군대를 이끌고 침공한 ‘내란’을 역사상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이는 논리적으로 명백한 모순이다. 2. 발해(Balhae) 왜곡 1)동북공정의 주장 : "발해는 당나라의 지방 행정기관이자, 말갈족이 주체가 된 국가이다." 근거 ① - 책봉 관계: 발해의 건국자인 대조영(大祚榮)이 당나라로부터 ‘발해군왕(渤海郡王)’으로 책봉받았으므로, 발해는 당의 지방 정권이라고 주장한다. 근거 ② - 민족 구성: 발해의 주민 다수가 말갈족이었으므로, 고구려 계승 국가로 볼 수 없다고 주장한다. 2)한국 학계의 반박 : "발해는 고구려를 계승한 명백한 한국사 국가이다." 책봉에 대한 반박: 대조영이 책봉을 받은 것은 국가를 세운 지 20여 년이 지난 후의 일이다. 이는 발해의 실체를 사후에 인정한 것에 불과하다. 발해는 스스로를 ‘고려(高麗, 고구려)’라 칭했고, 일본에 보낸 외교 문서에서도 발해 국왕을 ‘고려 국왕’으로 칭하며 고구려 계승 의식을 분명히 했다. 민족 구성에 대한 반박: 발해는 고구려 유민인 지배층과 말갈족인 피지배층으로 구성된 다민족 국가였으나, 국가의 정체성을 결정하는 것은 지배층의 계승 의식과 문화의 연속성이다. 발해의 수도였던 상경성(上京城)의 구조는 당나라 장안성의 영향을 받았지만, 온돌 난방 시설, 불상 양식, 무덤 양식 등에서는 고구려 문화의 특징이 뚜렷하게 발견된다. 이는 발해가 고구려 문화를 계승하고 발전시켰음을 보여주는 고고학적 증거다. 제3부: 실행과 확산 - 보이지 않는 역사 침탈의 전선 동북공정은 단순히 학술 논문을 발표하는 데 그치지 않았다. 중국은 국가의 모든 역량을 동원하여 왜곡된 역사관을 자국민에게 주입하고, 나아가 국제 사회에 기정사실화하려는 전방위적인 작업을 펼쳤다. 1)교과서와 박물관 : 중국의 역사 교과서에서 고구려와 발해는 중국사의 일부로 기술되기 시작했다. 지린성(吉林省) 지안시(集安市)에 있는 고구려 유적지 박물관이나 랴오닝성(遼寧省) 박물관 등의 전시 내용은 고구려가 한나라 때부터 중국의 통치를 받은 지방 정권이라는 식의 설명으로 채워졌다. 광개토대왕릉비와 같은 핵심 유물에 대한 접근은 통제되었고, 한국 연구자들의 연구 활동은 심각한 제약을 받았다. 2)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 시도 : 동북공정의 야심이 국제적으로 드러난 결정적 사건은 고구려 유적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단독 등재 시도였다. 중국은 2003년 자국 내 고구려 유적을 단독으로 등재하려 했다. 이는 고구려사가 자국의 역사라는 것을 국제적으로 공인받으려는 매우 교묘하고 치밀한 전략이었다. 한국 정부와 학계가 강력히 반발하고 외교적 노력을 기울인 끝에, 2004년 7월 남한과 북한에 있는 고구려 유적과 중국에 있는 고구려 유적이 각각 별개의 유산으로 동시에 등재되는 것으로 일단락되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중국의 역사 왜곡 의도가 만천하에 드러났다. 3)인터넷과 대중 매체 : 바이두(Baidu)와 같은 중국의 대표적인 인터넷 백과사전에는 고구려와 발해가 중국사로 버젓이 기술되어 있다. 중국 중앙방송(CCTV)은 동북공정의 논리를 그대로 담은 역사 다큐멘터리를 제작하여 방영하는 등, 대중 매체를 통한 역사관 전파에도 주력했다. 제4부: 한국의 대응과 갈등의 격화 - 뒤늦은 각성과 상처뿐인 합의 동북공정이 시작된 초기, 한국 정부와 학계는 그 심각성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했다. 일부 학자들이 꾸준히 문제를 제기했지만, 사회적 공론화로 이어지지 못했다. 상황이 급변한 것은 2004년, 중국의 유네스코 등재 시도와 함께 중국 외교부 홈페이지의 한국사 관련 개요에서 고구려사 부분이 삭제되고, 고구려가 중국의 소수민족 정권이었다는 내용이 기술된 사실이 알려지면서부터다. 언론의 대대적인 보도와 함께 국민적 분노가 들끓기 시작했다. 시민단체들은 주한 중국대사관 앞에서 연일 시위를 벌였고, 정치권에서도 초당적인 비판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뒤늦게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한국 정부는 외교 채널을 통해 강력히 항의했고, 이는 양국 간의 심각한 외교 갈등으로 비화했다. 결국 2004년 8월, 양국은 "역사 문제의 정치 쟁점화를 막고, 학술 교류를 통해 해결하며, 중국 정부는 고구려사 문제의 한국사 귀속성을 인정하는 한국 측의 입장에 유의한다"는 내용의 5개 항 구두 양해에 합의했다. 이는 급한 불을 끄기 위한 미봉책에 불과했다. 중국은 공식적인 역사 왜곡은 자제하겠다고 약속했지만, 학술 연구라는 이름 아래 동북공정은 계속 진행되었다. 정부 차원에서는 2004년 고구려연구재단을 긴급히 설립했고, 이후 이를 확대 개편하여 2006년 동북아역사재단을 출범시켰다. 동북아역사재단은 동북공정의 논리에 대응하는 연구를 수행하고, 올바른 역사를 국내외에 알리는 역할을 맡았다. 학계와 시민 사회에서도 VANK와 같은 단체들이 인터넷을 통해 중국의 역사 왜곡을 알리는 등 자발적인 대응 노력이 이어졌다. 제5부: 동북공정 그 이후 - 끝나지 않은 '문화공정'의 시대 2007년, 5년간의 공식 프로젝트 기간이 끝나면서 동북공정은 막을 내렸다. 그러나 이는 끝이 아닌 새로운 시작이었다. 고대사에 집중되었던 역사 왜곡의 칼날은 이제 한국의 고유한 생활 문화와 예술 전반을 향하기 시작했다. 이른바 **‘문화공정(文化工程)’**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문화공정은 동북공정의 논리, 즉 ‘중국 국경 안에서 이루어진 모든 것은 중국의 것’이라는 논리를 문화 영역으로 확장시킨 것이다. 고대사 논쟁이 학술적 영역에 머물렀다면, 문화공정은 대중의 일상과 감정을 직접적으로 파고든다는 점에서 더욱 교묘하고 파급력이 크다. 1)김치(Kimchi)와 파오차이(泡菜) : 중국은 한국의 김치가 자국의 절임 채소인 파오차이에서 유래했다고 주장하며, 심지어 파오차이가 김치의 국제 표준인 것처럼 여론을 호도했다. 이는 한국인의 정체성과도 같은 음식 문화를 폄하하고 종속시키려는 의도로 해석되어 큰 반발을 샀다. 2)한복(Hanbok)과 한푸(漢服) : 중국의 일부 네티즌들과 매체는 한복이 명나라의 한푸(漢服)에서 유래했다며 ‘한푸 동북공정’을 펼치기 시작했다. 한국의 전통 복식을 중국 문화의 아류로 취급하는 이러한 주장은 특히 양국의 젊은 세대 간에 극심한 감정싸움을 유발했다. 3)역사 인물과 예술의 국적 세탁 : 중국은 지린성 옌볜 출신인 윤동주 시인을 ‘중국 조선족 애국 시인’으로 표기하고, 아리랑, 판소리, 씨름 등 한국의 전통 문화유산을 자국의 소수민족 문화로 소개하며 조선족의 문화유산으로 등재하는 시도를 계속하고 있다. 이러한 문화공정은 과거 동북공정처럼 국가기관이 전면에 나서기보다는, 관영 매체의 은근한 보도, 인플루언서(왕홍)의 SNS 활동, 애국주의 네티즌(소분홍, 小粉紅)의 조직적인 여론전 등 훨씬 더 분산되고 대중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이는 대응을 더욱 어렵게 만들며, 양국 국민, 특히 미래 세대의 상호 인식을 돌이킬 수 없이 악화시키는 주범이 되고 있다. 4)결론: 역사 전쟁의 폐허 위에서 미래를 묻다 동북공정은 중국이라는 거대 국가가 자국의 정치적 필요에 따라 이웃 나라의 역사를 어떻게 재단하고 침탈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 21세기의 비극적인 실례다. 이 프로젝트가 남긴 가장 큰 상처는 단순히 왜곡된 역사 지식이 아니다. 그것은 대한민국 국민의 가슴에 깊이 새겨진 ‘중국에 대한 불신’이며, 중국 국민에게 주입된 ‘역사적 우월감과 편견’이다. 한번 파괴된 신뢰는 쉽게 회복되지 않으며, 잘못 심어진 역사 인식은 세대를 넘어 이어지기 쉽다. 이제 우리는 동북공정이라는 폐허 위에서 질문해야 한다. 우리는 왜 역사에 천착해야 하는가? 역사는 단순히 박제된 과거의 기록이 아니기 때문이다. 역사는 한 민족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뿌리이며, 현재를 이해하고 미래로 나아가는 나침반이다. 우리의 뿌리를 부정당하고 나침반을 빼앗길 때, 우리는 국제 사회 속에서 우리의 고유한 가치와 위상을 지켜낼 수 없다. 동북공정과 그 변종인 문화공정에 맞서는 것은 맹목적인 반중(反中) 감정이나 국수주의적 대응이 되어서는 안 된다. 더욱 철저하고 엄밀한 학술 연구를 통해 우리의 논리를 단단히 하고, 이를 바탕으로 국제 사회를 설득하며, 우리 내부적으로는 역사 교육을 강화하여 미래 세대가 올바른 역사관을 갖도록 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강력하고 지속 가능한 대응이 될 것이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는 낡은 경구는, 21세기 동북아의 지정학 속에서 여전히 서늘하고 유효한 진실로 남아있다.
    • 기획특집
    • 한중이슈
    2025-08-23
  • 꺼지지 않는 동토의 불길,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2022년 2월 24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특별군사작전'을 선언하며 시작된 우크라이나 침공이 어느덧 3년 차(2025년 8월 기준)에 접어들었다. 당초 수일 내 수도 키이우(러시아명 키예프)가 함락될 것이라는 예상을 뒤엎고 우크라이나의 결사항전과 서방의 지원이 이어지면서, 전쟁은 동남부 전선을 중심으로 한 소모전 양상으로 굳어졌다. 지난 3년간 수십만 명의 군인과 민간인이 목숨을 잃었고, 국토는 폐허가 되었다. 이 전쟁은 단순한 지역 분쟁을 넘어, 전후 국제 질서를 근본적으로 뒤흔들고 에너지·식량 위기, 신냉전 구도 고착화 등 전 지구적 파장을 낳고 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의 복잡한 역사적 배경부터 참혹한 전쟁의 경과, 그리고 국제 사회에 미친 영향과 향후 전망을 알아본다. 제1부: 천 년의 애증, '키예프 루스'에서 갈라선 형제의 길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관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천 년 전의 역사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두 나라의 뿌리는 9세기경 지금의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를 중심으로 번성했던 동슬라브 최초의 국가 **'키예프 루스(Kievan Rus')'**에 닿아있다. 푸틴 대통령이 "러시아인과 우크라이나인은 한 민족"이라고 주장하는 근거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러나 13세기 몽골의 침략으로 키예프 루스가 멸망하면서 두 민족의 운명은 갈라지기 시작했다. 이후 모스크바를 중심으로 세력을 키운 러시아가 독자적인 제국으로 발전한 반면, 우크라이나 지역은 리투아니아, 폴란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등 주변 강대국들의 지배를 번갈아 받으며 고난의 역사를 겪었다. 특히 17세기 이후 러시아 제국에 편입되면서 우크라이나의 언어와 문화는 '소(小)러시아'의 방언과 풍습으로 폄하되며 억압받았다. 소련 시절의 상처는 더욱 깊다. 1930년대 스탈린의 강제적인 농업 집단화 정책으로 인해 **'홀로도모르(Holodomor, 대기근)'**가 발생, 수백만 명의 우크라이나인이 아사(餓死)하는 참극을 겪었다. 우크라이나인들은 이를 단순한 정책 실패가 아닌, 민족 말살을 위한 '의도된 학살'로 기억하며 러시아에 대한 깊은 불신과 반감을 갖게 되었다. 1991년 소련이 붕괴하면서 우크라이나는 마침내 독립 국가의 꿈을 이루었다. 그러나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의 독립을 온전히 인정하지 않았고, 자국의 '세력권(sphere of influence)' 안에 두려는 시도를 멈추지 않았다. 특히 러시아계 주민이 다수 거주하는 동부·남부 지역과 흑해 함대의 전략적 기지가 있는 크림반도는 갈등의 잠재적 뇌관으로 남았다. 제2부: 운명의 갈림길, 2014년 유로마이단과 크림반도 합병 독립 이후 우크라이나는 친(親)러시아와 친(親)서방 노선 사이에서 끊임없이 흔들렸다. 그 분기점이 된 사건이 바로 2014년 유로마이단(Euromaidan) 혁명이다. 2013년 11월, 친러 성향의 빅토르 야누코비치 당시 대통령이 유럽연합(EU)과의 협력 협정 체결을 중단하고 러시아로부터 150억 달러의 차관을 받기로 결정하자, 이에 반대하는 시민들이 수도 키이우의 독립광장(마이단 네잘레즈노스티)에 모여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이 시위는 해를 넘겨 이어졌고, 2014년 2월 경찰의 발포로 100여 명의 시위대가 사망하는 유혈사태로 번졌다. 결국 야누코비치 대통령은 러시아로 축출되었고, 의회는 그를 탄핵한 뒤 친서방 임시정부를 수립했다. 러시아는 이를 서방이 배후에서 조종한 '불법 쿠데타'로 규정하고 즉각 군사 행동에 나섰다. 푸틴 대통령은 크림반도의 러시아계 주민 보호를 명분으로 군대를 투입했다. 소속을 알 수 없는 '녹색 군인들(little green men)'이 크림반도의 주요 시설을 장악한 가운데, 러시아의 비호 아래 실시된 주민투표에서 압도적인 찬성으로 러시아 귀속이 결정되었다. 2014년 3월 18일, 러시아는 크림반도를 전격 합병했다. 이어 우크라이나 동부의 돈바스(도네츠크, 루한스크) 지역에서도 친러 분리주의 세력이 무장 봉기를 일으켰다. 러시아는 이들을 비밀리에 지원하며 내전을 부추겼고, 이후 8년간 이어진 돈바스 전쟁으로 1만 4천여 명이 사망했다. 2014년의 이 일련의 사태는 우크라이나 영토 주권에 대한 명백한 침해였으며, 2022년 전면전의 서막이었다. 제3부: '특별군사작전', 21세기 유럽 최악의 전쟁 발발 8년간의 돈바스 내전 이후,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의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가입 움직임에 극도로 민감하게 반응했다. 나토의 동진(東進)을 자국의 안보에 대한 실존적 위협으로 간주한 푸틴 대통령은 나토가 더 이상 확장하지 않을 것이라는 법적 보장을 요구했으나, 미국과 서방은 이를 거부했다. 결국 2022년 2월 24일 새벽, 푸틴은 우크라이나의 '비무장화'와 '탈나치화'를 명분으로 전격적인 침공을 개시했다. 러시아군은 북쪽(벨라루스 경유), 동쪽(돈바스), 남쪽(크림반도) 세 방향에서 수도 키이우를 향해 진격했다. 그러나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대통령을 중심으로 뭉친 우크라이나 군과 국민의 격렬한 저항에 부딪혔고, 서방의 신속하고 대대적인 군사 지원이 더해지면서 러시아의 '단기 섬멸전'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키이우 함락에 실패한 러시아군은 4월 초 수도권에서 퇴각한 뒤, 전쟁 목표를 동부 돈바스 지역 전체와 남부 해안지대의 완전한 장악으로 수정했다. 이후 전쟁은 마리우폴, 세베로도네츠크, 리시찬스크 등 동남부 도시들을 중심으로 포격과 시가전이 반복되는 참혹한 소모전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특히 마리우폴에서는 아조우스탈 제철소에서 최후까지 항전하던 우크라이나 군인들의 모습이 전 세계에 알려지며 전쟁의 비극을 상징하는 장면이 되기도 했다. 2022년 가을, 우크라이나군은 하르키우와 헤르손 지역에서 대규모 반격에 성공하며 점령지를 일부 탈환했으나, 2023년 이후 러시아군이 구축한 견고한 방어선에 막혀 전선은 교착상태에 빠졌다. 현재 양측은 수백 킬로미터에 달하는 참호선을 사이에 두고 드론, 포격, 미사일 공격을 주고받는 1차 세계대전식의 지리한 소모전을 이어가고 있다. 제4부: 전 지구를 덮친 전쟁의 그림자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단순히 두 나라의 문제를 넘어 전 세계에 심각한 파급 효과를 낳았다. 1) 에너지·식량 위기 세계적인 에너지 수출국인 러시아에 대한 서방의 경제 제재와 러시아의 '에너지 무기화'가 맞물리면서 국제 유가와 천연가스 가격이 급등했다. 특히 러시아산 가스 의존도가 높았던 유럽은 심각한 에너지 위기를 겪었으며, 이는 전 세계적인 인플레이션을 촉발하는 주요 원인이 되었다. 또한, '세계의 빵 바구니'로 불리는 우크라이나의 곡물 수출이 흑해 봉쇄로 막히면서 국제 곡물 가격이 폭등, 아프리카와 중동의 저개발 국가들을 중심으로 식량 위기가 심화되었다. 2) 신냉전 구도 고착화 이 전쟁을 계기로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서방 민주주의 진영과 러시아-중국을 중심으로 한 권위주의 진영 간의 대립 구도가 선명해졌다. 러시아의 위협을 직접적으로 느낀 핀란드와 스웨덴은 오랜 군사적 중립 노선을 포기하고 나토에 가입하며 나토의 결속력은 오히려 강화되었다. 반면, 중국은 러시아에 대한 비난을 삼가고 경제적으로 지원하며 서방에 공동 대응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는 국제 사회의 분열을 심화시키고, 유엔 등 기존의 국제기구의 무력함을 드러냈다. 3) 국제 질서의 재편 '주권 존중'과 '영토 보전'이라는 국제법의 대원칙이 강대국에 의해 무력으로 훼손되면서,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정글의 법칙'이 부활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이는 대만 해협, 남중국해, 한반도 등 다른 분쟁 지역에도 잠재적인 불안정성을 증대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대한민국 역시 에너지·원자재 가격 상승으로 인한 경제적 타격과 함께, 북한의 도발 및 북-러 군사 협력 강화라는 안보적 위협에 직면하게 되었다. 제5부: 안갯속의 출구, 끝나지 않은 전쟁의 미래 전쟁 3년 차에 접어든 현재, 출구는 여전히 보이지 않는다. 양측의 입장이 워낙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어 가까운 시일 내에 평화 협상이 재개될 가능성은 희박하다. 우크라이나: 1991년 국경선 기준으로 크림반도와 돈바스를 포함한 모든 점령지에서의 러시아군 완전 철수와 전쟁 범죄자 처벌, 그리고 피해보상을 요구하고 있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영토를 일부라도 포기하는 것은 국민적 동의를 얻을 수 없다는 강경한 입장이다. 러시아: 점령지(도네츠크, 루한스크, 자포리자, 헤르손 등 4개 주와 크림반도)에 대한 영유권을 인정하고,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 포기 및 중립국화를 요구하고 있다. 푸틴 대통령에게 있어 전쟁의 패배는 곧 정치적 생명의 끝을 의미하기에 쉽게 물러서기 어려운 상황이다. 전문가들은 다음과 같은 시나리오를 제시하지만, 어느 하나도 쉬운 길은 아니다. 장기 소모전 지속: 현재와 같은 교착 상태가 수년간 더 이어지는 시나리오. 양국의 인적, 물적 손실이 극대화되지만, 어느 한쪽도 결정적인 승기를 잡지 못하는 가장 비극적인 전망이다. 휴전을 통한 '동결 분쟁'화: 양측이 소모전에 지쳐 현재의 전선을 기준으로 휴전에 합의하는 시나리오. 이는 한반도와 같이 전쟁이 공식적으로 끝나지 않은 '얼어붙은 분쟁(Frozen Conflict)' 상태로 전환되는 것을 의미하며, 언제든 다시 충돌할 수 있는 불안정한 평화가 될 것이다. 내부 변수에 의한 급격한 종전: 러시아나 우크라이나 내부에서 급격한 정치적 변화(정권 붕괴, 쿠데타 등)가 발생하거나, 서방의 지원이 급격히 줄어드는 등의 변수로 인해 전쟁이 예상치 못하게 끝나는 시나리오. 결론적으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21세기 국제 사회가 직면한 가장 중대한 도전이다. 이 전쟁의 종식은 단순히 포성과 총성이 멎는 것을 넘어, 파괴된 도시의 재건, 수많은 난민의 귀환, 그리고 무엇보다 깊게 파인 증오와 불신의 상처를 치유하는 기나긴 과정을 필요로 할 것이다. 힘의 논리가 아닌 대화와 외교, 그리고 국제법의 원칙이 다시 회복될 수 있을지, 전 세계가 이 동토의 비극을 주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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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8-23
  • 히말라야의 그림자, 중국-인도 국경 분쟁
    21세기 아시아의 힘의 균형을 좌우할 두 거인, 중국과 인도가 세계의 지붕 히말라야 산맥을 사이에 두고 수십 년째 이어온 갈등의 골이 깊어지고 있다. 1962년 발발했던 국경 전쟁의 상흔은 여전히 아물지 않았으며, 최근 몇 년간 발생한 크고 작은 무력 충돌은 양국 관계를 최악으로 치닫게 했다. 잠시 소강상태를 보이며 대화 국면으로 전환하는 듯한 움직임도 있으나, 국경 지대에 증강 배치된 수만 명의 병력과 끊임없이 확장되는 군사 인프라는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과 같다. 오늘일보 국제이슈 기획 네 번째 시리즈에서는 중-인 국경 분쟁의 역사적 뿌리부터 최근의 군사적 대치 상황, 그리고 이 갈등이 동북아를 넘어 국제 정세에 미치는 파장까지 심층적으로 분석한다. 제1부: 역사의 덧칠, 분쟁의 씨앗이 된 '선' 중국과 인도가 맞댄 국경은 약 3,488km에 달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양국이 공식적으로 합의한 국경선은 단 한 뼘도 존재하지 않는다. 현재의 갈등은 영국 식민지 시절 그어진 두 개의 경계선, 즉 '존슨 라인(Johnson Line)'과 '맥마흔 라인(McMahon Line)'에서 비롯됐다. 서부 국경의 분쟁지인 아크사이친(Aksai Chin) 고원은 존슨 라인과 관련이 깊다. 1865년 영국 측량사 윌리엄 존슨이 제안한 이 경계선은 아크사이친을 당시 잠무-카슈미르 왕국의 영토로 포함시켰다. 인도는 이를 계승하여 아크사이친이 자국령 라다크의 일부라고 주장한다. 반면 중국은 청나라 시대부터 실효적으로 지배해왔으며, 영국이 제안한 또 다른 경계선인 '매카트니-맥도널드 라인'을 근거로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다. 중국은 1950년대 인도가 인지하지 못하는 사이 이곳에 신장과 티베트를 잇는 전략 도로(G219 국도)를 건설하며 실효 지배를 굳혔다. 동부 국경의 핵심 분쟁지는 인도가 실효 지배 중인 아루나찰프라데시(Arunachal Pradesh) 주다. 이곳의 경계는 1914년 영국, 티베트, 중국 대표가 모인 심라 회의에서 영국 측 대표였던 헨리 맥마흔이 제안한 '맥마흔 라인'을 따른다. 인도는 이 조약을 근거로 아루나찰프라데시를 자국 영토로 간주하지만, 중국은 당시 티베트가 독립적인 외교권을 행사할 수 없었고 중앙 정부의 최종 승인이 없었다는 이유로 맥마흔 라인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다. 중국은 이 지역을 '짱난(藏南, 남티베트)'이라 부르며 약 9만㎢에 달하는 영토의 반환을 요구하고 있다. 이처럼 불분명하고 상호 인정되지 않은 국경선은 1959년 티베트 봉기 이후 달라이 라마가 인도로 망명하면서 악화된 양국 관계에 기름을 부었다. 결국 1962년 10월, 중국 인민해방군이 아크사이친과 동부 국경 전역에서 대규모 공격을 감행하며 **중-인 전쟁(Sino-Indian War)**이 발발했다. 한 달여간의 전쟁에서 인도는 참패했고, 중국은 아크사이친에 대한 지배를 확고히 했다. 이 전쟁은 인도에게 '씻을 수 없는 굴욕'으로, 중국에게는 '인도의 팽창주의에 대한 응징'으로 기억되며 양국 국민의 가슴에 깊은 불신과 적대감을 남겼다. 제2부: 총성 없는 전쟁, 21세기 국경 대치의 새로운 양상 1962년 전쟁 이후에도 국경에서의 긴장은 계속됐다. 1967년 시킴 국경의 나투 라(Nathu La)와 초 라(Cho La)에서 포격전이 벌어졌고, 1975년에는 아루나찰프라데시 툴룽 라(Tulung La)에서 매복 공격으로 인도군 4명이 사망하는 등 유혈 사태가 이어졌다. 이후 양국은 국경 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모색하며 1993년 '실질통제선(Line of Actual Control, LAC) 평화 및 안정 유지 협정'을 체결하는 등 관계 개선에 나섰다. 이 협정은 국경 지역에서 총기 사용을 엄격히 금지하는 내용을 담고 있어, 이후 발생하는 충돌이 주먹과 몽둥이, 돌 등이 동원되는 원시적인 '난투극'의 양상을 띠게 된 배경이 되었다. 평화 유지를 위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21세기 들어 양국의 국력 신장과 함께 국경 지역에서의 군사 인프라 건설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충돌은 더욱 잦고 격렬해졌다. 1) 2017년 도클람 대치 (Doklam Standoff) 2017년 6월, 분쟁은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중국군이 인도-중국-부탄 3국의 국경이 만나는 도클람(중국명 둥랑, 洞朗) 고원에서 도로 건설을 시작하자, 부탄의 요청을 받은 인도군이 이를 저지하면서 73일간의 군사적 대치가 시작됐다. 도클람은 인도의 전략적 요충지인 '실리구리 회랑(Siliguri Corridor)'을 위협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 폭이 20km에 불과해 '닭의 목'으로 불리는 이 회랑은 인도 본토와 북동부 7개 주를 잇는 유일한 통로다. 중국이 도클람에 도로를 건설할 경우, 유사시 인도 북동부 지역이 본토와 단절될 수 있다는 안보적 위기감이 인도군의 개입을 불렀다. 양국은 수천 명의 병력을 동원해 일촉즉발의 상황을 이어가다 브릭스(BRICS) 정상회의를 앞두고 양국 군 동시 철수에 합의하며 대치 상황을 마무리지었다. 하지만 이는 미봉책에 불과했다. 2) 2020년 갈완 계곡 충돌 (Galwan Valley Clash) 2020년 6월 15일 밤, 서부 국경 라다크 지역의 갈완 계곡에서 양국 군 사이에 1975년 이후 45년 만에 사망자가 발생하는 최악의 유혈 충돌이 벌어졌다. 인도 측이 실질통제선(LAC) 인근에 건설한 도로와 다리에 중국군이 이의를 제기하며 텐트를 설치하자, 이를 철거하는 과정에서 양측의 격렬한 몸싸움이 시작됐다. 총기 대신 못이 박힌 몽둥이와 돌, 주먹이 오가는 난투극 끝에 인도군 20명이 사망하고 중국군에서도 최소 4명의 사망자를 포함한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이 사건은 인도 전역에 거대한 반중(反中) 감정을 불러일으켰고, 양국 관계는 1962년 전쟁 이후 최악의 상황으로 치달았다. 갈완 충돌 이후 양국은 국경 지대에 각각 5만에서 6만 명에 달하는 병력과 함께 탱크, 전투기, 미사일 등 중화기를 전진 배치하며 군사적 긴장을 최고조로 끌어올렸다. 제3부: 히말라야의 군비 경쟁 - 도로, 공항, 그리고 병력 갈완 충돌 이후, 중국과 인도는 국경 지대의 군사적 우위를 점하기 위해 천문학적인 비용을 쏟아부으며 인프라 건설과 군비 증강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이는 단순한 병력 배치를 넘어, 유사시 신속한 병력과 물자 수송, 그리고 장기적인 주둔을 가능하게 하는 실질적인 군사력 강화 조치다. 중국: 중국은 '서부대개발' 전략의 일환으로 티베트 자치구에 막대한 투자를 하며 철도와 도로, 공항 등 군사적으로 전용 가능한 인프라를 수십 년간 꾸준히 건설해왔다. 특히 티베트의 중심도시 라싸와 국경 지역을 잇는 도로망과 칭짱철도는 대규모 병력과 보급품을 히말라야 고산지대로 신속하게 이동시키는 대동맥 역할을 한다. 최근에는 국경 인근에 새로운 활주로를 건설하고 기존 공항 시설을 확장하며 공군력을 강화하는 한편, 국경 마을을 '샤오캉(小康) 마을'이라는 이름으로 요새화하여 민간인 거주와 군사적 전초기지의 역할을 동시에 수행하도록 하고 있다. 인도: 과거 중국에 비해 국경 인프라 개발에 뒤처졌다는 평가를 받아온 인도는 나렌드라 모디 총리 집권 이후 국경도로기구(BRO)를 중심으로 도로, 교량, 터널 건설에 속도를 내고 있다. 특히 갈완 충돌 이후에는 라다크 지역과 아루나찰프라데시를 중심으로 모든 기상 조건에서 병력 이동이 가능한 도로망 확충에 사활을 걸고 있다. 인도는 또한 프랑스제 라팔 전투기, 미국제 M777 초경량 곡사포와 아파치 공격헬기 등 최신 무기를 국경 지대에 집중 배치하며 중국의 군사적 압박에 대응하고 있다. 최근에는 기존의 1만 명에 더해 1만 명의 추가 병력을 중국과의 국경에 배치하기로 결정하는 등 군사적 대비 태세를 강화하고 있다. 이러한 양국의 군비 경쟁과 인프라 확충은 국경을 더욱 불안정하게 만드는 '안보 딜레마'를 심화시키고 있다. 한쪽의 방어적 조치가 다른 쪽에는 공격적 위협으로 인식되어 연쇄적인 군비 증강을 촉발하는 악순환이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제4부: 지정학적 파장 - 미-중 대립의 또 다른 전선 중-인 국경 분쟁은 단순히 두 나라 간의 영토 문제를 넘어, 인도-태평양 지역의 패권을 둘러싼 미국과 중국의 지정학적 경쟁과 복잡하게 얽혀 있다. 갈완 충돌 이후 인도는 전통적인 '비동맹' 외교 노선에서 벗어나 미국과의 안보 협력을 급격히 강화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미국, 일본, 호주와 함께하는 4개국 안보 협의체 **쿼드(Quad)**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이 대표적이다. 인도는 쿼드를 통해 중국을 견제하고, 미국으로부터 군사 기술 이전과 정보 공유 등 실질적인 지원을 얻고 있다. 미국 역시 인도를 중국의 부상을 견제할 핵심 파트너로 보고, 인도-태평양 전략의 한 축으로 삼아 관계를 격상시키고 있다. 중국은 인도의 이러한 행보를 미국이 주도하는 '아시아판 나토'의 일원으로 편입되어 중국을 포위하려는 시도라며 강하게 경계하고 있다. 중국의 싱크탱크들은 인도의 외교 정책이 미국의 영향을 받고 있으며, 미국을 등에 업고 국경에서 더욱 대담하고 강경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고 분석한다. 이처럼 중-인 국경 분쟁은 미-중 전략 경쟁의 대리전 양상을 띠며, 갈등의 해결을 더욱 어렵게 만들고 있다. 한편, 중국은 파키스탄, 스리랑카, 네팔 등 인도의 주변국에 대한 경제적, 군사적 영향력을 확대하며 인도를 압박하는 '진주 목걸이' 전략을 구사하고 있다. 이에 맞서 인도는 '동방 정책(Act East Policy)'을 통해 아세안 국가들과의 관계를 강화하고, 해군력을 증강하며 인도양에서의 영향력 유지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 제5부: 갈등과 협력 사이, 위태로운 미래 최근 중-인 관계는 극심한 갈등 속에서도 대화와 협력의 끈을 완전히 놓지는 않고 있다. 2024년 10월, 양국은 국경 지역에서의 단계적 병력 철수와 순찰로의 전환에 합의했다고 발표했으며, 2025년 8월에는 왕이 중국 외교부장의 인도 방문을 계기로 2020년 이후 중단되었던 국경 무역과 직항 항공편 운항을 5년 만에 재개하기로 합의했다. 이는 양국 모두 전면적인 군사 충돌이 가져올 파괴적인 결과를 원치 않으며, 세계 1, 2위의 인구 대국이자 거대한 경제 규모를 가진 양국 관계의 완전한 파탄을 막기 위한 최소한의 관리 노력으로 풀이된다. 하지만 이러한 해빙 무드에도 불구하고 근본적인 신뢰의 위기는 해소되지 않고 있다. 인도는 국경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양국 관계의 정상화는 불가능하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으며, 중국은 국경 문제를 양자 관계의 일부로 국한하고 경제 등 다른 분야에서의 협력을 우선시하자는 입장을 보이고 있어 근본적인 시각차를 좁히지 못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가까운 미래에 중-인 국경 문제가 완전히 해결될 가능성은 매우 낮다고 전망한다. 양국 모두에게 국경 문제는 영토 주권을 넘어 국가적 자존심과 국내 정치적 지지 확보와 직결된 민감한 사안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전면전과 같은 최악의 시나리오는 피하더라도, 국경에서의 군사적 대치와 우발적 충돌의 위험은 상존할 것으로 보인다. 국경 지대에 수만 명의 병력이 지근거리에서 대치하고 있는 현재 상황은 작은 오판이나 우발적 사건이 언제든 대규모 충돌로 비화될 수 있는 극도로 위험한 '살얼음판'과 같다. 히말라야의 눈 덮인 봉우리에 드리운 용과 호랑이의 그림자는 21세기 아시아, 나아가 세계의 평화와 안정을 위협하는 가장 큰 지정학적 리스크 중 하나로 남을 것이다. 양국의 지도자들이 갈등의 확산을 막고 평화적 해결을 위한 지혜를 발휘할 수 있을지, 전 세계가 숨죽이며 지켜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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